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 출애굽기 1:1-14 이름은 이러하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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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애굽기 강론 01
출애굽기 1:1-14
이름은 이러하니
이스라엘의 출애굽에 대하여 “40 이스라엘 자손이 애굽에 거주한 지 사백삼십 년이라 41 사백삼십 년이 끝나는 그날에 여호와의 군대가 다 애굽 땅에서 나왔은즉”(출 12:40-41)이라고 말씀한다(참고 갈 3:17). 출애굽이 주전 1446년에서 430년을 거슬러 가면 야곱이 가족을 이끌고 애굽으로 이주한 것은 주전 1876년이 된다. 이때 야곱의 나이가 130세였고 요셉의 나이는 39세였다. 야곱이 147세에 죽음을 맞이하였을 때 요셉은 56세였다(주전 1859년). 그 후 요셉이 110세에 죽음에 이르렀으니 주전 1805년으로 애굽에 이주한 지 71년이 되던 때였다.
그리고 모세에 대하여 “그들이 바로에게 말할 때에 모세는 팔십 세였고 아론은 팔십삼 세였더라”(출 7:7)라고 말씀한다. 1446년이라는 출애굽 연도를 기준으로 하면 모세의 출생은 1526년이 된다. 그러니까 요셉의 죽음(주전 1805년) 이후 모세의 출생(주전 1526년)까지는 279년의 간격이 있다. 다시 말해서 창세기 이후 모세의 출생이 있기까지 하나님의 계시가 279년간 없었다는 뜻이다. 이 기간 계시의 말씀이 없었다면 이스라엘은 어떤 상태에 있었나? 그것을 출애굽기에서 밝혀 준다.
“야곱과 함께 각각 자기 가족을 데리고 애굽에 이른 이스라엘 아들들의 이름은 이러하니”(1절). 우리 성경에서는 어법상 “이스라엘 아들들의 이름은 이러하니”라는 표현이 뒤에 나오지만 히브리어로 보면 ‘웨엘레 셰모트’(그리고 이름들은 이러하다)로 시작한다. 유대인들에게는 이것이 책 제목이다(‘출애굽기’라는 명칭은 70인역에서 ‘출발, 나감, 탈출’이라는 뜻의 ‘엑소도스’라고 붙인 것에 기인한 것으로 우리 성경도 이 이름을 따라 이름 붙였다).
‘그리고’라는 접속사를 사용하였다는 것은 창세기와 출애굽기가 279년의 간격이 있지만 연속된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언약이 후손들에게도 전달되어 이루어지는 과정을 보여 준다는 의미이다. 그렇다면 계시의 말씀이 없었다 하더라도 하나님은 여전히 자기 언약을 위해 일하셨음을 알 수 있다. 이 과정에서 드러나는 것은 인간이란 자기중심적인 존재라는 사실이다(신 9:16, 17:17, 슥 7:6). 그러나 하나님은 자기 언약을 위하여 이스라엘을 택하시고 친히 열심으로 이루신다(사 48:11).
여호와께서 자기를 위하여 야곱 곧 이스라엘을 자기의 특별한 소유로 택하셨음이로다(시 135:4)
이는 남은 자가 예루살렘에서 나오며 피하는 자가 시온산에서 나올 것임이라 만군의 여호와의 열심이 이를 이루시리이다(사 37:32)
이런 점에서 “야곱”과 “이스라엘”이라는 표현을 교차하여 썼다. 야곱을 통해 이스라엘이라는 나라를 만드셨다. 육의 야곱을 죽여 영의 이스라엘로 새로운 시작을 이루시는 하나님이라는 의미이다. 다시 말해서 야곱을 죽인 이스라엘의 아들들의 이름은 언약 안에서 하나님의 이름이 되는 것이다. 이것을 다른 표현으로 출애굽이라고 한다.
