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구약강론/창세기

124. 창세기 48:12-22 이스라엘의 새 아들(2)

불편한 진리 2025. 6. 15. 14: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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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 강론 124

창세기 48:12-22

이스라엘의 새 아들(2)

 

야곱이 병들었다는 소식을 들은 요셉은 두 아들 므낫세와 에브라임을 데리고 야곱을 만난다. 야곱은 에브라임과 므낫세를 자기 아들로 삼는다. 그것을 가시적으로 보여 주는 것이 축복이다. 에브라임과 므낫세는 험난하게 걸어온 야곱의 언약 성취를 위해 주어진 하나님의 선물이요 또한 성취의 증거였다. 그래서 야곱은 언약의 특징을 그들 위에 분명히 남기고자 하는 것이다. 이 시점에서 야곱의 언약에 대한 특징을 가장 잘 드러낼 수 있는 자들이 바로 에브라임과 므낫세라는 뜻이다. 그래서 야곱은 요셉의 두 아들을 자기의 소유로 삼아 열두 지파로 언약 백성임을 확정하면서 축복한다.

“12 요셉이 아버지의 무릎 사이에서 두 아들을 물러나게 하고 땅에 엎드려 절하고 13 오른손으로는 에브라임을 이스라엘의 왼손을 향하게 하고 왼손으로는 므낫세를 이스라엘의 오른손을 향하게 하여 이끌어 그에게 가까이 나아가매 14 이스라엘이 오른손을 펴서 차남 에브라임의 머리에 얹고 왼손을 펴서 므낫세의 머리에 얹으니 므낫세는 장자라도 팔을 엇바꾸어 얹었더라”(12-14절). “무릎”이란 출산과 관련된 표현으로(창 30:3) 야곱이 에브라임과 므낫세를 낳았다는 의미이다. 자기 아들로 삼았기 때문이다(5절).

성경에서 오른쪽은 의와 영광의 자리로 표현한다(시 110:2, 히 1:3). 요셉도 이것을 알고 있었기에 요셉은 므낫세를 이스라엘의 오른손을 향하게 하고 에브라임은 왼손을 향하게 하였다. 그러자 이스라엘은 오른손을 에브라임의 머리에 얹고 왼손은 므낫세의 머리에 얹었다. 그러면서 성경은 그것을 명확하게 나타내기 위해 “므낫세는 장자라도 팔을 엇바꾸어 얹었더라”(14절)라고 말씀한다.

여기서 우리가 의문을 가지게 되는 것은 왜 야곱이 오른손과 왼손을 엇바꾸어 축복하는가 하는 문제이다. 그렇게 할 것이라면 처음부터 자리를 바꾸어서 앉도록 하면 되는 것이지 왜 요셉이 아들들을 앉힌 그 자리에 그대로 두고 손을 어긋나게 해서 축복하는가? 굳이 야곱이 이렇게 하였다는 것은 손을 어긋나게 하여 보여 주고 싶은 메시지가 있다는 뜻이다.

야곱은 막연하게 장자가 좋아서 형과 아버지를 속이고 장자권을 탈취하여 축복을 받고자 한 것은 아니었다. 장자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복을 자신의 복으로 만들기 위해서 취한 야곱의 방법이었다. 이처럼 야곱은 자신의 방법을 동원해서 하나님의 복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려고 한 사람이다. 그래서 야곱은 형 에서의 화를 피해 집을 떠나 타향살이를 하면서 무수한 고난을 받았다. 그 고난을 통해 야곱에게 주신 언약이 어떤 것인지를 배워야 했다. 남을 속이는 것이 특기인 야곱이 하란에서 속임을 당하는 그런 상황까지 겪어야 했었다. 이런 그가 약속의 땅을 밟으며 하나님의 복은 자신이 노력하고 애쓴다고 해서 주어지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언약에 의한 것임을 깨닫는다.

