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약강론/마태복음

41. 마태복음 7:1-6 비판하지 말라

불편한 진리 2025. 4. 16. 12: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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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강론 41

마태복음 7:1-6

비판하지 말라

 

비판에 대한 말씀이 나오는데 이 말씀도 너무 쉽게 생각하여 남을 비판하는 것, 뒷담화하는 것을 함부로 하지 말라는 정도로 이해한다. 그러나 이 말씀은 결코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조심해야 하는 윤리 도덕적인 말씀이 아니다. 이 말씀을 이해하기 위하여 이제까지 보았던 앞의 말씀을 다시 정리하며 문맥을 살펴야 할 필요가 있다. 본문이 7장으로 바뀌다보니 6장의 내용과 분리시켜서 생각하기 쉬우나 앞에서 말씀하신 것과 같은 문맥에서 하신 말씀이라는 것을 놓쳐서는 안 된다. 그런데 실제 이 말씀의 더 큰 문맥을 보면 예수님께서 율법의 완성자로 오셨음을 밝히시며 “~하지 말라”와 “~하라”라는 말씀으로 율법의 본질적인 뜻을 밝히셨다.

따라서 본문의 말씀을 이해할 때 예수님께서 하지 말라고 하는 말씀을 자제하고 하라는 말씀을 좇아 살면 된다고 단순하게 생각해서는 안 된다. 앞에서 이미 우리가 살펴본 것처럼 열 말씀(십계명)에서 하지 말라고 하는 것에는 이스라엘의 애굽적 죄성을 가지고 행하였던 것에서 벗어나 가나안적 의를 가지고 하라고 하신 말씀을 좇아 언약의 말씀 안에 사는 백성으로 하나님께서 만드신다는 뜻이다. 율법의 말씀이나 종교적인 행위를 우리에게 맡기신 적이 없고 오히려 예수님 자신이 그 모든 것을 이루시는 완성자요 종결자이심을 나타내셨다.

그리고 6:19 이하에서 땅의 보물과 하늘의 보물에 대하여 말씀하셨다. 그러면서 사람은 보물이 있는 곳에 마음이 가게 되어 있고 마음이 간다는 것은 우리의 눈과 관련된 문제로 말씀하셨다. 즉 마음이 있는 곳에 우리의 시선이 고정되어 있다는 것이다. 사람은 누구나 두 주인을 섬길 수 없기에 이 땅의 것으로 대표되는 재물에 마음을 두든지 아니면 하늘의 보물이신 예수 그리스도께 마음을 두든지 둘 중의 하나를 할 수밖에 없다. 하늘의 보물에 마음이 있다면 하늘의 보물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마음에 품고 새기는 자이다. 그러기 때문에 하늘의 보물에 시선이 고정된 자는 이 땅의 것으로 염려하지 않는다. 이 땅의 것 즉 먹는 것, 마시는 것, 입는 것을 염려하고 구하는 것은 이방인들이다. 그래서 하나님의 언약 백성은 오직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는 은혜의 존재이다.

“1 비판을 받지 아니하려거든 비판하지 말라 2 너희가 비판하는 그 비판으로 너희가 비판을 받을 것이요 너희가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가 헤아림을 받을 것이니라”(1-2절). “비판”의 ‘크리노’는 우리 성경에서 ‘판단하다, 심판하다, 결정하다, 선택하다, 정죄하다, 송사하다, 다스리게 하다, 작정하다’ 등등의 말로 번역되는 말이다(참고 마 5:40, 눅 22:30, 롬 2:1, 14:5, 고전 2:2 등). 주로 히브리어 ‘샤파트’(재판하다, 다스리다)의 역어로 표현되었다. 명사형은 ‘크리시스’이고 히브리어 ‘미쉬파트’(심판, 재판, 공의, 법령)의 역어이다. “헤아림”의 ‘메트론’은 ‘도량형, 척도, 분량’이라는 뜻이다.

5절에 보면 “외식하는 자여”라고 말씀하신 것을 보면 외식하는 것과 관련된 말씀으로 당시 유대인들은 율법으로 서로 판단하였다는 것이다. 율법을 실천하는 자기 의를 기준으로 상대방과 자기를 비교했었다. 그리고 자신의 율법 행함에 미치지 못하는 자들에 대하여 비판과 정죄로 이어졌다. 이렇게 문자적 율법을 지켜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보이는 하나님으로 나타내려고 했었다. 그래서 “너희가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가 헤아림을 받을 것이니라”라는 말씀은 비판, 판단하는 그 측량한 만큼 또한 자신도 그렇게 측량 당할 것이다. 이것이 율법의 문자 아래 있는 모습이다.

