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9. 창세기 41:46-57 애굽의 총리 요셉(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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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 강론 109
창세기 41:46-57
애굽의 총리 요셉(2)
요셉이 애굽의 총리가 되었다는 것은 단순히 꿈을 비전으로 가질 수 있었기에 여러 고난 중에서도 견디어 결국 총리에 오를 수 있었다는 성공 신화를 말씀하고 그것을 우리가 본받는 신앙이어야 된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다. 실제 본문에서 요셉이 어떤 믿음으로 어떤 노력을 하였는가를 전혀 말씀하고 있지 않다.
“총리”라고 번역한 말 ‘나탄’은 ‘지정하여 세우다’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언약적 관점에서 보자면 하나님께서 요셉을 언약의 아들로 지정하여 세워 애굽이라는 세상에 진리를 드러내고 말씀으로 섬기고 양육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곧 말씀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셔서 진리를 드러내시고 십자가 죽음으로 자기 백성들을 섬기실 것을 계시한 것이다. 이런 점에서 요셉의 결혼은 신부인 교회와 하나 되는 것을 나타낸다.
“요셉이 애굽 왕 바로 앞에 설 때에 삼십 세라 그가 바로 앞을 떠나 애굽 온 땅을 순찰하니”(46절). “삼십 세”는 일차 독자의 입장에서 레위인들이 성막에서 봉사할 수 있는 나이를 가리킨다.
2 레위 자손 중에서 고핫 자손을 그들의 종족과 조상의 가문에 따라 집계할지니 3 곧 삼십 세 이상으로 오십 세까지 회막의 일을 하기 위하여 그 역사에 참가할 만한 모든 자를 계수하라(민 4:2-3)
“요셉이 애굽 왕 바로 앞에 설 때에 삼십 세라”라는 말씀은 예수님께서 세례자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심으로 본격적으로 십자가 죽음의 길에 들어가시는 그리스도로서의 사역을 예표한다.
예수께서 가르치심을 시작하실 때에 삼십 세쯤 되시니라(눅 3:23)
“삼십 세쯤”이라는 표현에서 “쯤”이라는 말의 ‘호세이’는 ‘~인 것처럼, ~와 같이, 거의, 대략’이라는 뜻인데 성경이 왜 이렇게 표현하였을까? 문자적으로 ‘대략’을 의미하는 부사가 맞지만 언약의 관점에서 보자면 ‘마치 ~처럼’이라는 의미를 나타내고 있다는 것이다. 즉 구약의 성막에서 제사장, 레위인들의 역할과 연결시켜 예수님께서 제사장이 성막에서 일하는 것처럼 가르치심, 곧 복음을 드러내시는 일을 시작하셨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바로 앞을 떠나”라고 하였을 때 이 말은 히브리어로 ‘야차’인데 ‘나가다, 이끌어내다, 양육하다’라는 뜻이고, “애굽 온 땅을 순찰하니”라는 말은 ‘아바르’로 ‘건너가다, 인도하다, 넘겨주다, 전달하다’라는 뜻이다. 45절에서 “순찰하니라”라는 표현이 ‘야차’인데 미완료형으로 썼다. 요셉이 순찰(야차)하는 목적은 양육하여 세상으로부터 이끌어내기 위함이다. 미완료형으로 표현하였다는 것은 지속적으로 이끌어내고 양육한다는 의미이다. 그런데 46절에서 “순찰하니”라는 말을 ‘아바르’로 미완료형으로 썼다는 것은 ‘야차’에 대한 구체적인 설명이라고 할 수 있다. 즉 양육하여 섬기는 것은 진리를 넘겨주어야만 가능하다는 의미이다. 다시 말해서 세상에서 이끌어내고 양육하는 것은 세상에 속하지 않은 자가 하늘의 진리를 넘겨 주어야만 된다는 것이다(요 17:14-19).
“일곱 해 풍년에 토지 소출이 심히 많은지라”(47절). “심히 많은지라”의 ‘코메츠’는 ‘카마츠’(손으로 움겨잡다, 한 움큼을 잡다)에서 유래한 단어로 ‘한 움큼, 움켜쥔 손(주먹), 한 손 가득’이라는 뜻이다.
