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디모데후서 4:16-22 은혜가 너희와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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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모데후서 강론 11
디모데후서 4:16-22
은혜가 너희와 함께
죽음을 앞둔 바울 사도의 마지막 서신에서 마무리하는 인사에 대한 본문이다. “내가 처음 변명할 때에 나와 함께 한 자가 하나도 없고 다 나를 버렸으나 그들에게 허물을 돌리지 않기를 원하노라”(16절). “변명”이라고 번역한 ‘아폴로기아’는 ‘아포’(~에서, ~로부터)와 ‘로고스’(말씀)의 합성어로 된 단어에서 유래하였는데 ‘변호, 변명’의 뜻이지만 ‘말씀으로부터’라는 의미가 담겨 있다. 이런 점에서 ‘호 로고스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선포한다는 뜻이다. 우리 성경에서 이 단어가 사용된 본문을 “변명”(행 22:1, 고전 9:3, 빌 1:7), “변증”(고후 7:11), “대답할 것”(벧전 3:15)이라고 번역하였는데 전부 말씀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선포하고 전한다는 의미이다.
이전에 문자적인 율법을 좇았던 바울은 바리새인으로서 스데반을 죽이는 일에 주도적인 역할을 하였고 다메섹으로 가서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들을 예루살렘으로 잡아 오려고 가다가 계시를 받았다(행 9:1-19). 그리고 아라비아로 가서 3년을 지낸 후 다메섹으로 돌아왔다고 하였는데(갈 1:17) 아마도 율법을 복음으로 다시 정리하는 기회로 삼았던 것 같다. 다메섹으로 돌아와 복음을 전하자 사람들이 바울을 죽이려고 하였다. 처음 복음을 전하였을 때 상황을 사도행전에 보면 이렇게 기록한다.
19b 사울이 다메섹에 있는 제자들과 함께 며칠 있을새 20 즉시로 각 회당에서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전파하니 21 듣는 사람이 다 놀라 말하되 이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이 이름을 부르는 사람을 멸하려던 자가 아니냐 여기 온 것도 그들을 결박하여 대제사장들에게 끌어 가고자 함이 아니냐 하더라 22 사울은 힘을 더 얻어 예수를 그리스도라 증언하여 다메섹에 사는 유대인들을 당혹하게 하니라 23 여러 날이 지나매 유대인들이 사울 죽이기를 공모하더니 24 그 계교가 사울에게 알려지니라 그들이 그를 죽이려고 밤낮으로 성문까지 지키거늘 25 그의 제자들이 밤에 사울을 광주리에 담아 성벽에서 달아 내리니라(행 9:19b-25)
바울 사도는 율법을 자기 행위로 좇다가 복음을 알게 되어 예수를 그리스도라고 전하니 오히려 죽음의 위협에 놓였었다. 그래서 “나와 함께 한 자가 하나도 없고 다 나를 버렸으나”라고 고백하였다. 그런데 여기서 “나를 버렸으나”라는 표현의 헬라어 ‘엥카탈레이포’는 ‘포기하다, 버리다, 뒤에 남겨두다’라는 뜻인데 ‘엔’(~안에)과 ‘카탈레이포’(두고가다, 뒤에 남기다)의 합성어로 ‘~안에 남겨 놓았다’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제구시쯤에 예수께서 크게 소리 질러 이르시되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시니 이는 곧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엥카탈레이포) 하는 뜻이라(마 27:46)
27 또 이사야가 이스라엘에 관하여 외치되 이스라엘 자손들의 수가 비록 바다의 모래 같을지라도 남은 자만 구원을 받으리니 28 주께서 땅 위에서 그 말씀을 이루고 속히 시행하시리라 하셨느니라 29 또한 이사야가 미리 말한 바 만일 만군의 주께서 우리에게 씨를 남겨 두지(엥카탈레이포) 아니하셨더라면 우리가 소돔과 같이 되고 고모라와 같았으리로다 함과 같으니라(롬 9:29)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외친 말씀은 단순히 하나님 아버지께서 자신을 버리셨다는 의미라기보다 죽음 안에 남겨 놓으셨다는 의미로 표현하신 것이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로마서에서 이사야 선지자의 선포를 인용하여 이스라엘의 수가 많을지라도 남은 자만 구원하시기 위하여 언약의 씨를 하나님께서 남겨 놓으셨기에 말씀이 온전히 성취될 수 있었다고 전하였다.
