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구약강론/창세기

114. 창세기 43:16-34 요셉과 형들의 만남(5)

불편한 진리 2025. 5. 4. 14: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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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 강론 114

창세기 43:16-34

요셉과 형들의 만남(5)

 

베냐민을 데려옴으로 밭에서 곡식 단이 요셉의 단에 절을 하는 꿈(창 37:7)은 이루어진다고 볼 수 있지만 해와 달과 열한 별이 요셉에게 절하는 꿈(창 37:9)은 아직 성취되지 않았다. 꿈으로 계시된 말씀이 성취되기까지 형제들에 대한 요셉의 시험은 계속된다. 단지 그들을 곤란하게 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각기 율법적 행위로 자기 의를 드러내는 열두 아들을 하나님의 아들들로 만드는 것이 언약이다. 언약을 이루는 과정에서 형제들의 죄가 폭로되어야 한다. 그래야만 하나님께서 자기 언약으로 이루신다는 것이 명확하게 드러나기 때문이다.

“요셉은 베냐민이 그들과 함께 있음을 보고 자기의 청지기에게 이르되 이 사람들을 집으로 인도해 들이고 짐승을 잡고 준비하라 이 사람들이 정오에 나와 함께 먹을 것이니라”(16절). “청지기”라고 번역하였는데 직역하면 ‘그의 집 위에 있는 자’라는 말로 집 위에 있어서 집을 아래로 내려볼 수 있는 자로서 주인을 대신하여 사람들을 집으로 인도해 짐승을 잡고 확정하는 존재라는 뜻이다. 요셉의 집이라는 성전에 형제들을 말씀으로 인도하여 짐승을 잡아 희생제물에 대해 가르쳐 말씀으로 섬기는 역할을 한다(참고 마 13:52). “사람들”이란 ‘에노쉬’로 ‘(죽을 수밖에 없는) 인간, 인류’라는 뜻이고, “정오”의 ‘초하르’는 ‘빛, 한낮, 창문’이라는 뜻인데 가장 빛이 왕성하고 뜨거운 때를 어두움, 곧 악의 세력을 물리친 하나님의 공의와 생명, 복의 상태를 상징한다(욥 11:17, 사 59:9-10).

 

네 의를 빛 같이 나타내시며 네 공의를 정오의 빛 같이 하시리로다(초하르)(시 37:6)

 

그렇게 율법의 빛을 따르는 형제들은 요셉에 의해 언약의 하나님 안에 동참되었다. 예수님 당시에도 유대인들은 스스로 빛의 존재인 줄 알았으나 모두 어두움이었다는 것을 폭로하시고 자신의 십자가 죽음이라는 새 언약에 참여하게 만드셨다(요 12:36, 살전 5:5).

“17 청지기가 요셉의 명대로 하여 그 사람들을 요셉의 집으로 인도하니 18 그 사람들이 요셉의 집으로 인도되매 두려워하여 이르되 전번에 우리 자루에 들어 있던 돈의 일로 우리가 끌려드는도다 이는 우리를 억류하고 달려들어 우리를 잡아 노예로 삼고 우리의 나귀를 빼앗으려 함이로다 하고”(17-18절). 요셉의 명령대로 형제들이 성전에 인도되지만 두려워한다. 아버지 야곱 아래서 성전 중심의 율법적인 종교 생활이었기 때문이다. 먼저 죄의 권세 아래 가두고 거기서 건져내시는 구원(롬 11:32, 갈 3:23)이기에 ‘하나님의 의’ 앞에 ‘자기 의’라는 죄가 폭로되면 두려워할 수밖에 없다. 하나님께서 자기 구원을 드러내시는 방식이다. 그래서 요셉은 형제들의 자루에 돈을 다시 넣어 양식을 훔쳐간 죄인들로 만든 것이다. 우리 역시 처음에는 신에 대한 두려움으로 문자의 율법에 복종하는 종교 생활을 한다. 그러나 복음을 은혜로 알게 되면 단순한 두려움이 아닌 하나님에 대한 경외심으로 믿음을 좇게 된다. “우리를 억류하고 달려들어 우리를 잡아 노예로 삼고 우리의 나귀를 빼앗으려 함이로다”라는 형제들의 말대로 사실은 우리의 모든 것을 빼앗기고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 되는 것이 구원이다.