“2 르우벤과 시므온과 레위와 유다와 3 잇사갈과 스불론과 베냐민과 4 단과 납달리와 갓과 아셀이요 5 야곱의 허리에서 나온 사람이 모두 칠십이요 요셉은 애굽에 있었더라”(2-5절). 아들들의 이름을 언급함에 있어서 출생한 순서가 아니며 이스라엘이 축복한 순서도 아닌 어머니를 중심으로(레아 – 라헬 / 빌하 – 실바) 기록하였다. 레아의 아들들 - 르우벤, 시므온, 레위, 유다, 잇사갈, 스불론과 라헬의 아들 - 베냐민, 그리고 라헬의 시녀 빌하의 아들들 -단, 납달리와 레아의 시녀 실바의 아들들 - 갓, 아셀의 순서로 기록하였는데 이 분류는 ‘자유하는 자’와 ‘종’의 관계로 두 언약을 나타낸다(참고 갈 4:22-24). 이는 하나님의 언약에 의해서 영으로 난 이스라엘과 육을 따라 난 애굽과의 관계를 비유한다. 현실은 육의 애굽이 영의 이스라엘을 종으로 삼고 있으나 하나님께서 애굽에 먼저 보내신 요셉을 통해 종의 자리에서 빼내어 자유하는 자의 아들로 언약을 온전히 성취할 것을 “칠십”으로 나타내신 것이다.
“야곱의 허리”라는 말의 ‘야레크’는 ‘허리, 몸, 넓적다리, 허벅지, 환도뼈, 생식기’라는 뜻으로 하나님께서 “야곱의 허벅지(야레크) 관절을 치매 야곱의 허벅지(야레크) 관절이 그 사람과 씨름할 때에 어긋났더라”(창 32:25)라고 말씀한다. 즉 힘을 상징하는 허리가 꺾인 것은 죽음의 흔적이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께서 인간의 힘을 꺾고 생명의 근원이 언약에 있다는 것이다. 출애굽기는 이러한 언약이 담긴 이스라엘로 새롭게 시작한다는 의미이다.
“6 요셉과 그의 모든 형제와 그 시대의 사람은 다 죽었고 7 이스라엘 자손은 생육하고 불어나 번성하고 매우 강하여 온 땅에 가득하게 되었더라”(6-7절). 야곱의 허리가 꺾인 자가 야곱의 아들로 또 다른 야곱이다. 이런 점에서 그들은 다 죽었다고 말씀한다. 하나님께서 죽은 야곱의 자리에서 살려주심의 은혜를 입혀 새로운 이스라엘 민족으로 생육하고 번성하여 강한 존재로 만드셨다. “온 땅”이라고 번역한 표현에서 ‘콜’(모든)을 쓰지 않고 ‘에트’를 썼다. 직역하면 ‘그 땅 가운데서’라는 말이다. 그러므로 문자적으로 이스라엘이 세상에서 강한 존재가 되었다는 것이 아니다. 강한 존재가 되었으면 애굽을 지배하고 있어야 하나 그들은 노예로 있었다. 한마디로 하나님께서 그들을 고센 땅 가운데서 진리의 말씀으로 충만하게 하셨기에 그 진리의 말씀을 보여 주실 때가 되었음을 의미한다. 그래서 이 말씀에 이스라엘이 무엇을 하였더라는 것이 없다. 이스라엘은 죽음 가운데 있었기 때문이다.