아론의 자손 제사장들에게로 가져갈 것이요 제사장은 그 고운 가루 한 움큼(코메츠)과 기름과 그 모든 유향을 가져다가 기념물로 제단 위에서 불사를지니 이는 화제라 여호와께 향기로운 냄새니라(레 2:2)
그것을 제사장에게로 가져갈 것이요 제사장은 그것을 기념물로 한 움큼(코메츠)을 가져다가 제단 위 여호와의 화제물 위에서 불사를지니 이는 속죄제라(레 5:12)
레위기 2:2은 소제를 화제로 드리는 것이고 5:12은 가난한 자가 고운 가루로 드리는 속죄제에 대한 말씀이다. 문자적으로 보면 칠 년 풍년으로 인한 열매는 심히 많은 것이다. 그러나 아무리 풍성하고 많은 소출을 얻었다고 하나 그것 자체로는 아무 의미가 없고 하나님께 드려진다면 한 움큼만으로도 하나님께 향기로운 냄새가 되며 속죄가 이루어지는 요소가 되는 것이다.
“일곱 해 풍년”이라는 표현으로 하나님께서 자기 언약으로 일하신 열매가 주어졌으나 사람들은 그것을 하나님의 언약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율법의 행위로 인한 열매로 생각한다는 것이다. 그러기에 그들이 소출을 얻었다고 하나 그것은 ‘한 움큼’에 불과하다. 다시 말해서 애굽에서 칠 년의 풍년으로 말미암은 열매는 언약의 아들 요셉의 다스림 아래에서 저장되어 말씀의 기근이 있을 흉년 때에 나누어 줌으로 살 수 있는 생명의 때가 된다는 것이다. 그것은 곧 예수 그리스도께서 언약의 성취라는 십자가 죽음으로 속죄를 이루심 안에서만 생명을 누리게 됨을 계시한다.
“48 요셉이 애굽 땅에 있는 그 칠 년 곡물을 거두어 각 성에 저장하되 각 성읍 주위의 밭의 곡물을 그 성읍 중에 쌓아 두매 49 쌓아 둔 곡식이 바다 모래 같이 심히 많아 세기를 그쳤으니 그 수가 한이 없음이었더라”(48-49절). “그 성읍 중에 쌓아 두매”라는 말에서 “성읍 중에”의 ‘타웨크’는 ‘중앙, 한 가운데’라는 뜻이고 “저장하되”(48절), “쌓아 두매”(48절)는 ‘나탄’으로 ‘두다, 놓다, 세우다’라는 뜻이다. 칠 년 풍년이 소출이 오분의 일로 거두어 저장된다(창 41:34). 다시 말해서 하나님은 언약의 아들 요셉을 통해 이끌어 양육하며 진리의 말씀을 넘겨주었으나 애굽이라는 세상은 그것을 율법으로 자기 한 가운데 저장한다는 뜻이다. 예수 그리스도로 진리의 말씀을 넘겨주었으나 사람들은 여전히 십자가를 율법으로 받는다. 오늘날 교회들이 십자가의 길을 가기 위해서는 십일조, 기도, 전도 같은 율법적 행위가 있어야 한다고 강조하는 무당 같은 목사들의 가르침에 교인들은 세뇌된다.
그래서 그 “쌓아 둔 곡식이 바다 모래 같이 심히 많아”(49절)라고 하였는데 이미 우리가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 바다의 모래와 같이 많다는 것은 수적인 힘으로 하나님을 대적함을 상징하는 표현이다(창 22:17, 32:12). 오늘날도 인간들은 하나님께서 언약으로 일하신 십자가를 율법으로 받아들여 자기 의를 자랑함으로 하나님의 의를 대적하고 십자가의 원수로 자신을 드러낸다.
18 내가 여러 번 너희에게 말하였거니와 이제도 눈물을 흘리며 말하노니 여러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느니라 19 그들의 마침은 멸망이요 그들의 신은 배요 그 영광은 그들의 부끄러움에 있고 땅의 일을 생각하는 자라(빌 3:18-19)
“50 흉년이 들기 전에 요셉에게 두 아들이 나되 곧 온의 제사장 보디베라의 딸 아스낫이 그에게서 낳은지라 51 요셉이 그의 장남의 이름을 므낫세라 하였으니 하나님이 내게 내 모든 고난과 내 아버지의 온 집 일을 잊어버리게 하셨다 함이요 52 차남의 이름을 에브라임이라 하였으니 하나님이 나를 내가 수고한 땅에서 번성하게 하셨다 함이었더라”(50-52절). “흉년이 들기 전에”라는 말의 ‘테렘’은 ‘~전에, 아직 아닌, ~하기 전에, (사건이) 일어나지 않음’이라는 뜻이다. 즉 두 아들이 출생 후에 흉년이 그 일을 시작하게 되었다는 의미이다. 다시 말해서 흉년이 와야만 풍년의 허구성, 곧 말씀을 율법으로 받아 자기 행위로 쌓은 의가 드러나게 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러면 두 아들의 출생이 어떤 의미인가? “므낫세”의 ‘메낫세’는 ‘잊어버리게 하셨다’라는 뜻으로 하나님께서 요셉에게 주신 모든 고난의 일을 잊어버렸다는 의미이고, “에브라임”의 ‘에프라임’은 ‘이중의, 두 번째, 다시, 두 배의 땅’이라는 뜻으로 수고한 땅에서 번성하게 하셨다는 의미이다. 므낫세를 통해 풍년을 잊어야 하고, 에브라임을 통해 하나님께서 자기 언약으로 다시 세우시는 언약의 말씀을 알아야 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하나님께서 풍년을 주신 이유는 흉년을 위해서이다. 이 둘이 다 칠 년으로 이루어진 것은 하나님께서 자기 언약으로 일하신다는 뜻이다. 따라서 흉년을 통해 풍년의 의미를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언약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이 있어야만 우리가 율법으로 행한 자기 의라는 죄가 폭로되고 그것이 진리로 장악되어야 함을 분명히 알게 되는 것이다. 그것을 위해 언약의 아들 므낫세와 에브라임으로 주어진다. 그래서 요셉이 “후에 든 그 흉년이 너무 심하므로 이전 풍년을 이 땅에서 기억하지 못하게 되리이다”(창 41:31)라고 말했던 것이다.
