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5. 창세기 40:1-23 요셉의 꿈 해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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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 강론 105
창세기 40:1-23
요셉의 꿈 해석
요셉은 말씀 성취를 위해 애굽에 팔렸고 또 억울한 누명을 쓰고 감옥에 갇히는 신세가 되었다. 야곱 언약을 위해서라고 하지만 요셉의 입장에서는 참으로 억울하고 힘든 고난의 시간임에는 분명하다. 성경은 이것을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푸신 결과로 나타난 형통이라고 한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언약대로 잘 진행되어 가고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오늘 본문을 대하면 애굽 바로 왕의 술 맡은 관원장과 떡 굽는 관원장의 꿈을 해석하는 이야기로 전개된다.
이런 이야기가 왜 성경에 기록되었는가? 단순히 애굽이 두 신하에 대한 이야기라든지 혹은 요셉이 애굽에게 겪은 일이기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자기 언약을 위해 어떻게 일하셨는가 하는 말씀이다. 그것은 곧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언약이 성취되는 말씀이라는 의미이다. 그러므로 요셉이 어떻게 꿈을 잘 해석하였으며 그것을 우리도 본받아 꿈 해석을 잘 해야 한다는 교훈을 위한 말씀이 아니라 언약의 아들 요셉이 애굽이라는 세상에서 어떻게 그들을 말씀으로 섬기는가를 보아야 한다.
“1 그 후에 애굽 왕의 술 맡은 자와 떡 굽는 자가 그들의 주인 애굽 왕에게 범죄한지라 2 바로가 그 두 관원장 곧 술 맡은 관원장과 떡 굽는 관원장에게 노하여 3 그들을 친위대장의 집 안에 있는 옥에 가두니 곧 요셉이 갇힌 곳이라 4 친위대장이 요셉에게 그들을 수종들게 하매 요셉이 그들을 섬겼더라 그들이 갇힌 지 여러 날이라”(1-4절). “그 후에”라는 말은 ‘와예히(하야) 아하르(아하르) 하데바림(다바르) 하엘레(엘레)’인데 직역하면 ‘그리고 일어났다 후에 그 말씀들’이다. 그러니까 ‘그 말씀들 후에’라는 라는 말로 이제까지 일어난 모든 일이 말씀이라는 의미이다. 다시 말해서 보디발과 그의 아내와 요셉의 관계에서 일어난 모든 일이 하나님의 말씀을 보여 주기 위한 사건으로써 말씀이다.
“술 맡은 자”의 ‘마쉬케’는 ‘술잔 올리는 자, 술 관리자, 비옥한 목초지’라는 뜻이다. “떡 굽는 자”라는 말의 ‘아파’는 ‘요리하다, 굽다, 빵 굽는 자’라는 뜻이다. 왕의 음식을 관리한다는 것은 왕의 건강, 안위에 관한 중요한 직책이었다. 그런데 이들이 애굽 왕에게 범죄하였다고 말씀한다. 그 죄가 어떤 것인지 밝히고 있지 않으니 알 수 없지만 중요한 것은 요셉이 있는 곳에 함께 갇혔다는 것이고 언약의 아들 요셉이 그들을 섬기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감옥 안에 두 관원장이 요셉과 함께 있다는 것은 죄인들을 대표하는 존재라는 뜻이다.
“수종들게 하매”라는 말의 ‘파카드’는 39:4에서 “총무”라고 번역한 말과 같은 단어로 ‘방문하다, 감독하다, 보살피다’라는 뜻이다. 하나님은 여기서도 요셉을 감독자로 세워 그들을 섬기는 것을 통해 말씀을 드러내고 계신다는 의미이다. 하나님께서 언약이 아들 요셉을 감옥에 보내셔서 그들을 섬기게 하신 것은 언약을 온전히 성취하실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세상에 보내셔서 말씀을 드러내실 것을 나타내신 것이다. 그래서 “그들이 갇힌 지 여러 날이라”라고 하였는데 “여러 날”의 ‘야밈’은 ‘욤’의 복수형으로 정해지지 않은 어떤 기간을 나타내는 관용적 표현이다. 요셉이 말씀을 드러내는 기간 중 어느 때에 진리로 깨달아지는 하나님의 때가 임하게 될 것을 암시하고 있다는 것이다.
“5 옥에 갇힌 애굽 왕의 술 맡은 자와 떡 굽는 자 두 사람이 하룻밤에 꿈을 꾸니 각기 그 내용이 다르더라 6 아침에 요셉이 들어가 보니 그들에게 근심의 빛이 있는지라 7 요셉이 그 주인의 집에 자기와 함께 갇힌 바로의 신하들에게 묻되 어찌하여 오늘 당신들의 얼굴에 근심의 빛이 있나이까 8 그들이 그에게 이르되 우리가 꿈을 꾸었으나 이를 해석할 자가 없도다 요셉이 그들에게 이르되 해석은 하나님께 있지 아니하니이까 청하건대 내게 이르소서”(5-8절).
