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약강론/디모데전후서

02. 디모데후서 1:9-18 그리스도 예수의 나타나심

불편한 진리 2025. 2. 9. 14: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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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모데후서 강론 02

디모데후서 1:9-18

그리스도 예수의 나타나심

 

교회를 다니는 사람들이 가지는 불안감 중에서 가장 큰 것이 “이렇게 신앙생활하는 것으로 천국에 갈 수 있을까?” 하는 것이다. 열심히 예배당을 출입하면서 모임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기도하며 부지런히 성경 읽고 또 이웃에게 열심히 전도하는 것을 신앙생활로 생각하기 때문이다. 특히 성경 어떤 본문들은 하나님께서 행위대로 심판하신다고 하니 열심히 교회 생활을 하지 못하는 것으로 인한 불안감이 있다. 반대로 그나마 교회와 관련된 일을 열심히 한다고 생각되면 하나님 앞에 떳떳해진다.

불안한 마음을 가지는 자나 떳떳하게 생각하는 자의 공통적인 문제는 자기 행위에 구원의 의미를 두고 있다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을 은혜라고 하지만 자신의 신앙 행위에 의한 열매로 생각하기 때문에 열심을 내고 노력하는 것이 교인들의 현주소이다. 이것이 종교 생활이다. 성경에서 말씀하는 ‘은혜’의 의미를 모르기 때문이다. 복음은 우리의 행위와 상관없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흘리신 피의 은혜로 생명을 누리는 것이다. ‘나의 믿음’이 아닌 ‘예수 그리스도의 믿음’이다.

이런 점에서 바울 사도는 디모데에게 할머니와 어머니로부터 영향을 받은 믿음이 아니라 하나님의 집으로 한 성령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한몸임을 말하였고 한몸이기에 같은 진리의 말을 하고 내가 주체가 되어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는 것이 아니라 복음이 ‘되어’ 고난 가운데 있는 상태라는 것을 말씀하였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이어 복음의 진수를 또 전한다.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사 거룩하신 소명으로 부르심은 우리의 행위대로 하심이 아니요 오직 자기의 뜻과 영원 전부터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하심이라”(9절). “우리”는 진리의 아들이 된 자, 하나님의 집이 된 자, 하나님의 사람이 된 자를 지칭한다. “부르심”의 ‘칼레오’는 ‘부르다, 이름 짓다, 초대하다’라는 뜻이다. “소명”이란 ‘클레시스’는 동사 ‘칼레오’의 명사형으로 ‘이름을 지음이나 이름, 부름, 초대, 초청, 소명’이라는 뜻이다. 그러니까 거룩한 부르심에 초대되어 그 이름이 된 자가 우리이며 곧 하나님의 집인 교회이다. “우리의 행위”란 율법적 행위를 말한다.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로 말미암음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줄 알므로 우리도 그리스도 예수를 믿나니 이는 우리가 율법의 행위로써가 아니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함이라 율법의 행위로써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느니라(갈 2:16)

 

만일 은혜로 된 것이면 행위로 말미암지 않음이니 그렇지 않으면 은혜가 은혜 되지 못하느니라(롬 11:6)

 

“자기의 뜻”이라고 번역된 이 말은 헬라어로 ‘프로데시스’인데 ‘프로’(전에, 앞에)와 ‘티데미’(놓다, 정하다, 배열하다, 배치하다)의 합성어로 ‘(음식이나 제물 등을) 차려 놓음, 진설, 전시, 뜻, 결심, 의도, 계획’이라는 뜻으로 성막의 “진설병”(눅 6:4)에 사용되었다. 하나님께서 이전에 이미 계획하여 결정하신 것 안에 잘 배열되어 있는 상태를 의미한다(롬 8:28, 9:11, 엡 1:11).

“영원 전부터”란 직역하면 ‘영원의 때 이전에’라는 말이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교회로 부르셔서 구원을 이루신 것이 영원 이전에 결정하신 것인데 그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이라고 말씀하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가 하나님의 집으로 교회요 성도가 되었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영원 전에 계획하신 것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완성하시고 성령으로 진리 안으로 인도하신 “은혜”를 베푸셨기 때문이다. 정리하자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그 이름이 된 자가 되도록 하신 것은 우리의 율법적 행위가 아니라 오직 하나님께서 영원의 때 이전에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은혜를 베풀어 하나님의 집으로 잘 배치하여 세우셨기 때문이라는 의미이다.