그러나 요셉은 야곱이 알았던 이러한 언약의 원리를 아직 알지 못하였다. 그래서 야곱 앞에 아들들을 세울 때 혈통적인 장자인 므낫세를 야곱의 오른손 위치에, 차자인 에브라임을 왼손의 위치에 세운다. 므낫세가 장자니 언약의 복은 므낫세를 통해 이루어진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요셉의 생각과는 달리 야곱은 손을 어긋나게 올려 축복한다.

그가 팔을 어긋나게 하여 흔히 장자라고 여겨지는 먼저 태어난 아이를 차자로 돌리고 나중에 태어난 차자를 장자의 위치에 올려놓는 축복을 한 것은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는 언약의 속성을 계시하기 위함이었다. 이스라엘이 아들이 된다는 것은 혈통적 순서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것을 위해 야곱은 므낫세와 에브라임의 자리를 바꾸라고 하지 않고 손을 어긋나게 해서 그 분명한 메시지를 드러내고자 한 것이다. 자기 힘으로 언약의 복을 쟁취하고자 했던 야곱이 평생을 통해 이러한 하나님의 언약을 깨닫게 된 것이다. 이제 야곱은 죽고 이스라엘로서 손자를 아들로 삼으면서 언약의 복을 전한다.

“15 그가 요셉을 위하여 축복하여 이르되 내 조부 아브라함과 아버지 이삭이 섬기던 하나님, 나의 출생으로부터 지금까지 나를 기르신 하나님, 16 나를 모든 환난에서 건지신 여호와의 사자께서 이 아이들에게 복을 주시오며 이들로 내 이름과 내 조상 아브라함과 이삭의 이름으로 칭하게 하시오며 이들이 세상에서 번식되게 하시기를 원하나이다”(15-16절). “요셉을 위하여 축복하여 이르되”(15절)라고 한 것은 이스라엘의 축복은 두 아들을 향한 것이지만 “이르되”라는 ‘아마르’의 목적은 요셉을 위해 주시는 말씀이라는 의미이다. 즉 말씀 안에서 아버지와 아들의 하나 됨을 강조하는 표현이다. 아버지와 아들의 하나 됨은 요셉을 애굽으로 보내신 것은 야곱을 환난 가운데서 속량하신 하나님께서 야곱 언약을 이루시기 위한 것으로 잘 드러난다. 다시 말해서 야곱을 악에서 속량하심과 같이 요셉을 고난 가운데 두셨던 것은 하나님 왕국의 원리로 보여 주시기 위해서라는 것이다.

애굽으로 팔려가 죽음을 경험한 자를 하나님께서 다스리는 자로 삼았다면 이스라엘의 모든 가족이 고난을 마다할 수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이 하나님 왕국의 다스리는 자가 되는 유일한 길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언약 안에 있는 하나님의 일하심의 원리이다. 이런 이유로 요셉은 이스라엘에서 한 지파가 아닌 두 지파를 가지게 되었다. 이 아들들 뒤에 태어날 자손들은 에브라임과 므낫세 지파로 계수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요셉이 장래 야곱 집의 머리가 되는 장자권을 상속 받은 것은 아니었다. 요셉이 언약 안에 있는 희생정신을 보여 준 것으로 인해 그는 두 지파가 되는 장자의 몫을 받았다. 그래서 이것이 요셉을 위한 축복이다.

“섬기던 하나님”(15절)이라고 번역하였는데 히브리어 ‘할라크’는 ‘가다, 오다, 걷다, 동행하다’라는 뜻이고, “기르신 하나님”이란 표현의 ‘라아’는 ‘풀을 뜯기다, 먹이다, 돌보다, 사귀다, 친구가 되다’라는 뜻으로 목자의 개념이 담겨 있다.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께서 야곱과 동행하셨고 또한 양육하셨다는 것이다. 진리를 전혀 알지 못했던 야곱에게 언약의 하나님께서 찾아오셔서 동행하셨고 말씀을 먹이시며 돌보셨음을 고백한 것이다.