 

16 내가 그 때에 너희의 재판장들에게(샤파트) 명하여 이르기를 너희가 너희의 형제 중에서 송사를 들을 때에 쌍방간에 공정히(체데크) 판결(샤파트)할 것이며 그들 중에 있는 타국인에게도 그리 할 것이라 17 재판은(미쉬파트) 하나님께 속한 것인즉 너희는 재판(미쉬파트)할 때에 외모를 보지 말고 귀천을 차별 없이 듣고 사람의 낯을 두려워하지 말 것이며 스스로 결단하기 어려운 일이 있거든 내게로 돌리라 내가 들으리라 하였고(신 1:16-17)

 

사람은 외모를 보기에 사람의 낯을 두려워하는 판단을 하지만 하나님은 자신의 언약 말씀에 따라 판단하시기에 하나님의 공의(공정히)에 맡기라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재판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라고 말씀하였다. 율법에 근거하여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23 모세의 율법을 범하지 아니하려고 사람이 안식일에도 할례를 받는 일이 있거든 내가 안식일에 사람의 전신을 건전하게 한 것으로 너희가 내게 노여워하느냐 24 외모로 판단하지(크리노) 말고 공의롭게(디카이오스) 판단하라(크리노) 하시니라(요 7:23-24)

 

15 너희는 육체를 따라 판단하나(크리노) 나는 아무도 판단하지(크리노) 아니하노라 16 만일 내가 판단하여도(크리노) 내 판단이(크리시스) 참되니(알레디노스) 이는 내가 혼자 있는 것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가 나와 함께 계심이라(요 8:15-16)

 

내가 아무 것도 스스로 할 수 없노라 듣는 대로 심판하노니(크리노) 나는 나의 뜻대로 하려 하지 않고 나를 보내신 이의 뜻대로 하려 하므로 내 심판은(크리시스) 의로우니라(디카이오스)(요 5:30)

 

구약에서 재판, 심판은 하나님께서 속한 것이라고 말씀하신 하나님께서 친히 예수 그리스도로 이 땅에 오셨기에 “나를 보내신 이가 나와 함께 계심이라”(요 8:16)라고 말씀하셨다.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마 4:17)라고 선포하시고 십자가 죽음으로 율법 아래에 매인 자들을 구원하셔서 생명 안에서 죄 용서함이 이루어진 나라가 시작되었음을 나타내셨다. 따라서 산상강론을 받는 너희는 하나님을 우리 아버지로 부르게 되었고 그의 왕국과 그의 의를 구하는 존재로 바뀌었다고 이미 선포하신 것이다.

“3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고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4 보라 네 눈 속에 들보가 있는데 어찌하여 형제에게 말하기를 나로 네 눈 속에 있는 티를 빼게 하라 하겠느냐”(3-4절). “티”의 ‘카르포스’는 ‘티, 마른 줄기, 잔가지, 짚’이라는 뜻이고, “들보”는 ‘도코스’인데 ‘데코마이’(받들다, 지탱하다, 영접하다, 취하다)에서 유래한 단어로 ‘들보, 목재의 토막’이라는 뜻이다. 여기서 “형제”란 같은 언약을 율법으로 받은 이스라엘을 지칭한다. 문맥적으로 앞의 말씀과 연결하여 보자면 자신이 여전히 율법 아래 있음을 보지 못하면서도 형제가 율법에 매여 있는 모습은 잘 본다는 뜻이다.

“외식하는 자여 먼저 네 눈 속에서 들보를 빼어라 그 후에야 밝히 보고 형제의 눈 속에서 티를 빼리라”(5절). 자기 눈에 들보를 먼저 뺀 후에 형제의 눈 속에 티를 빼라고 하셨다. 그렇다면 인간이 스스로 눈에 들보를 뺄 수 있는가? 율법의 문자에 매인 인간은 죄인이기에 자기 눈의 들보를 스스로 뺀다는 것이 불가능하다. “빼어라”라는 말의 ‘에크발로’는 ‘쫓아내다, 내쫓다, 몰아내다, 내던지다, 내보내다, 집어내다’라는 뜻으로 주로 복음서에서 예수님께서 귀신을 쫓아내신 표현에 쓰인 단어이다(마 7:22, 8:16, 12:26 등).

이런 점에서 “들보를 빼어라”라는 표현이 과거 명령형이다. 즉 완성을 전제로 한 명령이다. 빼는 것도 주님께서 하시는데 자기 백성들에게는 이미 이루셨다는 의미이다. 이렇게 보자면 “눈 속의 들보”는 결국 우리의 율법적 행위로 예수님께서 빼내 주셔야 하는 것인데 십자가로 이루신 것이다. 결국 “형제의 눈 속에서 티를 빼리라”라는 말씀은 십자가 은혜를 입은 자는 문자의 율법을 넘겨주는 것이 아니라 진리, 복음을 넘겨줌으로 그 티를 빼어내 줄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 그것을 심판한다고 표현하셨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세상이 새롭게 되어 인자가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을 때에 나를 따르는 너희도 열두 보좌에 앉아 이스라엘 열두 지파를 심판하리라(크리노)(마 19:28)

 

“거룩한 것을 개에게 주지 말며 너희 진주를 돼지 앞에 던지지 말라 그들이 그것을 발로 밟고 돌이켜 너희를 찢어 상하게 할까 염려하라”(6절). 이 말씀도 세상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했는데 알아듣지 못하고 거부하면 아예 복음을 전하는 수고를 하지 말고 오히려 우리의 복음 전하는 말을 귀담아 듣고 원하는 자에게 말씀을 구체적으로 계속 더 전해주라는 식으로 곡해하였다. 이렇게 이해된다면 앞의 말씀과 모순이 된다. 즉 판단하지 말라고 하였는데 복음을 잘 받을 자를 스스로 판단하여 복음을 전한다는 뜻이 되는 것이다.

