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구약강론/창세기

83. 창세기 30:9-24 야곱의 아들들(2)

불편한 진리 2024. 7. 21. 15:05

 

 

 

창세기 강론 83

창세기 30:9-24

야곱의 아들들(2)

 

고대 근동 사회에서 아들을 낳지 못하는 것은 신으로부터 버림을 당했다는 인식이 있었다. 그러기에 야곱 아들들의 출생으로 레아와 라헬은 서로 하나님과 자신의 관계가 좋은 것임을 보여주려 한다. 아들 낳기 경쟁을 통해 하나님이 자기 편이라는 증거로 삼고자 한다. 오늘날의 교인들도 하나님을 사랑의 하나님으로 이해하고 자신에게 좋은 것을 주시기를 바라며 예배에 정성을 다하며 밤낮 기도에 매진하는 종교 생활에 여념이 없다. 종교적 행위로 경쟁을 불러일으키는 곳이 교회이다. 경쟁을 유도하여 종교적 행위가 난무한 곳에는 은혜가 무시될 수밖에 없다. 자기 의가 충만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근거하여 진리의 영을 주심으로 생명 가운데로 이끄시는 하나님의 일하심을 은혜로 받은 자들이 교회이다. 우리가 좋은 것과 하나님의 보시기에 좋은 것이 다르다. 우리가 우리에게 좋은 것은 육의 것이지만 하나님의 입장에서 좋은 것은 성령을 주셔서 진리 가운데로 이끌어 가시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너희가 악할지라도 좋은 것을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 하시니라(눅 11:13 / 참고 마 7:11)

 

“9 레아가 자기의 출산이 멈춤을 보고 그의 시녀 실바를 데려다가 야곱에게 주어 아내로 삼게 하였더니 10 레아의 시녀 실바가 야곱에게서 아들을 낳으매 11 레아가 이르되 복되도다 하고 그의 이름을 갓이라 하였으며”(9-11절). “레아가 자기의 출산이 멈춤을 보고”라고 하였는데 우리는 이미 29:35에서 “그의 출산이 멈추었더라”라는 말씀이 단순히 출산이 중단되었다는 말이라기보다 하나님께서 자기 언약을 분명히 나타내시고 확인하셨다는 의미로 이해하였다. 그러나 레아의 입장에서는 아직 그것이 확인이 안 된 것이다. 하나님의 언약을 알려고 하기보다 “시녀 실바”를 “아내”로 주어 아들 낳는 일로 복됨을 확인하고 싶어 한다. 그것이 인간의 죄성이다.

“갓”(히, ‘가드’)은 ‘행운, 복됨’이라는 뜻이다. 레아는 “복되도다”라고 하여 복을 거론하나 이 이름은 ‘구드’(공격하다, 침략하다, 이기다)에서 유래한 단어로 ‘군대’라는 뜻도 담고 있다. 야곱의 아내들은 아들 낳기 경쟁하며 자신의 입장을 토로하지만 하나님은 그것을 통해 자기 언약을 보여주기를 원하신다. 이런 점에서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건져내면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바로가 너희의 말을 듣지 아니할 터인즉 내가 내 손을 애굽에 뻗쳐 여러 큰 심판을 내리고 내 군대, 내 백성 이스라엘 자손을 그 땅에서 인도하여 낼지라(출 7:4)

 

야곱의 열두 아들은 후에 열두 지파로 형성하여 이스라엘이 된다. 그 이스라엘을 하나님은 “내 군대”라고 말씀하신다. 군대란 비진리를 상징하는 애굽과 맞서 싸워야 할 존재로 표현된 것이다(참고 빌 2:25, 몬 1:2). 그러나 하나님의 군대, 여호와의 군대는 자기 힘과 능력으로 싸우는 자가 아닌 은혜 안에서 진리가 되는 복됨이 이루어진 자이다.

 

13 또 그가 피 뿌린 옷을 입었는데 그 이름은 하나님의 말씀이라 칭하더라 14 하늘에 있는 군대들이 희고 깨끗한 세마포 옷을 입고 백마를 타고 그를 따르더라(계 19:13-14)

 

“12 레아의 시녀 실바가 둘째 아들을 야곱에게 낳으매 13 레아가 이르되 기쁘도다 모든 딸들이 나를 기쁜 자라 하리로다 하고 그의 이름을 아셀이라 하였더라”(12-13절). 실바가 또 아들을 낳아 레아는 그 이름을 “아셀”이라고 하였는데 히브리어 ‘아쉐르’는 ‘아샤르’(똑바로 가다, 나아가다, 성공하다, 축복하다)에서 유래한 단어로 ‘행복한 자’라는 뜻이다. 실바를 통해 낳은 아들로 레아는 자신이 행복한 자라고 선언한다. 이 의미 역시 언약적 관점에서 이해하자면 율법을 행하면서도 똑바로 나아간다고 여기는 자들이 언약의 후손으로 오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행복한 자가 될 것을 말씀한다. 이런 점에서 “모든 딸들이 나를 기쁜 자라 하리로다”라고 한 표현은 앞으로 레아와 같은 딸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신부가 될 것을 의미하는 말씀이다.