“환난”의 ‘라’는 ‘나쁜, 악한, 악, 고난, 비참’이라는 뜻이고, “건지신”의 ‘가알’은 ‘속량하다, 구속하다’라는 뜻이다. “여호와의 사자”란 ‘말라크’로 ‘사자, 사신’이라는 뜻으로 단순히 메시지를 전하는 자를 보내셨다기보다 하나님께서 친히 말씀으로 찾아오셨다는 의미이다. 한마디로 언약의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찾아오셨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야곱을 악에서 속량하시고 이끌어 오셨다는 말이다.

 

주의 인자하심으로 주께서 구속하신(가알) 백성을 인도하시되 주의 힘으로 그들을 주의 거룩한 처소에 들어가게 하시나이다(출 15:13)

 

만일 네 형제가 가난하여 그의 기업 중에서 얼마를 팔았으면 그에게 가까운 기업 무를 자가 와서 그의 형제가 판 것을 무를 것이요(가알)(레 25:25)

 

야곱을 언약으로 이끄신 하나님께서 에브라임과 므낫세도 그렇게 구원하여 속량하시고 언약 안으로 인도하심으로 하나님께서 같은 이름으로 불리워질 것이라고 축복한 것이다. 그래서 “내 이름과 내 조상 아브라함과 이삭의 이름으로 칭하게 하시오며”(16절)라고 하였다. 그 언약을 마음에 품는 것이 복이다. 이렇게 하여 하나님의 아들들이 되는 것이다. 신약에서 그리스도인, 하나님의 사람이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안에서 죽음으로 그리스도가 되는 것, 하나님과 연합하여 하나님이 된 자들이다(참고 행 11:26). 이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되는 것이다.

 

16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17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하게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할 능력을 갖추게 하려 함이라(딤후 3:16-17)

 

“이들이 세상에서 번식되게 하시기를 원하나이다”(16절)라는 표현에서 “번식되게”의 ‘다가’는 ‘다그’(물고기)에서 유래한 단어로 ‘빨리 움직이다, 증거하다, 번식하다, 알을 낳다, 수가 많아지다’라는 뜻으로 물고기가 물속에서 번식한다는 이미지를 담고 있다. 즉 진리의 말씀으로 충만하게 되는 상태를 표현한 것으로 이 말씀 역시 창세기 1:28에서 말씀한 창조 언약이 성취되는 것이라는 의미이다.

“17 요셉이 그 아버지가 오른손을 에브라임의 머리에 얹은 것을 보고 기뻐하지 아니하여 아버지의 손을 들어 에브라임의 머리에서 므낫세의 머리로 옮기고자 하여 18 그의 아버지에게 이르되 아버지여 그리 마옵소서 이는 장자이니 오른손을 그의 머리에 얹으소서 하였으나 19 그의 아버지가 허락하지 아니하며 이르되 나도 안다 내 아들아 나도 안다 그도 한 족속이 되며 그도 크게 되려니와 그의 아우가 그보다 큰 자가 되고 그의 자손이 여러 민족을 이루리라 하고 20 그 날에 그들에게 축복하여 이르되 이스라엘이 너로 말미암아 축복하기를 하나님이 네게 에브라임 같고 므낫세 같게 하시리라 하며 에브라임을 므낫세보다 앞세웠더라”(17-20절).

머리에 손을 얹는다는 것은 하나님의 언약이 전달된다는 의미이다. 오늘날은 머리에 손을 얹는 것으로 되는 것이 아니다. 언약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온전히 성취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십자가에서 그의 영으로 넘겨주신 그 영, 곧 성령에 의해 진리 가운데 인도함을 받아 십자가로 이루신 언약 안에 참여되는 것이다.

