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구약강론/창세기

112. 창세기 42:26-38 요셉과 형들의 만남(3)

불편한 진리 2025. 4. 27. 14:50

 

https://www.youtube.com/live/KLbwwtrtZAM?si=bmu55TDLjgYyoKD3

 

 

창세기 강론 112

창세기 42:26-38

요셉과 형들의 만남(3)

 

형제들에 대한 요셉의 시험이 계속 이어진다. 형제들의 입장에서는 생존 문제만 해결되면 더 이상 바랄 것이 없었지만 요셉에게는 단순한 생존 문제가 아니라 진리의 양식을 나누어줌으로 하나님의 언약 안에 있는 희생정신을 알게 하는 일이 중요한 일이다. 그래서 그들의 죄를 폭로하여 요셉이 세상의 힘에 의해 버림당한 희생에 동참하는 것이 언약을 아는 것이다. 그럴 때 야곱의 가족이라는 차원을 넘어서 비로소 이스라엘이라는 언약 공동체의 모습이 제대로 드러나는 것이다.

“26 그들이 곡식을 나귀에 싣고 그곳을 떠났더니 27 한 사람이 여관에서 나귀에게 먹이를 주려고 자루를 풀고 본즉 그 돈이 자루 아귀에 있는지라”(26-27절). 25절에서 “곡물”은 ‘바르’로 표현하였고 여기서 “곡식”은 ‘오켈’이 아닌 ‘셰베르’를 쓰고 있다. 즉 형제들은 땅의 양식 ‘오켈’을 구하러 갔지만 요셉은 들판에 있는 양식 ‘바르’를 주었다고 하였는데 그것이 깨뜨려져 하늘의 양식으로 주어졌다는 의미에서 ‘셰베르’라고 하였다. “한 사람”이라는 것은 단지 형제 중의 한 사람이 아니라 형제 모두를 대표하는 표현이다. 왜냐하면 형제들은 요셉이 나누어주는 진리의 말씀을 따라 베냐민을 데리고 와서 시므온이 놓임을 받게 해야 한다는 측면에서 하나의 말을 하고 같은 생각을 하는 자들이 되었기 때문이다.

“여관”이라고 번역한 ‘말론’은 오늘날처럼 시설을 갖춘 여관이 아니라 ‘야영지, 상인들의 숙사, 숙박하는 곳’이라는 뜻이다(출 4:24). “돈”의 ‘케세프’는 ‘속죄의 값, 속전, 돈’이라는 뜻이다. 곡식값으로 지불한 돈을 요셉이 다시 자루에 넣어 보내었다(25절). 형제들의 입장에서는 양식값을 지불한 자기들의 의를 상징하나 요셉의 입장에서는 진리에 대한 속죄의 값이 필요 없으므로 돌려준 것이다.

 

1 오호라 너희 모든 목마른 자들아 물로 나아오라 돈 없는 자도 오라 너희는 와서 사 먹되 돈 없이, 값 없이 와서 포도주와 젖을 사라 2 너희가 어찌하여 양식이 아닌 것을 위하여 은을 달아 주며 배부르게 하지 못할 것을 위하여 수고하느냐 내게 듣고 들을지어다 그리하면 너희가 좋은 것을 먹을 것이며 너희 자신들이 기름진 것으로 즐거움을 얻으리라 3 너희는 귀를 기울이고 내게로 나아와 들으라 그리하면 너희의 영혼이 살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영원한 언약을 맺으리니 곧 다윗에게 허락한 확실한 은혜이니라(사 55:1-3)

 

“아귀”의 ‘페’는 ‘입’이라는 뜻이다. 잠을 자는 곳에서 자루의 입을 보았다는 것은 시므온과 베냐민을 구하는 하나의 말을 하는 줄 알았는데 돈, 곧 생존을 위한 행위로 자신들의 입에는 여전히 육신의 가치관들이 있는 어둠의 상태를 암시한다. 진리의 양식을 받았다고 하나 진리의 말을 하지 못하는 상태라는 것이다. 진리의 말씀이 주어져도 입에서는 육의 말을 쏟아내는 것이 죄인의 본성이다.

