●──── 구약강론/소선지서

01.스바냐 1:1-18 여호와의 날

불편한 진리 2014. 4. 9. 13:26

여호와의 날
스바냐 1:1-18
 
 
인간은 누구나 “복”이란 말을 좋아합니다. 우리 한국 민족은 특히 악귀를 쫓고 복을 부른다는 의미에서 숟가락, 이불, 장롱 등에 ‘복’(福)이라는 글자를 새겨 넣습니다. 그래서 성경에서도 복이라는 말이 나오니까 앞뒤도 생각하지 않고 복 주시는 하나님으로 인식합니다. 특히 신명기 28장에 의하면 “나와도 복을 받고 들어가도 복을 받고 떡반죽 그릇이 복을 받고···”하는 구절을 좋아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그런 식으로 우리가 생각한 복에 대한 개념으로 짜 맞출 수 있는 성경 본문이 아닙니다.
신명기 28:1-14에 보면 하나님께서 가나안 땅에서 허락하실 복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언약의 말씀에 순종하면 하나님께서 그 땅에서 누릴 복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가나안 땅에서 이런 복을 누린다는 것은 하나님의 언약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언약은 언약의 땅에서 성취됩니다.
그런데 그 다음 15절부터는 복에 대한 선언보다도 훨씬 많은 부분을 할애하여 저주에 대하여 기록하고 있습니다. 인간이란 애초에 하나님을 좋아서 선택하여 섬기게 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먼저 사랑하여 주셨기에 인간이 하나님을 섬길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이런 연고로 인간은 언제나 하나님을 배반하고 우상을 섬기며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게 돌려 버리는 죄의 본성이 드러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복과 저주가 지금도 이루어지는 것처럼 많은 목회자들이 교인들에게 엄포를 놓기도 하고 목회자를 대적하면 이러한 저주를 받는 것으로 설교하기도 하는데 이는 대단히 잘못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언약의 성격을 몰라서 그렇습니다. 지금 우리나라에서가 아니라 모세 당시에 가나안 땅에서 적용되는 말씀입니다. 그러면 오늘날은 어떻게 적용됩니까? 우리는 신명기의 이 말씀을 염두에 두고 스바냐서를 상고해 봅시다.
스바냐는 유다왕 요시야 시대에 활동했던 선지자입니다. 그렇다면 예레미야와 같은 시대에 사역했던 선지자일 것입니다. 우리는 예레미야의 심정으로 이 스바냐서를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스바냐는 하나님의 메시지를 너무나 광범위하게 적용해서 나타내고 있음에 우리는 놀라야 합니다.
스바냐 선지자는 이 책의 처음부터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내가 지면에서 모든 것을 진멸하리라”(2절)는 말씀으로 시작하고 있습니다. 얼마나 지금 급박한 것인가를 알 수 있습니다. 계속해서 3절에 보면 노아 홍수 때에 하나님께서 심판을 선언하시던 그 용어로 지금 이 땅의 모든 피조물을 진멸하시겠다고 선언하십니다. 사람들과 공중의 새와 바다의 고기까지 진멸하고 멸절시키겠다는 표현은 마치 창세기 1장에 나오는 창조를 무효화 시키겠다는 의도처럼 느껴집니다. 창세기 6장에 나오는 노아의 홍수심판의 재현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뿐만 아니라 특별히 유다도 진멸할 것임을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의 택한 백성이라고 하는 것이 무색합니다. 유다도 하나님의 진노의 대상에서 제외될 수 없는 것입니다. 이것을 두고 “여호와의 날”(7절), “여호와의 희생의 날”(8절), “여호와의 큰 날”(14절)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부분적인 심판이 아니라 모든 피조세계의 종말을 고하게 되는 하나님의 날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여기서 하나님께서 얼마나 화가 났고 진노하셨으면 이렇게까지 자기 백성에게 이런 식으로밖에는 달리 표현이 안 되는가에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왜 범죄 한 유다만 심판하시는 것이 아니라 모든 피조물에게까지 하나님의 진노의 대상이 되어야 합니까? 그것은 하나님께서 유다(이스라엘)를 어떤 목적으로 세우셨는가에 의미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건지시고 제사장 나라로 삼으셨습니다(출19장). 이스라엘이 제사장 나라가 되었다는 것은 하나님의 언약을 성취하는 도구가 되어 모든 이방 민족들까지 하나님께로 인도하는 사명을 감당하는 것이었습니다. 그것 때문에 그들에게 가나안 땅을 주시고 그 땅을 통해 천국에 대한 가르침을 메시지화 했습니다.
그래서 11절에 의하면 하나님의 심판이 내려지는 곳이 바로 가나안이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신명기 28장에서 언급하고 있듯이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에서 복을 받는 것은 언약의 말씀에 순종할 때였습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언약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는 이스라엘은 언약의 땅 자체가 그들을 용납할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유다가 이러한 하나님의 무서운 진노를 당할 수밖에 없는 것은 가나안 땅에 거하는 자들이 제대로 가나안 땅에서 행해야 할 율법의 말씀을 무시하였던 것입니다. 우상을 섬기며(5-6절), 강포와 궤휼이 횡행하게 했던 것입니다(9절). 약속의 땅의 본질을 무시하고 살았으므로 그 약속의 진가를 보여주기 위하여 여호와의 날이 도래한다는 이야기입니다. 약속의 땅이란 철저하게 악이 발붙일 수 없도록 사전에 약속된 땅을 두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스바냐는 하나님의 창조까지도 하나님의 언약과 연관되어 있다고 우리에게 일러주고 있습니다. 실로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단순히 유다의 하나님만이 아니라 모든 만물을 지으신 만물의 하나님이십니다. 그분은 오늘 우리의 하나님이십니다. 유다가 하나님의 언약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았기에 만물이 하나님의 진노의 대상이 되었던 것입니다.
여기에 누가 순종할 수 있었습니까? 예수님은 자신이 십자가를 지는 사건을 가지고 새 언약이라고 하셨습니다. 새 언약이란 하나님의 하신 모든 옛 언약을 완성하시는 언약이며 자신의 십자가로 새롭게 이루는 나라임을 선언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께서 성취하신 새 언약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 다 통일된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인간의 범죄로 모든 피조물이 진멸될 위기에 처했으나 그리스도의 언약에 의한 십자가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안에서 이제 새롭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되었다는 것은 구약식으로 표현하자면 가나안 땅에 산다는 의미이며, 그리스도 안에 있음으로 언약의 말씀에 위배된 모든 진노를 주님이 다 받으셨다는 것입니다. 이제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우리에게 주님이 말씀하십니다. 오늘날 교회가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하나님 나라에 살게 하는 복이며 이 복을 전하는 제사장 나라로서의 삶을 산다면 여호와의 날이 진노의 날이 아니라 기쁨의 날이 될 것입니다(김영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