“진주”의 ‘마르가리테스’는 ‘진주, 보석, 값비싼 돌’이라는 뜻으로 하늘의 보물, 말씀을 의미하는데 그것이 바로 “거룩한 것”(헬, ‘하기오스’)이다. 그렇다면 여기서 “그들”이란 일차적으로 “개”로 상징되는 이방인, 율법적인 거짓 선생(사 56:10), 율법으로 다시 돌아가는 자들(빌 3:2, 벧후 2:22)과 “돼지”로 상징되는 스스로 하나님이 되어 판단하고 정죄하는 외식하는 바리새인과 서기관들, 유대인들을 지칭하나 곧 율법의 문자에 매인 모든 자를 가리킨다. 이방인과 외식하는 자들은 하늘의 보물을 발로 밟고 돌이켜 찢어 상하게 할 것이기 때문이다.

발로 밟고 찢어 상하게 한다는 의미는 땅은 하늘과 대비된 것으로 거룩하지 못한 상태를 말하는데 하늘의 보물을 땅의 것과 섞어서 반대 방향으로 산산조각 낸다는 것이다. 즉 하나님께서 하늘의 보물이라는 하나의 말씀을 진리로 주셨으나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거부하는 자들은 스스로 하나님이 되어 판단하며 말씀을 땅의 것과 혼합하고 역으로 이용하며 산산조각을 낸다는 뜻이다. 염려란 두 갈래로 분리된 마음을 말하는 것이므로 이것이 염려하는 개와 같은 이방인들이나 비판하는 돼지와 같은 모습으로 외식하는 자들이 진리를 어떻게 대하는가 하는 특성을 말씀하신 것이다.

들보를 눈에 박아놓고 있기에 먹고 마시며 입는 이 땅의 것에 매여 있어서 하늘의 보물을 보지 못하는 당연한 현상이다. 눈에 들보가 박혀있는 이상 눈이 어두워 진리의 말씀이 주어져도 그것을 부정한 땅의 것으로 혼합시켜 왜곡되게 이용할 수밖에 없는 것이 죄인이다. 거기서 스스로 벗어날 수 있는 자는 없다. 결국 자기 백성들의 죄를 해결하고자 은혜를 베푸시기 위하여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를 지심으로 대속의 죽음을 이루셨다(막 10:45, 고후 5:21).

이로 인하여 예수님께서 산상강론을 통해 율법의 완성자로 오신 예수님 자신이 바로 하늘의 복이며 하늘의 보물이고 진리이며 율법의 참 말씀이 되신다는 사실을 드러내 주시지만 우리는 죄인으로 문자의 율법에 가려 거룩한 하늘의 보물을 보지 못하는 존재라는 것이 분명히 폭로되었다. 진리를 두고도 깨닫지 못하는 존재는 짐승이다. 한 마디로 개와 돼지라는 말이다.

 

존귀하나 깨닫지 못하는 사람은 멸망하는 짐승 같도다(시 49:20/참고 시 73:22)

 

오늘 우리가 십자가의 예수 그리스도가 깨달아지고 그분만 구세주로 믿어졌다는 것은 성령께서 말씀으로 우리를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셨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가 깨달아지고 보이게 된 것이다. 나의 율법 행함이 아니며 나의 믿음이 아니다. 말씀 안에서 늘 이것을 확인하는 상태에 있어야 한다. 판단, 심판은 하늘의 의로 이 땅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신다. 우리가 이 땅에서 본다는 것은 허상에 불과한데도 우리는 판단하기를 좋아한다. 그러나 십자가 은혜로 우리의 눈을 열어 보게 하셨기에 하늘의 보물을 보게 되었고 진리를 알게 되었다. 이런 점에서 예수님의 오심이 이미 심판이다. 예수님의 오심으로 말미암아 보는 자와 보지 못하는 자로 이미 갈라놓으셨기 때문이다.

 

39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심판하러 이 세상에 왔으니 보지 못하는 자들은 보게 하고 보는 자들은 맹인이 되게 하려 함이라 하시니 40 바리새인 중에 예수와 함께 있던 자들이 이 말씀을 듣고 이르되 우리도 맹인인가 41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가 맹인이 되었더라면 죄가 없으려니와 본다고 하니 너희 죄가 그대로 있느니라(요 9:39-41)

 

(20250416 강론/주성교회 김영대 목사).

 

마41.0701-06 비판하지 말라(20250416).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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