그래서 은혜가 어떻게 드러났는가를 “이제는 우리 구주 그리스도 예수의 나타나심으로 말미암아 나타났으니 그는 사망을 폐하시고 복음으로써 생명과 썩지 아니할 것을 드러내신지라”(10절)라고 말씀한다. “이제는 우리 구주 그리스도 예수의 나타나심으로 말미암아 나타났으니”라는 말씀은 영원 전에 하나님의 계획에 의한 것이 지금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진 것이 구원인데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으로 계시가 온전히 다 완성되어 드러났다는 의미이다. “폐하시고”라는 말의 ‘카타르게오’는 ‘활동하지 못하게 하다, 폐하다, 무효로 하다, 못쓰게 만들다, 치워버리다’라는 뜻이다. 즉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은 사망을 치워버리시는 것이었다.

“생명”은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썩지 아니할 것”이란 말의 ‘아프달시아’는 ‘썩지 않음, 불멸’이라는 뜻이다. 멸망될 수 없는 것이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그러니까 “복음”이란 죽음, 썩는 것에서 생명, 불멸의 상태로 전환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사망을 폐하시고 복음으로 생명과 썩지 아니할 것을 드러내신지라”라는 말씀은 선악의 나무로 죽음 가운데 있게 하심으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복음으로 이 땅에 오셔서 생명을 드러내셨다는 의미이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 하시니라(창 2:17)

 

“반드시 죽으리라”라는 표현의 ‘무트 타무트’는 직역하면 ‘죽고 죽는다’ 혹은 ‘죽음으로 죽는다’라는 말인데 죽음으로 죽는 것을 통해 생명을 드러내시겠다는 하나님의 뜻이 담겨 있다.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은 십자가 죽음과 부활로 사망을 치워버리고 생명을 드러내셨다는 것이다.

 

그러나 성경이 모든 것을 죄 아래에 가두었으니 이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약속을 믿는 자들에게 주려 함이라(갈 3:22)

 

“11 내가 이 복음을 위하여 선포자와 사도와 교사로 세우심을 입었노라 12 이로 말미암아 내가 또 이 고난을 받되 부끄러워하지 아니함은 (왜냐하면) 내가 믿는 자를 내가 알고 또한 내가 의탁한 것을 그날까지 그가 능히 지키실 줄을 확신함이라”(11-12절). “이 복음”이란 썩지 않는 멸망될 수 없는 생명이다. “이 복음을 위하여”라는 말은 ‘이 복음 안에’라는 말이다. “세우심을 입었노라”라는 말은 ‘티데미’로 잘 배치되고 진열되었다는 뜻이다. “선포자”의 ‘케뤽스’는 ‘전령, 사자, 전달자’라는 뜻이다. 즉 “사도나 교사로 세우심을 입었노라”라고 하였으니까 선포자나 사도, 교사를 같은 의미로 말씀한 것이다. 우리가 복음 안에 부르심을 받은 것은 복음을 전달하고 가르치는 일을 위해 하나님의 집에 잘 배치되고 진열되었다는 뜻이다.

“고난을 받되”라는 말의 ‘파스코’는 죽음에까지 이르는 깊은 고난을 받는다는 뜻이다. “부끄러워하지 아니함”이라는 말씀은 사도가 로마의 감옥에 갇힌 것과 관련된 표현으로 갇혀 고난받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는 것이다(8절). 그 이유를 두 가지로 말씀하였다. 첫째는 “내가 믿는 자를 내가 알고”라는 것이라고 하였는데 여기서 “알고”의 ‘에이도’는 ‘경험하여 아는 것’을 의미한다. 둘째는 “내가 의탁한 것을 그날까지 그가 능히 지키실 줄을 확신함”이 있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의탁한 것”이란 복음의 말씀을 의미한다(딤전 6:20). “그날까지”라고 번역하였는데 ‘그날 안에’라는 뜻이다. “지키실 줄”이란 ‘퓔랏소’로 복음이 드러나지는 것을 의미한다. “확신함이라”라는 말의 ‘페이도’는 ‘납득시키다, 설득하다, 확신시키다’라는 뜻인데 수동태로 쓰였다. 주께서 그렇게 하신다는 것을 설득되어 알게 되었다는 의미이다.

정리하자면 바울 사도가 이 복음 안에 선포자와 사도, 교사로 하나님의 집에 잘 배치되고 배열된 이유는 내가 믿는 분 예수 그리스도를 이제까지의 경험으로 잘 알게 되었고 또한 바울 사도가 디모데에게 부탁한 복음을 예수 그리스도의 날 안에서 능히 잘 드러내실 것에 대하여 자신도 설득당하였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13 너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과 사랑으로써 내게 들은 바 바른 말을 본받아 지키고 14 우리 안에 거하시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네게 부탁한 아름다운 것을 지키라”(13-14절). “믿음과 사랑으로써”라고 번역하였는데 정확하게 표현하면 ‘믿음과 사랑 안에서’ 또는 ‘믿음과 사랑과 함께’라는 말이다. 앞에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라고 하였으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믿음과 사랑과 함께’라고 표현하는 것이 자연스러울 것이다. “바른 말”은 진리의 말씀이다. 즉 바울 사도에게 전해 들은 말은 진리의 말씀으로 곧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이다(딤전 6:3). “네게 부탁한 아름다운 것”이란 ‘네게 부탁한 선한 것’이라는 의미로 곧 사도로서 바울이 디모데에게 전하여준 복음이다(딤전 6:20). “지키라”라는 표현은 ‘필랏소’로 드러내 보여주는 것을 의미한다.