1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2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3 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은 하시나니 곧 죄로 말미암아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육신에 죄를 정하사 4 육신을 따르지 않고 그 영을 따라 행하는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가 이루어지게 하려 하심이니라 5 육신을 따르는 자는 육신의 일을, 영을 따르는 자는 영의 일을 생각하나니 6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 7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하지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 8 육신에 있는 자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느니라 9 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롬 8:1-9)
결국 “하나님이 나를 내가 수고한 땅에서 번성하게 하셨다 함이었더라”(52절)라는 말씀은 진리로 충만하게 됨을 의미한다. 곧 창조 언약에서(창 1:26-28) 진리로 충만하고 번성하게 하신다는 그 언약을 요셉을 통해 반추하고 있고 그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으로 언약이 온전히 성취되어 진리로 충만하고 번성하게 됨을 나타낸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는 더 이상 율법으로 정죄하는 정죄함이 없는 것이다.
“53 애굽 땅에 일곱 해 풍년이 그치고 54 요셉의 말과 같이 일곱 해 흉년이 들기 시작하매 각국에는 기근이 있으나 애굽 온 땅에는 먹을 것이 있더니 55 애굽 온 땅이 굶주리매 백성이 바로에게 부르짖어 양식을 구하는지라 바로가 애굽 모든 백성에게 이르되 요셉에게 가서 그가 너희에게 이르는 대로 하라 하니라”(53-55절). “그치고”라는 말의 ‘칼라’는 ‘완성하다, 성취하다, 끝내다, 마치다’라는 뜻이다. 언약의 아들 요셉의 다스림으로 인해 풍년이 그쳤다는 것은 이제 본격적으로 보여줄 흉년을 통해 그 풍년의 의미가 더 분명하게 드러날 것이다. 이런 점에서 ‘칼라’라는 표현을 통해 이미 완성되었음을 나타낸다. 두 번째 것을 세우시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 이루었다”(요 19:30)라는 말씀은 자기 백성들, 곧 교회로써 새 생명 안에서의 시작이다.
그런데 “애굽 온 땅이 굶주리매 백성이 바로에게 부르짖어 양식을 구하는지라”라고 말한다. 이미 애굽에 양식은 저장되어 있다. 그러나 그것은 언약의 아들 요셉이 양식을 넘겨주어야 한다. 다시 말해서 진리의 말씀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 풍성하지만 십자가 죽음으로 넘겨주는 죽음 안에 있어야 한다. 기록된 말씀으로 성경이 주어져 있으나 사람들은 그것을 진리로 여기지 않는다. 그러기에 늘 굶주린 상태로 살아갈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죽은 상태이다.
“56 온 지면에 기근이 있으매 요셉이 모든 창고를 열고 애굽 백성에게 팔새 애굽 땅에 기근이 심하며 57 각국 백성도 양식을 사려고 애굽으로 들어와 요셉에게 이르렀으니 기근이 온 세상에 심함이었더라”(56-57절). 언약의 아들 요셉에 의해 양식이 나누어져야 한다. 곧 진리의 말씀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이시기에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 죽음으로 얻는 진리이다.
오호라 너희 모든 목마른 자들아 물로 나아오라 돈 없는 자도 오라 너희는 와서 사 먹되 돈 없이, 값 없이 와서 포도주와 젖을 사라(사 55:1)
“돈 없는 자”란 나의 공로, 자기 의가 죽은 자라는 뜻이다. 자기 자신은 결코 돈이 될 수 없고 값 없는 존재라는 것을 아는 것이다. 진리의 말씀이 임해야 한다(20250330 강론/주성교회 김영대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