그러므로 사람들이 복음을 거부하여 바울을 버렸고 마지막 인사에서 자신을 배신하였다는 식의 언급으로 단순하게만 생각할 문제가 아니라 오히려 그것이 하나님께서 자신을 예수 그리스도 안에 남겨두셨다는 의미로 나타내는 것이다. 그래서 “그들에게 허물을 돌리지 않기를 원하노라”라고 하였는데 “돌리지 않기를 원하노라”의 ‘로기조마이’는 ‘계산하다, 생각하다, 간주하다, 판단하다, 심사숙고하다’라는 뜻인데 수동태로 사용되었다. ‘로고스’에서 온 단어로 성경에서 사용될 때는 말씀에 의한 판단으로 깊이 생각한다는 뜻이다(참고 롬 3:28, 6:11, 8:18, 고전 4:1, 고후 10:7 등). 복음을 거부하고 간 자들에게 허물을 돌리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 아니라 말씀에 의해 판단되니 그들에 대해 생각할 필요가 없게 되었다는 의미이다(빌 1:12-18).
“17 주께서 내 곁에 서서 나에게 힘을 주심은 나로 말미암아 선포된 말씀이 온전히 전파되어 모든 이방인이 듣게 하려 하심이니 내가 사자의 입에서 건짐을 받았느니라 18 주께서 나를 모든 악한 일에서 건져내시고 또 그의 천국에 들어가도록 구원하시리니 그에게 영광이 세세무궁토록 있을지어다 아멘”(17-18절). 이 말씀은 마치 주님이 나의 수호신이 되어 내 곁에서 늘 힘을 주고 강한 자로 만들어서 복음을 전파하게 하셨다는 것이 아니다. “곁에 서서”라는 말의 ‘파리스테미’는 ‘파라’(곁에)와 ‘히스테미’(세우다)의 합성어로 따로따로 두 존재로 서 있다는 말이 아니라 하나로 결속되고 연합되었다는 뜻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찾아오셔서 그 강함 안에 하나 되게 하셨기에 “선포된 말씀이 온전히 전파” 될 수밖에 없었다는 의미이다. 다시 말해서 바울이 복음을 선포하고 드러내는 일에 절망하거나 좌절하지 않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와 한몸이 되어 자기 말씀을 온전히 전파하고 드러내심으로 “이방인이 듣게 하려 하심”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바울은 하나님의 은혜가 한 것이라고 고백하였다.
7 이 복음을 위하여 그의 능력이 역사하시는 대로 내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을 따라 내가 일꾼이 되었노라 8 모든 성도 중에 지극히 작은 자보다 더 작은 나에게 이 은혜를 주신 것은 측량할 수 없는 그리스도의 풍성함을 이방인에게 전하게 하시고 9 영원부터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 속에 감추어졌던 비밀의 경륜이 어떠한 것을 드러내게 하려 하심이라(엡 3:7-9)
“사자”의 ‘레온’은 성경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왕권을 상징하기도 하지만(계 5:5) 말씀을 대적하는 마귀를 상징하기도 한다(히 11:33).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벧전 5:8)
이런 점에서 “사자의 입에서 건짐을 받았느니라”라는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의 대적자에서 구원을 의미한다. 그래서 이어 “주께서 나를 모든 악한 일에서 건져내시고 또 그의 천국에 들어가도록 구원하시리니”(18절)라고 선언하였다. 사자의 입에서 건짐을 받은 것이 악한 일에서 건져내신 것이고 곧 그의 왕국에 들어가게 하신 구원이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15 내가 비옵는 것은 그들을 세상에서 데려가시기를 위함이 아니요 다만 악에 빠지지 않게 보전하시기를 위함이니이다 16 내가 세상에 속하지 아니함 같이 그들도 세상에 속하지 아니하였사옵나이다 17 그들을 진리로 거룩하게 하옵소서 아버지의 말씀은 진리니이다(요 17:15-17)
그러므로 이 말씀은 바울 사도가 곧 죽음을 앞두고 있기에 곧 하나님 왕국에 들어간다는 확신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악에서 날마다 건져내시고 하늘 왕국으로 채우시는 주님의 일하심으로 인해 여기까지 와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에게 영광이 세세무궁토록 있을지어다 아멘”이라고 선언한다. “세세무궁토록”의 ‘호 아이온 호 아이온’은 ‘그 영원, 그 영원’이라는 말로 십자가의 영광이 영원한 상태임을 강조한 표현이다. 비록 마귀가 삼키려고 하여 고난 가운데 있지만 날마다 악함에서 건져내시고 하늘의 왕국을 누리도록 하시는 그분께 영광이 있다는 선포이다(마 6:13).
단순히 축구 선수가 골인을 성공시키고 경기장에서 무릎 꿇고 대중들이 보란 듯이 기도하는 그런 것이 아니며, 배우나 가수, 방송인들이 시상식에서 상을 받고 대중들 앞에서 모든 영광을 하나님께 돌린다는 어설픈 자기 생색내기가 아니다. 십자가 죽음 안에 연합되어 자신은 삭제되어 예수 그리스도의 믿음과 은혜가 이루셨기에 그분의 영광, 곧 십자가만 영원하게 드러나진다는 선언이다.
