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3. 요한계시록 16:12-16 여섯째 대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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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계시록 강론 63
요한계시록 16:12-16
여섯째 대접
‘아마겟돈’에 대하여 말하면 대부분 거국적인 전쟁이나 아니면 우주적인 전쟁을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 강대국과 강대국의 전쟁으로 말미암아 세상이 멸망하게 된다는 식으로 해석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기독교와 비기독교와의 싸움으로 종교 전쟁으로 이해하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본문에서 말씀하는 아마겟돈은 미래에 일어날 문화의 전쟁, 땅을 빼앗기 위한 전쟁, 또 테러를 응징하기 위한 전쟁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다섯째 천사에 의해 대접이 짐승의 왕좌에 쏟아지자 땅적 존재들인 짐승은 수고하는 고통 가운데 자기의 말을 진리로 삼아서 먹는 혼돈과 흑암의 상태라는 것이 드러났다. 그래서 “아픈 것과 종기로 말미암아 하늘의 하나님을 비방하고 그들의 행위를 회개하지 아니하더라”(11절)라고 하였다. 그리고 “또 여섯째 천사가 그 대접을 큰 강 유브라데에 쏟으매 강물이 말라서 동방에서 오는 왕들의 길이 예비되었더라”(12절)라고 하였다. “큰 강 유브라데”는 약속의 땅 북쪽 경계로(창 15:18) 여호수아 1:4에서 “곧 광야와 이 레바논에서부터 큰 강 곧 유브라데 강까지 헷 족속의 온 땅과 또 해 지는 쪽 대해까지 너희의 영토가 되리라”라고 한 말씀을 보면 약속의 땅으로 들어온다는 의미이다.
“동방에서 오는”이라는 표현은 성경에서 하나님을 향해 나아오는 것을 의미한이다. 동쪽으로 가는 것은 하나님을 떠나 관계가 끊어지는 것을 의미한다(창 4:16, 11:2, 겔 8:16). 성막을 만들게 하실 때 출입문을 동쪽에 설치하여 하나님을 향해 나아가는 것임을 이스라엘에게 보여주셨다. 이스라엘이 약속의 땅에 들어가는 것을 여호수아서에서 이렇게 말씀한다.
14 백성이 요단을 건너려고 자기들의 장막을 떠날 때에 제사장들은 언약궤를 메고 백성 앞에서 나아가니라 15 요단이 곡식 거두는 시기에는 항상 언덕에 넘치더라 궤를 멘 자들이 요단에 이르며 궤를 멘 제사장들의 발이 물 가에 잠기자 16 곧 위에서부터 흘러내리던 물이 그쳐서 사르단에 가까운 매우 멀리 있는 아담 성읍 변두리에 일어나 한 곳에 쌓이고 아라바의 바다 염해로 향하여 흘러가는 물은 온전히 끊어지매 백성이 여리고 앞으로 바로 건널새 17 여호와의 언약궤를 멘 제사장들은 요단 가운데 마른 땅에 굳게 섰고 그 모든 백성이 요단을 건너기를 마칠 때까지 모든 이스라엘은 그 마른 땅으로 건너갔더라(수 3:14-17)
출애굽한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을 차지할 때 남쪽에서 북쪽으로 들어가지 않고 모압과 암몬 땅을 돌아서 요단강 동편에서 진행하여 요단강을 마른 땅으로 건너 약속의 땅에 들어갔다. 이처럼 동방에서 온다는 것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고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이다(사 24:5). 그래서 이사야 선지자가 이렇게 예언하였다.
15 여호와께서 애굽 해만을 말리시고 그의 손을 유브라데 하수 위에 흔들어 뜨거운 바람을 일으켜 그 하수를 쳐 일곱 갈래로 나누어 신을 신고 건너가게 하실 것이라 16 그의 남아 있는 백성 곧 앗수르에서 남은 자들을 위하여 큰 길이 있게 하시되 이스라엘이 애굽 땅에서 나오던 날과 같게 하시리라(사 11:15-16)
애굽의 물과 유브라데의 물을 마르게 하신 것은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들을 불러 구원하시기 위함이다. 그렇다면 “강물이 말라서 동방에서 오는 왕들의 길이 예비되었더라”라는 표현은 심판 가운데서도 하나님을 비방하고 회개하지 않는 자들이 있는가 하면 짐승들 가운데서 세상의 왕으로 살던 자들이 마른 땅을 건너 하나님의 언약 안으로 들어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자가 되는 은혜를 베푸신다는 의미이다. 여섯째 대접을 쏟아 하나님의 은혜에 의해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자들과 그렇지 않은 상태에 있는 자들을 또 보여주신다.