“8 요셉을 알지 못하는 새 왕이 일어나 애굽을 다스리더니 9 그가 그 백성에게 이르되 이 백성 이스라엘 자손이 우리보다 많고 강하도다”(8-9절). “요셉을 알지 못하는 새 왕”(8절)이란 역사적으로 보자면 아시아족으로 알려진 힉소스 왕조가 주전 1730년경에 애굽을 장악하여 다스렸으나 이들을 멀리 팔레스틴까지 쫓아내고 애굽의 18왕조로 알려진 첫 통치자 아모스(주전 1584-1560년)가 왕이 된 때를 의미하는 표현이다. 언약적으로 말하자면 요셉의 때에 요셉을 통해 은혜로 베풀어진 하나님의 언약에 하나 되지 못한 왕이라는 의미이다. 알지 못한다는 것을 ‘로 야다’라고 쓰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스데반은 그의 강론에서 “17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때가 가까우매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번성하여 많아졌더니 18 요셉을 알지 못하는 새 임금이 애굽 왕위에 오르매 19 그가 우리 족속에게 교활한 방법을 써서 조상들을 괴롭게 하여 그 어린아이들을 내버려 살지 못하게 하려 할새”(행 7:17-19)라고 하였을 때 “새 임금”을 ‘헤테로스’(같은 종류 안에서 다른 것이 아닌 전혀 다른 차원의 ‘다르다’라는 뜻)로 썼다.
그러므로 “요셉을 알지 못하는 새 왕”(8절)이란 예수 그리스도를 알지 못하고 십자가 죽음에 동참되지 못한 종교인의 모습을 나타낸다. 세상에서 왕으로 살고자 하는 우리 자신의 모습이고 거짓 교사로 율법적 행위로 의를 이루는 것으로 믿는 믿음없는 죄인의 모습이다. 결국 애굽이나 애굽의 왕은 진리를 계시하기 위한 도구이다.
“이스라엘 자손이 우리보다 많고 강하도다”(9절)라는 표현은 단순히 이스라엘이 애굽보다 수가 물량적으로 많고 강력함을 말씀하는 것이 아니라 애굽의 경계 대상이 되었다는 의미의 표현이다. 언약을 알지 못한 상태는 하나님을 대적할 수밖에 없다. 따라서 이는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몸 된 교회를 미워하고 거부하며 경계의 대상으로 삼는 세상과 율법적 행위로 자기 의를 이루어 예수 그리스도를 대적하는 존재에 대한 계시이다. 이런 점에서 하나님의 언약에 하나 되지 못한 상태에 있는 전혀 다른 차원의 왕이 애굽을 다스리게 되었기에 이스라엘은 핍박 가운데 있을 수밖에 없음을 암시한다.
빛이 어둠에 비치되 어둠이 깨닫지 못하더라(요 1:5)
18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면 너희보다 먼저 나를 미워한 줄을 알라 19 너희가 세상에 속하였으면 세상이 자기의 것을 사랑할 것이나 너희는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요 도리어 내가 너희를 세상에서 택하였기 때문에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느니라 20 내가 너희에게 종이 주인보다 더 크지 못하다 한 말을 기억하라 사람들이 나를 박해하였은즉 너희도 박해할 것이요 내 말을 지켰은즉 너희 말도 지킬 것이라 … 23 나를 미워하는 자는 또 내 아버지를 미워하느니라(요 15:18-20, 23)
그러나 그 때에 육체를 따라 난 자가 성령을 따라 난 자를 박해한 것 같이 이제도 그러하도다(갈 4:29)
“10 자, 우리가 그들에게 대하여 지혜롭게 하자 두렵건대 그들이 더 많게 되면 전쟁이 일어날 때에 우리 대적과 합하여 우리와 싸우고 이 땅에서 나갈까 하노라 하고 11 감독들을 그들 위에 세우고 그들에게 무거운 짐을 지워 괴롭게 하여 그들에게 바로를 위하여 국고성 비돔과 라암셋을 건축하게 하니라”(10-11절). “전쟁이 일어날 때”(10절)라는 표현은 이스라엘과 애굽의 관계가 단순히 서로를 미워하는 정도가 아니라 적대적 관계로 진리의 전쟁을 할 수밖에 없는 관계로 설정되어 있다는 뜻이다.