요셉이 알고 있는 장자는 먼저 태어난 자이다. 그러기에 이스라엘의 오른손이 에브라임의 머리에 얹는 것을 보고 좋을 리가 없다. 그래서 아버지의 손을 바꿔 놓으려고 하였으나 이스라엘은 “나도 안다 내 아들아 나도 안다”(19절)라고 말한다. ‘야다’를 두 번 반복하였다. 문자적으로는 에브라임도 알고 므낫세도 안다는 것이다. 그러나 언약의 관점에서 말하자면 오른손 왼손 관계없이 에브라임이나 므낫세와 언약 안에서 하나 된다는 의미를 나타낸 것이다. 그러나 장자는 이스라엘의 오른손에 있는 에브라임이고 차자는 왼손에 있는 므낫세로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는 야곱 언약을 전하고 있다. 그래서 “그도 한 족속이 되며 그도 크게 되려니와 그의 아우가 그보다 큰 자가 되고 그의 자손이 여러 민족을 이루리라”(19절)라고 선언한 것이다.

야곱에게 주어진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긴다는 것은 하나님의 선택과 일하심이 사람들의 생각과는 차원이 다른 것이다(사 55:9). 하나님의 언약은 큰 자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어린 자, 작은 자에게 있다. 그러기에 예수님은 큰 자이셨으나 이 땅에 작은 자로 오셨다. 이는 세상의 모든 사람이 자신을 큰 자로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진짜 큰 자이신 분이 작은 자로 오셔서 큰 자라고 하는 자들을 섬기신 역설이 복음 안에 담겨 있다. 그것을 보여 주는 것이 이스라엘이 손을 어긋맞게 한 축복이다.

이런 점에서 10절에서 “이스라엘의 눈이 나이로 말미암아 어두워서 보지 못하더라”라는 말씀이 이삭의 경우와 같이 영적으로 어두운 상태로 볼 수 없다는 것이다. 오히려 세상의 눈이 나이로 인해 어두워졌기에 보이지 않는 진리의 말씀을 분명히 보고 그 언약을 드러내고자 한 상태라는 의미이다. 그래서 그 언약을 “에브라임을 므낫세보다 앞세웠더라”(20절)라고 말씀한다. 이런 점에서 1절에서 “므낫세와 에브라임”이라고 하였으나 이스라엘이 두 아들은 내 것이라는 표현에서는 “에브라임과 므낫세”(5절)라고 언급하였다.

“21 이스라엘이 요셉에게 또 이르되 나는 죽으나 하나님이 너희와 함께 계시사 너희를 인도하여 너희 조상의 땅으로 돌아가게 하시려니와 22 내가 네게 네 형제보다 세겜 땅을 더 주었나니 이는 내가 내 칼과 활로 아모리 족속의 손에서 빼앗은 것이니라”(21-22절). 요셉을 통해 드러난 희생, 그것은 야곱이 죽고 이스라엘로 살아난 희생이다. 그 희생으로 제사장 나라가 되어 약속의 땅에 올라가게 될 것이다.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것은 희생의 모습으로 나타나는 것이기 때문이다. 야곱의 정신으로는 결코 약속의 땅을 차지할 수 없다. 단순히 이스라엘이라서가 아니라 희생정신이 담긴 자가 언약의 땅을 차지 한다. 아니 그 땅은 이미 주어졌다. 그래서 “내가 네게 네 형제보다 세겜 땅을 더 주었나니”(22절)라고 완료형으로 표현하였다.

“칼”이란 말씀을 상징하고 “활”이란 ‘케셰트’로 언약을 가리킨다. “아모리 족속”은 율법적 행위에 갇힌 가나안 땅의 족속을 대표한다. 과거에 빼앗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자기 언약에 근거하여 이미 이루신 말씀이라는 의미이다. 교회 역시 이미 완료형으로 주신 하나님 왕국은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날마다 죽는 죽음으로 누리는 것이다(20250615 강론/주성교회 김영대 목사).

 

 

 

창124.4812-22 이스라엘의 새 아들(2)(20250615).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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