 

8 혀는 능히 길들일 사람이 없나니 쉬지 아니하는 악이요 죽이는 독이 가득한 것이라 9 이것으로 우리가 주 아버지를 찬송하고 또 이것으로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은 사람을 저주하나니 10 한 입에서 찬송과 저주가 나오는도다 내 형제들아 이것이 마땅하지 아니하니라(약 3:8-10)

 

“그가 그 형제에게 말하되 내 돈을 도로 넣었도다 보라 자루 속에 있도다 이에 그들이 혼이 나서 떨며 서로 돌아보며 말하되 하나님이 어찌하여 이런 일을 우리에게 행하셨는가 하고”(28절). “도로 넣었도다”의 ‘슈브’는 ‘되돌아오다(가다), 회복하다’라는 뜻이고, “혼”의 ‘레브’는 ‘마음, 중심, 정신, 의지’라는 뜻이며, “나서”의 ‘야차’는 ‘나가다, 떠나다, 보내다’라는 뜻이고, “떨며”의 ‘하라드’는 ‘떨다, 진동하다, 두려워하다, 놀라다’라는 뜻이다. 우리의 마음, 육적인 행위가 이중적이라는 것을 직시하면 하나님께 대한 경외함이 나올 수밖에 없다.

 

22 내 속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23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으로 나를 사로잡는 것을 보는도다 24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롬 7:22-24)

 

“하나님이 어찌하여 이런 일을 우리에게 행하셨는가”라는 고백은 왜 나오게 되었는가? 형제들은 감옥에서 나왔으며 곡식도 얻어 집으로 돌아감으로 목적을 달성하였다. 하지만 시므온은 볼모로 감옥에 갇혀 있고 자루에 돈도 들어 있었다. 원하는 것을 얻었으나 새롭게 해결해야 할 문제들이 다시 발생한다. 이런 일련의 일을 마주하면서 깨닫는 것은 단순히 요셉에 의해 일어나는 일이 아니라 하나님의 일하심이라는 것을 어렴풋이 알게 되었다는 의미이다.

“29 그들이 가나안 땅에 돌아와 그들의 아버지 야곱에게 이르러 그들이 당한 일을 자세히 알리어 아뢰되 30 그 땅의 주인인 그 사람이 엄하게 우리에게 말씀하고 우리를 그 땅에 대한 정탐꾼으로 여기기로 31 우리가 그에게 이르되 우리는 확실한 자들이요 정탐꾼이 아니니이다 32 우리는 한 아버지의 아들 열두 형제로서 하나는 없어지고 막내는 오늘 우리 아버지와 함께 가나안 땅에 있나이다 하였더니”(29-32절). 야곱의 아들들은 그간에 있었던 일을 소상하게 전한다. 독자의 입장에서는 앞에 있었던 사건들을 이미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성경은 반복하여 언급한다. 마치 아브라함의 늙은 종이 이삭의 아내로 리브가를 구하러 갔을 때처럼 말이다. 이렇게 반복함으로 확실하게 하나님께서 일하셨음을 강조한다.

하나님의 일하심이란 곧 복음을 말하는 것이다. 정탐꾼으로 여겼다는 것은 땅의 나라에 속한 자가 하늘의 생명을 정탐하는 것이고, 정탐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형제들은 베냐민을 데리고 다시 애굽으로 가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언약을 성취하는 아들 요셉을 중심으로 온전히 하나 됨으로 이스라엘로 드러나야 한다. 아들들이 아버지 야곱에게 자세히 말한다는 것은 진리를 전하고 있다는 뜻이다. 그러나 야곱 역시 요셉의 살아 있음을 알지 못하기에 진리로 인정할 수 없다는 죄성을 드러낸다. 죽음은 인정하지만 부활, 생명을 믿지 못하는 한계 안에 갇혀 있음이 인간의 죄성이다.