“술 맡은 자와 떡 굽는 자 두 사람이 하룻밤에 꿈을 꾸니 각기 그 내용이 다르더라”라고 한 말씀은 두 사람이 각기 다른 꿈을 꾸었지만 그 꿈의 근본적 의미는 하나로 같다는 뜻이다. 다시 말해서 그들의 꿈은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이라는 진리를 계시하는 꿈이다. 그래서 요셉은 “해석은 하나님께 있지 아니하니이까”(8절)라고 말하는 것이다. 그러나 술 맡은 관원장과 떡 굽는 관원장은 “이를 해석할 자가 없도다”(8절)라고 밝힘으로 진리를 알지 못하는 상태에 있음을 나타낸다. 이렇듯 애굽적 세상은 죄악된 이 땅의 모습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없다. 그러므로 진리를 아는 것는 십자가를 근거로 진리의 영이 알게 해 주셔야 하는 것이다.
49 내가 내 자의로 말한 것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내가 말할 것과 이를 것을 친히 명령하여 주셨으니 50 나는 그의 명령이 영생인 줄 아노라 그러므로 내가 이르는 것은 내 아버지께서 내게 말씀하신 그대로니라 하시니라(요 12:49-50)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리라(요 14:26)
“9 술 맡은 관원장이 그의 꿈을 요셉에게 말하여 이르되 내가 꿈에 보니 내 앞에 포도나무가 있는데 10 그 나무에 세 가지가 있고 싹이 나서 꽃이 피고 포도송이가 익었고 11 내 손에 바로의 잔이 있기로 내가 포도를 따서 그 즙을 바로의 잔에 짜서 그 잔을 바로의 손에 드렸노라”(9-11절). “꿈”은 계시의 말씀이다. 그래서 요셉이 “해석은 하나님께 있지 아니하니이까”(8절)라고 말한 것이다. 꿈의 해석이 하나님께 있음을 밝힌 것은 단순히 겸손하였기 때문이 아니라 자신에게 일어나는 모든 사건을 하나님의 일하심과 연관 지어 생각하고 있었다는 의미이다. 즉 모든 일이 하나님의 손에 달려 있다는 것이다. 그들이 꾼 꿈은 미래에 대한 것임은 분명하다. 그렇다고 하여 꿈을 통해 미래를 계시하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언약으로 일하실 것을 미리 보여 주시고 그것을 요셉을 통해 이루어 가심을 나타내신 것이다.
두 신하를 위해 주신 꿈이 아니라 그들과 함께 한 요셉의 역할을 알려 주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었기에 결국 요셉을 위한 꿈이었다는 결론을 내릴 수밖에 없다. 즉 요셉에게 주신 꿈을 성취하기 위해 일하시는 하나님을 보게 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요셉을 애굽으로 보내신 것은 오직 그를 통하여 이스라엘을 애굽으로 이주시키려는 아브라함 언약의 성취를 위한 준비였다. 결국 하나님께서 요셉에게 꿈 해석을 하도록 주신 계시의 말씀은 언약으로 확정된 미래이다.
그러나 오늘날 한국교회 내에서는 꿈을 신비한 것으로 여기고 하나님의 계시로 받아들이는 경향이 있는데 한 가지 초점, 오직 나의 궁금한 미래를 알아내는 것에 있다. 그러니 하나님의 말씀과는 전혀 상관없는 개꿈을 꾸고 그것을 미래에 일어날 하나님의 계시라고 엉터리 주장을 하는 것은 사이비 잡교 선무당의 행위에 불과하다. 성도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확정된 종말을 사는 자이다. 아니 그 종말에 날마다 나를 죽이시는 십자가의 예수 그리스도를 확인하는 것이다. 두 관원장의 꿈은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계시한 것이기 때문이다. 두 관원장의 꿈과 해석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12 요셉이 그에게 이르되 그 해석이 이러하니 세 가지는 사흘이라 13 지금부터 사흘 안에 바로가 당신의 머리를 들고 당신의 전직을 회복시키리니 당신이 그 전에 술 맡은 자가 되었을 때에 하던 것 같이 바로의 잔을 그의 손에 드리게 되리이다”(12-13절). “세 가지는 사흘이라”이라는 말씀은 구원의 사흘 길을 계시한 것이다.