“또 내가 보매 개구리 같은 세 더러운 영이 용의 입과 짐승의 입과 거짓 선지자의 입에서 나오니 그들은 귀신의 영이라 이적을 행하여 온 천하 왕들에게 가서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의 큰 날에 있을 전쟁을 위하여 그들을 모으더라”(13-14절). “또 내가 보매”라는 말은 장면 전환을 위해 표현된 것이다. 장면을 전환하여 “개구리 같은 세 더러운 영이 용의 입과 짐승의 입과 거짓 선지자의 입에서 나오니”라고 하였는데 “그들은 귀신의 영이라”라고 하였다. “세 더러운 영”은 “용의 입”, “짐승의 입”, “거짓 선지자의 입”이다.
“개구리 같은”이라는 말은 쉴 새 없이 입을 놀려 개구리같이 소리를 내는 것을 표현한 것이다. 개구리는 레위기 11:10에 보면 “물에서 움직이는 모든 것과 물에서 사는 모든 것 곧 강과 바다에 있는 것으로서 지느러미와 비늘 없는 모든 것은 너희에게 가증한 것이라”라고 하였다. 여기서 “물”은 ‘아랫물’ 곧 세상을 상징하며 “지느러미”는 방향을 잡는 것을 표현한 것이고, “비늘”은 몸을 보호하는 것이라는 측면에서 보자면 말씀 안에 보호받지 못하여 그 방향성을 알지 못하고 행하는 것이 하나님 보시기에 가증한 것이라는 의미이다.
“입”은 말과 관계된 표현이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입에서 나오는 것들은 마음에서 나오나니 이것이야말로 사람을 더럽게 하느니라”(마 15:18)라고 하셨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가증하게 여기는 정결하지 못한 동물에게서 나온 소리와 같다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과 관계없는 것을 의미한다. 그래서 용과 짐승과 거짓 선지자는 한통속으로 비진리를 말하는 자들이다. 진리의 말씀이 없어 그 방향성을 잃고 땅적 사고방식에 매여 예수 그리스도가 아닌 다른 것들을 증거하는 더러운 말을 하는 것이다.
“이적을 행하여”라고 하였는데 ‘표적들’(헬, ‘세메이온’)이다. 귀신의 영은 표적으로 마치 십자가를 보여주는 것처럼 하여 “온 천하 왕들”을 모으는데 이는 “큰 날에 있을 전쟁을 위하여” 하는 것이라고 말씀한다. 13:13-14에도 보면 “큰 이적을 행하되 심지어 사람들 앞에서 불이 하늘로부터 땅에 내려오게 하고 짐승 앞에서 받은 바 이적을 행함으로 땅에 거하는 자들을 미혹하며 땅에 거하는 자들에게 이르기를 칼에 상하였다가 살아난 짐승을 위하여 우상을 만들라 하더라”라고 말씀한 것을 볼 수 있다. 이미 예수님께서 이렇게 밝히셨다.
22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 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 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하지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23 그 때에 내가 그들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마 7:22-23)
용과 짐승과 거짓 선지자는 연결된 한 통속이다. 신기한 이적들을 보여주어서 자기 세력으로 붙잡아 두는 것이 이들이 하는 일이다. 거짓 선지자는 표적들을 보여주면서 짐승을 따르게 하고 용을 경배하게 한다. 용에게만 무한한 능력이 있는 것처럼 나타낸다. 그러기에 사람들은 용의 권세에 매여 용의 정신과 짐승의 사고방식으로 사는 것이 힘이고 세상을 살아가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너희는 아래에서 났고 나는 위에서 났으며 너희는 이 세상에 속하였고 나는 이 세상에 속하지 아니하였느니라”(요 8:23)라고 말씀하셨다. 결국 그렇게 땅의 정신으로 살면서 입으로 비진리를 쏟아내며 기적을 추구하는 세상이 ‘나’이며 ‘우리’이고 그 나와 우리가 거짓 선지자요 짐승이며, 용이다. 그러므로 성경 말씀을 더럽게 증거하는 사람들을 “더러운 영” 곧 귀신이라고 한다. 눈에 보이는 기적을 믿음의 증거라고 보여주면서 사람들을 모은다.