 

곧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 계시사 세상을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며 그들의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아니하시고 화목하게 하는 말씀을 우리에게 부탁하셨느니라(고후 5:19)

 

“우리 안에 거하시는 성령으로 말미암아”라는 말씀은 자의적으로나 임의로 드러내라는 것이 아니라 우리라는 교회요 성도 안에 사시는 성령을 ‘통해’ 복음이 드러난다는 의미이다. 이는 바울 사도에게 주어진 성령이나 디모데에게 주어진 성령이나 또한 오늘날 우리에게 주어진 성령이나 같은 한 성령 안에서 드러나는 복음이다.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리라(요 14:26)

 

“아시아에 있는 모든 사람이 나를 버린 이 일을 네가 아나니 그 중에는 부겔로와 허모게네도 있느니라”(15절). “부겔로”의 ‘퓌겔로스’는 ‘망명객’이라는 뜻이고, “허모게네”의 ‘헤르모게네스’는 ‘헤르메스의 태생’이라는 뜻이다. “헤르메스”(행 14:12)는 그리스 신화의 올림포스 열두 신 가운데 하나로 제우스와 마이아의 아들로, 가축의 증식을 관장하는 부와 행운의 신, 길을 지배하는 길손의 신, 통역이나 상업, 도적의 수호신, 경계를 지키는 신으로서 죽은 자를 지하 세계로 인도하는 신으로 알려져 있다.

“나를 버린 이 일”이란 표현은 단순히 바울 사도를 버리고 떠났다는 개인적인 서운함을 토로하는 말이 아니라 바울 사도가 전한 복음, 그 복음 안에서 함께 진리의 아들, 하나님의 집, 하나님의 사람이 되기를 거절하고 외면하였다는 것이다. 우리가 복음을 거절할 수 있다는 말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은혜가 베풀어지지 않으면 인간은 죄의 권세에 매여 진리를 거절할 수밖에 없는 상태에 있는 존재라는 의미다. 이 두 사람을 대표적으로 들어 죄의 권세 아래 인간은 종교적으로 망명객이며 우상의 태생으로 복음을 떠난 자들의 모습을 비유적으로 언급한 것이다.

“16 원하건대 주께서 오네시보로의 집에 긍휼을 베푸시옵소서 그가 나를 자주 격려해 주고 내가 사슬에 매인 것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고 17 로마에 있을 때에 나를 부지런히 찾아와 만났음이라 18 (원하건대 주께서 그로 하여금 그날에 주의 긍휼을 입게 하여 주옵소서) 또 그가 에베소에서 많이 봉사한 것을 네가 잘 아느니라”(16-18절). 이제 바울 사도는 부겔로와 허모게네와 대조된 인물 “오네시보로”를 언급하였는데 헬라어로 ‘오네시포로스’는 ‘유익을 가져오는 자’라는 뜻이다.

“원하건대 … 베푸시옵소서”의 ‘디도미’는 ‘넘겨주다’라는 뜻이고, “격려해 주고”의 ‘아납쉬코’는 ‘상쾌하게 하다, 원기를 회복하다’라는 뜻인데 다 과거형으로 썼다. “로마에 있을 때에 나를 부지런히 찾아와 만났음이라”라는 말씀은 진리를 넘겨주고 넘겨받는 교제가 있었다는 뜻이다. 이미 오네시보로의 집이 하나님의 집이 된 것은 주님께서 긍휼을 넘겨주셨기 때문이다. 그가 바울 사도에게 힘이 되었고 부끄러워하지 않은 것을 로마의 감옥에서 진리의 복음을 나누는 일을 통해 복음에 유익을 가져오는 자로확인하였고 또한 디모데도 잘 아는 것이었다. 오늘 우리가 교회로 모이는 것은 진리의 복음을 나누는 일을 통해 한 성령으로 말미암는 한 믿음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은혜로 한몸임을 확인하고 또한 서로 하늘의 긍휼을 넘겨주고 넘겨받는 것이다(20250209 강론/주성교회 김영대 목사).

 

딤후02.0109-18 그리스도 예수의 나타나심(20250209).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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