“그 땅의 주인인 그 사람이 우리에게 이르되 내가 이같이 하여 너희가 확실한 자들임을 알리니 너희 형제 중의 하나를 내게 두고 양식을 가지고 가서 너희 집안의 굶주림을 구하고”(33절). “그 땅의 주인”이란 ‘아돈’으로 ‘주, 주님, 주인, 소유주’라는 뜻이고 “그 사람”은 ‘그 남자’라는 말이다. 곧 언약의 성취를 위한 아들 요셉을 지칭한다. 요셉은 그 땅의 주인으로서 진리의 양식을 나누어 주는 존재이다. 이런 점에서 요셉은 자기 땅에 오셔서 십자가 죽음으로 언약을 성취하실 예수 그리스도를 계시한다.

 

10 그가 세상에 계셨으며 세상은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되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였고 11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하지 아니하였으나 12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요 1:10-12)

 

“너희 막내 아우를 내게로 데려 오라 그러면 너희가 정탐꾼이 아니요 확실한 자들임을 내가 알고 너희 형제를 너희에게 돌리리니 너희가 이 나라에서 무역하리라 하더이다 하고”(34절). “너희 형제를 너희에게 돌리리니”라는 표현에서 “돌리리니”의 ‘나탄’은 41:41과 43절에서 우리 성경에 “총리”라고 번역한 단어로 ‘주다, 놓다, 세우다, 지정하다’라는 뜻이다. 요셉이 한 말은 “너희 막내 아우를 내게로 데리고 오라 그러면 너희 말이 진실함이 되고 너희가 죽지 아니하리라”(창 42:20)라는 것이다. 그런데 아들들은 요셉이 한 말과 다르게 아버지에게 말하였다. 이는 시므온이 갇힌 것을 말하지 않은 것과 함께 아버지 야곱을 안심시키기 위한 단순한 말이 아니다. 베냐민을 데려감으로 시므온을 얻어 ‘열’이라는 완전함으로 세워지는 것을 요셉과 베냐민이라는 두 증인으로 증거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요셉을 지정하고 세우셨듯이 형제들을 그렇게 언약의 완전함 안에 세우신다는 것을 나타내고 있다.

그래서 “너희가 이 나라에서 무역하리라 하더이다”라고 요셉이 하지 않은 말을 덧붙인다. 이런 일련의 표현들은 형제들이 임의로 덧붙이는 것이 아니라 요셉이 전한 말의 진의를 알아들었다는 뜻이다. “무역하리라”의 ‘사하르’는 ‘돌아다니다, 두루 다니다, 무역에 종사하다’라는 뜻으로 “이 나라에서 무역하리라”의 말을 직역하면 ‘이 땅에서 두루 돌아다니리라’라는 말이다. 베냐민이 애굽으로 가서 요셉을 만나게 되면 형제들은 온전한 진리를 알게 됨으로 하나님의 아들들로 드러나게 된다. 그렇게 되면 애굽 온 땅에 두루 돌아다님으로 진리가 충만하게 되는 것이다. 곧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이 땅에 진리가 충만하게 드러날 것에 대한 언약의 말씀이다.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하나님이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창 1:28)

 

“각기 자루를 쏟고 본즉 각 사람의 돈뭉치가 그 자루 속에 있는지라 그들과 그들의 아버지가 돈뭉치를 보고 다 두려워하더니”(35절). “돈뭉치”라는 말은 ‘케세프’가 ‘체로르’가 되었다는 의미로 쓰고 있다. ‘체로르’는 ‘차르’(조약돌)에서 유래한 단어로 ‘묶음, 꾸러미, 낟알, 작은 돌’이라는 뜻으로 각각의 낱개가 묶음을 이룬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그들과 그들의 아버지가 돈뭉치를 보고 다 두려워하더니”라는 말씀을 보면 돈뭉치를 보고 단순히 돈에 놀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일하심에 대한 놀라움, 경외함, 즉 ‘케세프’가 ‘체로르’가 되어 아버지와 아들들 각자의 마음에 생겨 하나의 묶음이 되었다는 의미이다.