“19 그들이 요셉의 집 청지기에게 가까이 나아가 그 집 문 앞에서 그에게 말하여 20 이르되 내 주여 우리가 전번에 내려와서 양식을 사가지고 21 여관에 이르러 자루를 풀어본즉 각 사람의 돈이 전액 그대로 자루 아귀에 있기로 우리가 도로 가져왔고 22 양식 살 다른 돈도 우리가 가지고 내려왔나이다 우리의 돈을 우리 자루에 넣은 자는 누구인지 우리가 알지 못하나이다”(19-22절). 형제들은 사실을 말하고는 있지만 그것은 자기 변명에 불과하다. 왜냐하면 돈을 발견한 즉시 다시 돌려주러 오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애굽에서 얻은 양식이 떨어지기 전에 가나안 땅에 기근이 해결되어 양식을 얻을 수 있었다면 다시 애굽에 내려 올 생각을 하였겠는가? 요셉을 죽음에 넘긴 것처럼 시므온도 그렇게 생각하고 말았을는지도 모른다. 결과적으로는 도둑질한 것이 되었다. 육신이 약하여 죄를 범할 수밖에 없었다는 자기 합리화하는 이것이 죄인의 습성이고 우리의 모습이다.

“양식 살 다른 돈도 우리가 가지고 내려왔나이다”라고 말함으로 회개하는 것 같지만 사실은 여전히 양식을 돈으로 사려는 자기 의를 드러내고 있다. 다시 말해서 형제들은 아직도 자신들의 마음과 의지로 선을 행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죄란 우리의 의지와 상관없이 죄의 권세에 매여 있기에 나오는 것이라고 선언하였다(롬 7:20-21).

“23 그가 이르되 너희는 안심하라 두려워하지 말라 너희 하나님, 너희 아버지의 하나님이 재물을 너희 자루에 넣어 너희에게 주신 것이니라 너희 돈은 내가 이미 받았느니라 하고 시므온을 그들에게로 이끌어내고 24 그들을 요셉의 집으로 인도하고 물을 주어 발을 씻게 하며 그들의 나귀에게 먹이를 주더라”(23-24절). “그”는 요셉의 명을 따라 형제들을 인도하는 청지기이다. 요셉의 말을 받아 전하는 자로서 복음을 확정하고 알려주는 존재로서 말하는 것이니 곧 요셉의 말이다. “재물”의 ‘마트몬’은 ‘감춘 것, 숨겨진 보물, 귀중품’이라는 뜻이며, “너희에게 주신 것이니라”의 ‘나탄’은 하나님께서 정하고 세우셨다는 뜻이다. 형제들의 자루에 있는 돈, ‘케세프’는 하나님께서 주신 보물로 대속의 은혜로 정하셨다는 것이다. “너희 돈은 내가 이미 받았느니라”라는 표현은 진리의 말씀은 값없이 얻는 것임을 보여준다.

 

23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24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 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롬 3:23-24)

 

“시므온을 그들에게로 이끌어내고”라고 옥에서 나왔다는 것을 형제들이 진리의 말씀을 들었음을 표현한 것이다. “요셉의 집으로 인도하고”라는 말씀은 하나님께서 요셉에게 주신 그 말씀으로 인도하여 언약에 참여하게 만드셨다는 뜻이다. “물을 주어 발을 씻게 하며 그들의 나귀에게 먹이를 주더라”라는 말씀은 정탐꾼으로 하나님 왕국과 다른 나라에 살던 자들을 진리의 말씀으로 씻어 주시는 언약을 하나님께서 이루신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나귀”는 율법의 짐을 지고 있는 형제들의 상태를 보여준다. 즉 나귀에게 먹이를 주는 것은 율법의 짐을 지고 있는 죄인들을 진리의 말씀으로 언약 안에 참여하게 만드시는 은혜 베푸심을 발을 씻는 것과 함께 반복하여 강조한 것이다.