“14 밀 거둘 때 르우벤이 나가서 들에서 합환채를 얻어 그의 어머니 레아에게 드렸더니 라헬이 레아에게 이르되 언니의 아들의 합환채를 청구하노라 15 레아가 그에게 이르되 네가 내 남편을 빼앗은 것이 작은 일이냐 그런데 네가 내 아들의 합환채도 빼앗고자 하느냐 라헬이 이르되 그러면 언니의 아들의 합환채 대신에 오늘 밤에 내 남편이 언니와 동침하리라 하니라 16 저물 때에 야곱이 들에서 돌아오매 레아가 나와서 그를 영접하며 이르되 내게로 들어오라 내가 내 아들의 합환채로 당신을 샀노라 그 밤에 야곱이 그와 동침하였더라”(14-15절). “합환채”란 히브리어로 ‘두다이’인데 다른 번역본에서는 ‘자귀나무’(새번역, 공동번역)라고 번역하고 각주에서 ‘임신촉진제’라고 설명하였다(고대 근동 사회에서 최음제나 강장제로 여겨 ‘사랑의 과실’로 불렸던 것 같다). 이 단어를 예레미야서에는 “광주리”로 번역하였다(렘 24:1). 그런데 아가서에 보면 이렇게 말씀한다.

 

합환채가 향기를 뿜어내고 우리의 문 앞에는 여러 가지 귀한 열매가 새 것, 묵은 것으로 마련되었구나 내가 내 사랑하는 자 너를 위하여 쌓아 둔 것이로다(아 7:13)

 

하나님께서 예레미야에게 무화과 두 광주리를 보여주셨는데 한 광주리에는 좋은 무화과였고 또 다른 광주리에는 먹을 수 없을 정도의 나쁜 무화과였다. 유다가 바벨론의 포로가 될 것이나 하나님께서 좋은 무화과같이 잘 돌보실 것이라는 예언이었다. 하나님은 ‘두다이’를 통해 자기 언약을 말씀하셨다. 따라서 아가서에서 “합환채가 향기를 뿜어내고”라는 것은 하나님의 자기 언약적 사랑이다. 그 사랑은 언약의 실체요 성취자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 안에서 신부가 누리는 구원을 말씀한 것이다.

본문에서 “언니의 아들의 합환채”(14, 15절)라고 하였는데 그냥 ‘아들의 합환채’이다. 레아는 “내 아들의 합환채”(15, 16절)라고 하였다. 이런 점에서 ‘두다이’(합환채)는 르우벤이라는 아들, 장자를 통해 주어지는 언약을 상징한다. 여기서 “청구하노라”라는 표현은 히브리어로 ‘나탄’인데 ‘주다, 두다, 놓다, 세우다, 만들다’라는 뜻이다. 라헬은 합환채를 원하였고 레아는 그것으로 라헬과 거래를 하지만 언약적 관점에서는 언약의 아들, 야곱이라는 신랑을 원하는 모습을 통해 누구든지 언약의 아들 안에서 구원이 이루어진다는 원칙을 분명히 세우고자 하신 것이다. 그러나 레아나 라헬은 야곱을 서로 “내 남편”(15절)이라고 주장하면서 언약의 말씀을 거래의 도구로 삼는 죄성을 드러낼 뿐이다.

“17 하나님이 레아의 소원을 들으셨으므로 그가 임신하여 다섯째 아들을 야곱에게 낳은지라 18 레아가 이르되 내가 내 시녀를 내 남편에게 주었으므로 하나님이 내게 그 값을 주셨다 하고 그의 이름을 잇사갈이라 하였으며 19 레아가 다시 임신하여 여섯째 아들을 야곱에게 낳은지라 20 레아가 이르되 하나님이 내게 후한 선물을 주시도다 내가 남편에게 여섯 아들을 낳았으니 이제는 그가 나와 함께 살리라 하고 그의 이름을 스불론이라 하였으며”(17-20절).