“19 브리스가와 아굴라와 및 오네시보로의 집에 문안하라 20 에라스도는 고린도에 머물러 있고 드로비모는 병들어서 밀레도에 두었노니 21 너는 겨울 전에 어서 오라 으불로와 부데와 리노와 글라우디아와 모든 형제가 다 네게 문안하느니라”(19-21절). “브리스가와 아굴라”(헬, ‘프리스가와 아퀼라스’)는 아굴라는 유대인이었고 그의 아내 브리스가는 로마의 귀족 출신으로 보이며 ‘브리스길라’라고도 불렸다(행 18:2). 이들도 자신의 집을 복음을 나누는 장소로 제공하였다(고전 16:19). 이런 점에서 “오네시보로의 집에 문안하라”라고 한 것은 브리스가와 아굴라 집뿐만 아니라 오네시보로의 집에 모이는 하나님의 집인 교회에 문안함으로 함께 한 복음임을 확인하라는 의미이다(참고 딤후 1:16).
“에라스도”(헬, ‘에라스토스’)와 “드로비모”(헬, ‘트로피모스’) 역시 바울 사도의 신실한 동역자들이다. “으불로”(헬, ‘유불로스’), “부데”(헬, ‘푸데스’), “리노”(헬, ‘리노스’), “글라우디아”(헬, ‘클라우디아’)를 언급하여 함께 진리의 아들 된 자들로 진리를 넘겨주고 넘겨받아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형제” 된 자라고 표현하였다. 바울은 디모데에게 “겨울 전에 오라”라고 하였는데 문자적으로 보자면 겨울이라는 계절이 되기 전에 오라는 표현이지만 직역하면 ‘겨울 앞에’라는 말로 언약의 관점에서 보자면 구원의 은혜가 베풀어지는 지금 종말의 상태에서 함께 한 복음 안에서 생명을 나누자는 의미로 전하고 있다.
예루살렘에 수전절이 이르니 때는 겨울이라(요 10:22)
“수전절”이라는 ‘엥카이니아’는 히브리어 ‘하누카’(봉헌, 헌신)의 역어인데 헬라 제국에 의해 성전이 더럽혀진 것에 항거하여 마카비가 독립 전쟁을 일으켜 성전을 깨끗하게 한 것을 기념하여(주전 164년) 이후 기슬르월(유대력 9월, 양력 11-12월) 25일부터 8일간 지키는 절기이다. 본문을 직역하면 ‘겨울에 (의해서) 예루살렘들 안에서 수전절이 만들어졌다’라는 말이다. 성전을 깨끗하게 한다고 절기를 지키는 자들을 예수님께서 겨울이라고 지칭하시며 성전에 멸망의 가증한 것이 선 상태라고 유대인들의 죄악을 폭로하신 것이다(막 13:14). 예레미야서에 보면 이렇게 말씀한다.
추수할 때가 지나고 여름이 다하였으나 우리는 구원을 얻지 못한다 하는도다(렘 8:20)
여름과 추수하는 가을을 구원의 때로 표현하여 여름과 추수 때가 지난 겨울은 구원을 얻지 못하는 계절로 표현한 것이다. 즉 겨울은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구원의 은혜가 지난 상태라는 의미이다. 그래서 “이 일이 겨울에 일어나지 않도록 기도하라”(막 13:18)라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던 것이다. 따라서 “너는 겨울 전에 어서 오라”는 말씀은 종말의 상태에 함께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인한 구원의 은혜 안에 있음을 서로 확인하고 싶은 것이다. 죽음을 앞두고 이미 18절에서 구원의 은혜를 고백하였으니 예수 그리스도 안의 생명을 확인하고 나누고 싶다는 것을 상징적인 표현으로 전한 것이다.
“나는 주께서 네 심령에 함께 계시기를 바라노니 은혜가 너희와 함께 있을지어다”(22절). “심령”이라고 번역한 ‘호 프뉴마’는 ‘성령’을 표현한 것이다. 성령의 은혜, 곧 예수 그리스도와 더불어 죽는 은혜로 함께 하기를 원하는 마음으로 마지막 인사를 전하였다. 이후 바울이 디모데를 만났는지 만나지 못하였는지 알 수는 없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본 서신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사도로서 진리를 넘겨주고 디모데는 진리를 넘겨받은 아들로서 한 복음 안에 있음을 말씀으로 확인하였다. 오늘 우리에게 디모데전후가 기록된 말씀으로 주어졌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진리를 넘겨주고 넘겨받는 “은혜”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람인가를 날마다 묻는 것이다(20250420 강론/주성교회 김영대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