“25 그들이 거기서 음식을 먹겠다 함을 들었으므로 예물을 정돈하고 요셉이 정오에 오기를 기다리더니 26 요셉이 집으로 오매 그들이 집으로 들어가서 예물을 그에게 드리고 땅에 엎드려 절하니 27 요셉이 그들의 안부를 물으며 이르되 너희 아버지 너희가 말하던 그 노인이 안녕하시냐 아직도 생존해 계시느냐 28 그들이 대답하되 주의 종 우리 아버지가 평안하고 지금까지 생존하였나이다 하고 머리 숙여 절하더라”(25-28절). “예물”의 ‘민하’는 ‘희생제물’이라는 뜻이고, “정돈하고”의 ‘쿤’은 ‘확립하다, 확고하다, 준비하다, 고정되다’라는 뜻이다. “요셉이 정오에 오기를 기다리더니”라는 표현은 형제들이 가나안 땅의 아름다운 소산으로 준비한 희생제물(11절)을 확립하여 율법적 제사를 통해 하늘의 의, 생명을 얻겠다는 의미이다. “예물을 그에게 드리고 땅에 엎드려 절하니”라는 말씀에서 그 의미가 더 분명하게 드러나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요셉의 집에서 용납될 수 없는 것이다.

오히려 요셉이 묻는 것은 “너희 아버지 너희가 말하던 그 노인이 안녕하시냐 아직도 생존해 계시느냐”라는 것이다. “노인”이라는 말의 ‘자켄’은 ‘늙은, 오래된, 옛날(사람)’이라는 뜻이다. “안녕하시냐”(히, ‘샬롬’)라는 물음은 진리의 말씀에 이른 존재로 평안의 상태에 있는가를 묻는 것이다. 아버지가 평안하다는 형제들의 답변은 사실 거짓말이다. 야곱은 베냐민을 죽음에 내어준 심정이므로 결코 평안한 상태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요셉과 베냐민을 다시 만나면 평안은 이루어진다. 그러기에 “주의 종”이라고 표현한 것을 통해 하나님을 주인으로 모시고 있는 종의 상태이며, “머리 숙여 절하더라”라는 말씀에서 하나님께서 요셉에게 꿈으로 계시를 주신 그 말씀이 성취되고 있음을 나타낸다.

“29 요셉이 눈을 들어 자기 어머니의 아들 자기 동생 베냐민을 보고 이르되 너희가 내게 말하던 너희 작은 동생이 이 아이냐 그가 또 이르되 소자여 하나님이 네게 은혜 베푸시기를 원하노라 30 요셉이 아우를 사랑하는 마음이 복받쳐 급히 울 곳을 찾아 안방으로 들어가서 울고 31 얼굴을 씻고 나와서 그 정을 억제하고 음식을 차리라 하매”(29-31절). “요셉이 눈을 들어 자기 어머니의 아들 자기 동생 베냐민을 보고”라는 말씀은 혈육의 관계에 있는 동생에게 “소자여 하나님이 네게 은혜 베푸시기를 원하노라”라고 함으로 육의 관계를 넘어 하나님의 언약 안에서 하나님의 아들로 하나 되는 것이 은혜로 이루어진다는 복음을 전하였다. “소자”라고 번역하였지만 ‘벤’, 즉 ‘아들’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언약이 이루어지는 방식은 오직 은혜이다. “얼굴을 씻고 나와서”라는 말씀은 요셉이 자신을 드러낼 때가 되었음을 암시한다. 겉으로만 보는 것이 아닌 본 얼굴을 드러내어 진리를 보여주어야 하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자신을 드러내시지 않으면 죄인들은 하나님을 알 수 없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신 것이다.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아버지 품 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셨느니라(요 1:18)

 