“그들의 아버지 야곱이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가 나에게 내 자식들을 잃게 하도다 요셉도 없어졌고 시므온도 없어졌거늘 베냐민을 또 빼앗아 가고자 하니 이는 다 나를 해롭게 함이로다”(36절). “나를 해롭게 함이로다”라고 하였는데 히브리어 ‘알’은 ‘~위에, ~을 넘어서, ~보다 더’라는 뜻이다. 즉 아들을 빼앗기는 일을 통해 ‘나를 넘어서는 일’이 일어났다는 의미이다. 아들을 잃는 야곱의 비통함을 표현한 것으로 보이나 언약의 관점에서는 ‘야곱의 아들’을 잃음을 넘어서서 ‘이스라엘의 아들’을 얻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야곱으로서 육적 아들을 내어주고 이스라엘로서 언약의 아들을 얻는다는 의미이다.

“37 르우벤이 그의 아버지에게 말하여 이르되 내가 그를 아버지께로 데리고 오지 아니하거든 내 두 아들을 죽이소서 그를 내 손에 맡기소서 내가 그를 아버지께로 데리고 돌아오리이다 38 야곱이 이르되 내 아들은 너희와 함께 내려가지 못하리니 그의 형은 죽고 그만 남았음이라 만일 너희가 가는 길에서 재난이 그에게 미치면 너희가 내 흰 머리를 슬퍼하며 스올로 내려가게 함이 되리라”(37-38절). 비록 육의 장자이지만 르우벤이 나서서 베냐민을 다시 돌아오게 하지 못하면 “내 두 아들을 죽이소서”라고 담보물을 제시하는데 사실 르우벤에게는 네 아들이 있었다.

 

8 애굽으로 내려간 이스라엘 가족의 이름은 이러하니라 야곱과 그의 아들들 곧 야곱의 맏아들 르우벤과 9 르우벤의 아들 하녹과 발루와 헤스론과 갈미요(창 46:8-9)

 

“하녹”(히, ‘하노크’)은 ‘봉헌된, 바쳐진, 전수자’라는 뜻으로 우리 성경에서 “에녹”(창 4:17-18, 5:18-19)과 같은 이름인데 다르게 번역하였다. “발루”(히, ‘팔루’)는 ‘구별된’이라는 뜻이고, ‘헤스론’(히, ‘헤츠론’)은 ‘담으로 둘러싸인, 마을, 뜰’이라는 뜻이고, “갈미”(히, ‘카르미’)는 ‘포도원’이라는 뜻이다. 이름에서 보여주듯이 두 아들은 구별되어 바쳐진 존재로 죽음에 내어놓음으로 큰 자에 대한 관심이 아니라 남은 두 아들, 즉 작은 자에 대한 관심을 아버지에게 표현함으로 야곱 언약을 인정하고 받아들였음을 의미한다.

야곱은 베냐민에 대하여 “내 아들”(38절)이라고 표현하면서 “너희와 함께 내려가지 못하리니”라고 선언한다. 그리고 “너희가 내 흰 머리를 슬퍼하며 스올로 내려가게 함이 되리라”라고 말한다. “흰 머리”의 ‘세바’는 ‘백발, 노령’이라는 뜻이고, “스올”의 ‘셰올’은 ‘죽은 자의 거처, 음부’라는 뜻이다. 즉 ‘세바’가 ‘셰올’이 될 것이라는 언어유희로 야곱은 늙음 자체가 죽음이라고 말한 것이다. 그러나 단순한 육신의 죽음이 아니라 베냐민을 내어줌으로 진짜 죽음 안에 들어가야 한다. 하나님 자기 언약이기에 자기 때에 이루실 것이다(20250427 강론/주성교회 김영대 목사).

 

창112.4226-38 요셉과 형들의 만남(3)(20250427).pdf
0.14MB