32 이르시되 너희는 가서 저 여우에게 이르되 오늘과 내일은 내가 귀신을 쫓아내며 병을 고치다가 제삼일에는 완전하여지리라 하라 33 그러나 오늘과 내일과 모레는 내가 갈 길을 가야 하리니 선지자가 예루살렘 밖에서는 죽는 법이 없느니라(눅 13:32-33)
“14 당신이 잘 되시거든 나를 생각하고 내게 은혜를 베풀어서 내 사정을 바로에게 아뢰어 이 집에서 나를 건져 주소서 15 나는 히브리 땅에서 끌려온 자요 여기서도 옥에 갇힐 일은 행하지 아니하였나이다”(14-15절). 술 맡은 관원장이 회복된다는 것은 진리의 말씀이 은혜로 입혀졌다는 의미이다. 그래서 요셉은 “당신이 잘 되시거든 나를 생각하고 내게 은혜를 베풀어서 내 사정을 바로에게 아뢰어 이 집에서 나를 건져 주소서”라고 말하는데 이 말씀을 단순히 문자적으로만 보면 요셉이 나중에 감옥에서 벗어나는 일을 위해 청탁을 하는 것으로 보이지만 언약적 관점에서 말하자면 십자가 은혜를 입은 자는 늘 예수 그리스도를 마음에 품고 복음을 나누는 일에만 관심을 가지게 된다는 의미이다.
그러나 23절에 보면 “술 맡은 관원장이 요셉을 기억하지 못하고 그를 잊었더라”(23절)라고 말씀한다. 은혜를 입었다고 하지만 인간은 자기 죄성을 좇아 사는 존재이기에 늘 언약의 아들을 생각한다는 것은 언감생심이다. 성도는 늘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마음에 품고 새기는 존재이다. 그 십자가 은혜가 날마다 죽음에 넘기우고 또한 살리셔서 생명을 확인토록 하시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함께 하늘의 부르심을 받은 거룩한 형제들아 우리가 믿는 도리의 사도이시며 대제사장이신 예수를 깊이 생각하라(히 3:1)
“나는 히브리 땅에서 끌려온 자요”라고 하였는데 단순히 자신의 억울함을 말하는 표현이라기보다 ‘강을 건너온 자’, 곧 “구덩이”(창 37:24, 히 ‘보르’)라는 죽음의 강을 건너온 자로서 계시의 말씀을 해석할 수 있는 자라는 의미이다. 다시 말해서 죽음을 거쳐 부활로 나온 자만 말씀을 아는 자라는 뜻이다. 이런 점에서 3, 5절에서는 “옥”을 ‘소하르’(둥근 집)로 쓰고 있지만 “옥에 갇힐 일은 행하지 아니하였나이다”라고 하였을 때 “옥”은 구덩이와 같은 단어 ‘보르’를 썼다. 다시 말해서 죽음과 부활을 겪지 않아도 될 자가 죽음과 부활을 경험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죄가 없는 분이라 죽음과 부활과는 상관없는 분이었지만 언약의 말씀 성취를 위해 이 땅에 죄인과 같은 모습으로 오셨다(참고 히 4:14-14).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이를 우리를 대신하여 죄로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그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고후 5:21)
“16 떡 굽는 관원장이 그 해석이 좋은 것을 보고 요셉에게 이르되 나도 꿈에 보니 흰 떡 세 광주리가 내 머리에 있고 17 맨 윗광주리에 바로를 위하여 만든 각종 구운 음식이 있는데 새들이 내 머리의 광주리에서 그것을 먹더라 18 요셉이 대답하여 이르되 그 해석은 이러하니 세 광주리는 사흘이라 19 지금부터 사흘 안에 바로가 당신의 머리를 들고 당신을 나무에 달리니 새들이 당신의 고기를 뜯어 먹으리이다 하더니 20 제삼일은 바로의 생일이라 바로가 그의 모든 신하를 위하여 잔치를 베풀 때에 술 맡은 관원장과 떡 굽는 관원장에게 그의 신하들 중에 머리를 들게 하니라 21 바로의 술 맡은 관원장은 전직을 회복하매 그가 잔을 바로의 손에 받들어 드렸고 22 떡 굽는 관원장은 매달리니 요셉이 그들에게 해석함과 같이 되었으나 23 술 맡은 관원장이 요셉을 기억하지 못하고 그를 잊었더라”(16-23절).
술 맡은 관원장의 꿈을 통해서는 생명이라는 해석이 주어졌지만 떡 굽는 관원장의 꿈에는 죽음이라는 해석이 주어졌다. 이는 선악 이원론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꾸어지는 꿈을 통해 하나님의 말씀이 드러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 언약의 성취를 위해 두 관원장이 사용된 것이고 그것을 통해 언약의 아들 요셉이 하나님의 일하심에 동원되었다는 사실이다. 결국 이 모든 일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을 드러내고 있다는 것이다(2025023 강론/주성교회 김영대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