“그들이 요셉에게 따로 차리고 그 형제들에게 따로 차리고 그와 함께 먹는 애굽 사람에게도 따로 차리니 애굽 사람은 히브리 사람과 같이 먹으면 부정을 입음이었더라”(32절). 따로 차리고 애굽 사람과 히브리 사람이 구별되어 있다는 것은 요셉이 애굽의 주권자이지만 속 사람은 건너온 자, 즉 죽음을 거쳐 다시 산 자로서 진리를 드러내는 자로 구별되어 있다는 뜻이다. 그러나 애굽 사람의 입장에서는 그것을 부정한 것으로 여긴다. 진리를 알지 못하는 애굽 사람과 언약을 안다고 하는 형제들 그리고 언약의 성취함을 담아 놓은 요셉, 이 세 부류로 구별하여 삼 일 길, 곧 요셉 성전의 구조를 보여준다.

“33 그들이 요셉 앞에 앉되 그들의 나이에 따라 앉히게 되니 그들이 서로 이상히 여겼더라 34 요셉이 자기 음식을 그들에게 주되 베냐민에게는 다른 사람보다 다섯 배나 주매 그들이 마시며 요셉과 함께 즐거워하였더라”(33-34절). “나이에 따라”라는 말은 ‘베코르 베코라’로 ‘베코르’는 ‘처음 난 자, 초태생’이라는 뜻이고, ‘베코라’는 ‘베코르’의 여성형으로 ‘처음 낳은 것, 장자권’이라는 뜻이다. “앉히게 되니”라고 번역한 표현은 ‘차이르 체이라’인데 ‘차이르’는 ‘작은, 보잘 것 없는, 어린’이라는 뜻이고, ‘체이라’는 ‘차이르’의 여성형으로 ‘젊음, 젊은이’라는 뜻이다. 문자적으로는 나이순으로 앉혔다는 뜻이지만 남자와 여자를 처음 난 자와 어린 여자의 순서로 앉혔다는 말이다. 그 의미는 “그들이 서로 이상히 여겼더라”라는 표현에서 드러난다. “그들”이라는 ‘에노쉬’(남성 복수 : 죽을 수밖에 없는 사람들)는 스스로 남자로 여기고 있는 자들이다. 그러나 사실은 남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구원받아야 할 여자들을 포함한 존재라는 뜻이다. 이런 점에서 그들은 서로 이상하게 여길 수밖에 없었다.

“음식”의 ‘마스에트’는 ‘일어남, 들어 올림, 몫’이라는 뜻인데 ‘왕의 몫으로 음식’(삼하 11:8), ‘왕이나 윗사람으로부터 받는 선물, 하사품’(렘 40:5, 에 2:18), 또는 ‘신성한 봉헌물’(대하 24:6, 9)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앞에서 “음식”(25, 31절)을 ‘레헴’(음식, 식사, 빵, 떡)으로 표현하였으나 여기서 ‘마스에트’로 표현하였다는 것은 요셉이 왕으로서 베냐민에게 진리의 말씀을 선물로 주어 아들로 양육하고 있음을 나타낸 것이다. “다른 사람보다 다섯 배나 주매”라는 말씀은 보이는 율법, 즉 ‘다섯’을 진리의 말씀으로 주고 있다는 뜻이다. 야곱 아래에서 율법으로 존재하였던 베냐민이 진리의 아들 요셉과 하나 되어 형제들로 ‘열’이라는 완전함이 이루어진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래서 “그들이 마시며 요셉과 함께 즐거워하였더라”라는 말씀을 통해 언약의 식사에 참여된 하나님의 아들들로 나타낸다.

 

53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인자의 살을 먹지 아니하고 인자의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 속에 생명이 없느니라 54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영생을 가졌고 마지막 날에 내가 그를 다시 살리리니 55 내 살은 참된 양식이요 내 피는 참된 음료로다(요 6:53-55)

 

오늘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 되어 구원이 완성된다는 것은 율법의 행위로 자기 의를 자랑하는 ‘다섯’이라는 내가 진리의 말씀이신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 되어 ‘열’, 즉 진리로 완성되어 언약이 성취되는 것이 생명임을 말씀한 것이다(20250504 강론/주성교회 김영대 목사).

 

창114.4316-34 요셉과 형들의 만남(5)(20250504).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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