“하나님이 레아의 소원을 들으셨으므로”라는 말씀은 직역하면 ‘하나님이 레아를 들으셨다’라는 말이다. 여기서 “들으셨으므로”라는 말의 ‘샤마’는 ‘경청하다, 순종하다’라는 뜻이다. 하나님께서 레아를 자기 언약 안에 순종하게 하셨다는 의미이다. 즉 율법을 행하는 자가 언약으로 상징되는 합환채를 통해 하나님의 순종 안에 들어오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것을 보여주는 것이 “잇사갈”(히, ‘잇사카르’)로 ‘값, 보상’이라는 뜻이다. 또한 “스불론”의 히브리어 ‘제불룬’은 ‘자발’(영화롭게 하다, 존경하다)에서 유래하였는데 ‘거주지, 높은 거주’라는 뜻이다. 즉 하나님께서 자기 언약의 순종 안으로 불러들여 거주지가 되게 하신 은혜를 허락하셨다는 의미이다. 레아에게 보상해 주신 것은 언약의 아들이다. 다시 말해서 십자가 죽음에 순종하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 영화롭게 존재하게 된 것이 하나님께서 주시는 언약의 보상이라는 뜻이다. 그래서 레아는 “하나님이 내게 후한 선물을 주시도다”라고 하면서 “이제는 그가 나와 함께 살리라”라고 고백한다.

 

18 그런즉 한 범죄로 많은 사람이 정죄에 이른 것 같이 한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아 생명에 이르렀느니라 19 한 사람이 순종하지 아니함으로 많은 사람이 죄인 된 것 같이 한 사람이 순종하심으로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되리라 20 율법이 들어온 것은 범죄를 더하게 하려 함이라 그러나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나니 21 이는 죄가 사망 안에서 왕 노릇 한 것 같이 은혜도 또한 의로 말미암아 왕 노릇 하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생에 이르게 하려 함이라(롬 5:18-21)

 

“그 후에 그가 딸을 낳고 그의 이름을 디나라 하였더라”(21절). “디나”란 ‘공의, 심판’을 뜻한다. 야곱에게 많은 딸이 있었지만(34:21, 46:7) 유일하게 그 이름을 기록하고 있는 이유는 34장에서 세겜 족속과의 사건에 대한 배경이 되기 때문이다. 생물학적으로 딸이지만 율법으로 자기 의를 드러내는 레아가 언약의 아들 야곱 안에 합류되어 하나님의 공의를 드러냄으로 완성된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22 하나님이 라헬을 생각하신지라 하나님이 그의 소원을 들으시고 그의 태를 여셨으므로 23 그가 임신하여 아들을 낳고 이르되 하나님이 내 부끄러움을 씻으셨다 하고 24 그 이름을 요셉이라 하니 여호와는 다시 다른 아들을 내게 더하시기를 원하노라 하였더라”(22-24절). “생각하신지라”라는 표현은 히브리어로 ‘자카르’라는 언약 용어이다. 합환채, 즉 하나님의 언약에 의해 아들 낳는 것이 완성된다는 의미이다.

“요셉”이라는 이름의 히브리어 ‘요세프’는 ‘야사프’(더하다, 증거하다)에서 온 말로 ‘그가 더할 것이다’라는 뜻이다. 즉 하나님께서 베냐민이라는 아들을 더하심으로 열두 아들을 통해 자기 언약으로 보여주고자 하시는 교회에 대한 계시를 완성하실 것이라는 의미이다. 라헬은 그것을 계시로 보여 준다.

라헬이 요셉을 낳은 후 “하나님이 내 부끄러움을 씻으셨다”라고 하였는데 왜 아들을 낳는 것이 부끄러움을 씻는 것일까? 이는 단순히 아들에 관한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의 수(3)와 땅의 수(4)를 곱하여 나타내는 열두 지파로 하나님의 아들들이다. 하나님께서 이 땅을 찾아오셔서 자기 아들들로 불러 완성되는 것이 복음이다. 따라서 하나님의 복음이 온전하게 드러나는 것이 부끄러움을 씻는 것이 된다.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그리고 헬라인에게로다(롬 1:16)

 

레아가 많은 아들을 낳음으로 율법적 행위로 자기 의를 드러내었으나 합환채를 기점으로 하나님의 언약 안에 들어오는 은혜를 보여준다. 그리고 라헬은 요셉을 낳는 것을 통해 하나님의 언약이 완성되어감을 보여준 것이다. 그러나 야곱이 아직 하나님께서 언약을 주신 곳 벧엘로 돌아가지 않은 상태였기에 마지막 아들은 남겨두고 있다. 그 아들은 벧엘에 도달하여 완성된다는 의미에서 그때 마지막 아들이 주어진다(35:16-20). 이렇게 하여 하나님의 집인 교회가 이루어지는 것이 야곱의 언약이다. 따라서 열두 지파는 언약의 한 아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온전히 성취되는 교회요 성도이다.

 

 

(20240721 강론/주성교회 김영대 목사).

 

창83.3009-24 야곱의 아들들(2)(20240721).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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