이런 점에서 “지혜롭게 하자”(10절)라는 표현은 ‘기민하게 대하자, 현명하게 대처하자’라는 뜻인데 이는 애굽의 지혜, 즉 세상적 지혜에 불과한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에게 무거운 짐을 지워 괴롭게”(11절)하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무거운 짐을 지워 괴롭게 만든다는 것은 한마디로 율법적 행위로 억압하여 자신들의 종교적 행위를 더욱 공고히 하자는 생각이다. 오늘날도 율법을 613가지로 만들어 그것을 사람들에게 짐 지워 더욱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우리의 믿음을 굳건하게 하자는 거짓 교사들의 가르침이 애굽적 지혜이다(마 23:4).
우리가 세상에서 특별히 너희에 대하여 하나님의 거룩함과 진실함으로 행하되 육체의 지혜로 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은혜로 행함은 우리 양심이 증언하는 바니 이것이 우리의 자랑이라(고후 1:12)
결국 거짓 교사들의 가르침과 그 가르침을 따라 율법적 행위에 매인 자들의 목적은 “바로를 위하여 국고성 비돔과 라암셋을 건축하게 하니라”(11절)라는 말씀으로 그 본질이 잘 드러난다. “국고”의 ‘미스케나’는 ‘저장 창고’라는 뜻이고, “비돔”의 ‘피톰’은 ‘아툼 신의 집’이라는 뜻이며, “라암셋”은 ‘애굽의 태양신 라가 창조하였다, 혹은 태양신 라가 창조한 땅’이라는 뜻이다. 이전에 야곱의 아들들이 요셉에 의해 자리하게 된 그 장소는 언약의 아들들이 거함으로 하나님 왕국을 보여 주는 것이었으나 이제 학대하는 장소가 되어 언약을 대적하는 비진리의 창고로 드러낸다. 언약 백성들을 이용하여 세운다는 것은 진리의 하늘 창고인 것처럼 나타낸다는 의미이다.
오늘날 교회당을 성전이라고 하면서 거기에 보물을 쌓아야 한다고 성경 말씀을 인용하여 헌금을 강요한다든지 또 거룩한 성전(?)에서 기도하면 하나님이 더 잘 들어주실 것처럼 강요하고, 목사의 설교를 하나님의 말씀으로 들으면 믿음이 생긴다는 식으로 세뇌시켜 건물 교회가 비진리의 창고가 되게 하는 한국교회의 모습이다.
“12 그러나 학대를 받을수록 더욱 번성하여 퍼져나가니 애굽 사람이 이스라엘 자손으로 말미암아 근심하여 13 이스라엘 자손에게 일을 엄하게 시켜 14 어려운 노동으로 그들의 생활을 괴롭게 하니 곧 흙 이기기와 벽돌 굽기와 농사의 여러 가지 일이라 그 시키는 일이 모두 엄하였더라”(12-14절). “학대를 받을수록 더욱 번성하여 퍼져나가니”(12절)라는 표현은 진리의 말씀은 세상의 학대와 상관없이 전파되고 충만하게 된다는 뜻이다. 아니 세상의 학대, 핍박, 환난으로 인해 진리는 진리답게 드러난다. 이런 점에서 “학대”나 “어려운 노동”이란 율법의 짐을 지우는 행위이다. 종교인들은 건물 교회 안에서 일어나는 모든 예배나 봉사 행위를 하나님의 일이라고 주장한다. 이런 점에서 “농사의 여러 가지 일이라”(14절)라는 말의 ‘사데’는 ‘들, 밭, 전원, 땅’이라는 뜻으로 이 모든 일이 율법적 행위의 땅적 일이라는 의미이다.
“그 시키는 일이 모두 엄하였더라”(14절)라고 하였는데 “엄하였더라”의 ‘페레크’는 ‘쪼개다, 부숨, 엄격함, 무자비함’이라는 뜻이다. 애굽이 시키는 일이 진리의 말씀을 쪼개고 부수어 문자의 율법 아래 짐을 지게 만드는 것이다. 그러므로 율법적 행위에서 벗어나 믿음이신 예수 그리스도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 출애굽이고 ‘이름이 이러하니라’가 되는 것이다(20250713 강론/주성교회 김영대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