4 자녀들아 너희는 하나님께 속하였고 또 그들을 이기었나니 이는 너희 안에 계신 이가 세상에 있는 자보다 크심이라 5 그들은 세상에 속한 고로 세상에 속한 말을 하매 세상이 그들의 말을 듣느니라 6 우리는 하나님께 속하였으니 하나님을 아는 자는 우리의 말을 듣고 하나님께 속하지 아니한 자는 우리의 말을 듣지 아니하나니 진리의 영과 미혹의 영을 이로써 아느니라(요일 4:4-6)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께 속해야만 거짓말, 곧 비진리를 끊고 진리의 말을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여기서 말씀한 “큰 날에 있을 전쟁”이란 어떤 특정한 날에 있을 최후의 한 전쟁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나타내신 비진리와 진리와의 싸움이다. “큰 날”을 직역하면 ‘그 큰 그 날’이다. 즉 구약에서 선지자들이 수없이 선포하였던 “여호와의 날”(사 2:12, 13:6-9, 겔 30:3, 욜 1:15, 습 1:7 등), 하나님의 심판과 구원이 있는 그 날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홀로 심판받으시고 구원을 이루신 십자가이다.
“보라 내가 도둑 같이 오리니 누구든지 깨어 자기 옷을 지켜 벌거벗고 다니지 아니하며 자기의 부끄러움을 보이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15절). “내가 도둑 같이 오리니”라는 말씀은 깨어있지 않은 어둠의 상태를 말한다. 유대인들은 예수님이 오셨을 때 율법을 문자적으로 지키는 것을 자랑하는 상태에 있었다. 그것이 바로 예수님께서 도둑 같이 오신 것이다. 그러나 성도들에게는 도둑 같이 오실 수 있는 분이 아니다.
4 형제들아 너희는 어둠에 있지 아니하매 그 날이 도둑 같이 너희에게 임하지 못하리니 5 너희는 다 빛의 아들이요 낮의 아들이라 우리가 밤이나 어둠에 속하지 아니하나니(살전 5:4-5)
그러므로 “누구든지 깨어 자기 옷을 지켜 벌거벗고 다니지 아니하며 자기의 부끄러움을 보이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라고 선언하였다. 구약의 제사 제도에서 제사장은 하나님이 지정하신 옷을 입었다. 그 제사장의 모습은 앞으로 오실 진짜 대제사장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보여주신 것이었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예수 그리스도와 한몸된 교회요 성도가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은 하나님의 백성이요 제사장이라는 의미로 전하였다. 그래서 “누구든지 그리스도와 합하기 위하여 세례를 받은 자는 그리스도로 옷 입었느니라”(갈 3:27)라고 선언하였다(참고 롬 13:14).
성도의 부끄러움은 더러운 말을 전하여 짐승을 낳게 되는 일이다.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었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 안으로 들어왔다는 의미이다.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죄가 덮혀졌고 가리워졌다면 그것이 복이다. 그래서 여기서도 “자기 옷을 지켜”라는 표현을 ‘테레오’, 즉 마음에 품고 새기는 것으로 말씀하였다. 그러나 오늘날 교회들은 용에 의해 신기한 기적을 체험하고 짐승과 같이 연합하여 세상을 힘 있는 자로 살아가는 것이 복이라는 거짓말을 진리로 전하고 있다. 거기에 사람들이 열광하며 기업화된 대형교회를 이룬다. 그러다 보니 또 한편으로는 작은 교회를 이루는 운동을 하는 이들도 있는데 이 역시 예수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교회를 알지 못하고 비진리를 추구하는 것에 불과하다.
“세 영이 히브리어로 아마겟돈이라 하는 곳으로 왕들을 모으더라”(16절). “아마겟돈”이라고 번역된 헬라어 ‘아르마겟돈’은 ‘하르’(산)와 ‘메깃돈’(모임, 주둔지, 회합장소)의 합성어로 ‘므깃도의 산’이라는 히브리어를 음역한 것이다(공동번역과 가톨릭성경은 ‘하르마게돈’이라고 번역하였다). “므깃도”는 갈멜산 남쪽에 위치한 성읍(왕상 4:12)으로 가나안 땅에서 북방의 두로나 시돈으로, 또 메소포타미아에서 수리아를 거쳐 애굽으로 갈 때 반드시 통과해야 할 요충지이다.
29 요시야 당시에 애굽의 왕 바로 느고가 앗수르 왕을 치고자 하여 유브라데 강으로 올라가므로 요시야 왕이 맞서 나갔더니 애굽 왕이 요시야를 므깃도에서 만났을 때에 죽인지라 30 신복들이 그의 시체를 병거에 싣고 므깃도에서 예루살렘으로 돌아와 그의 무덤에 장사하니 백성들이 요시야의 아들 여호아하스를 데려다가 그에게 기름을 붓고 그의 아버지를 대신하여 왕으로 삼았더라(왕하 23:29-30 / 참고 대하 35:22)
구약에서 전쟁이나 심판과 관련하여 사용되는데 사사기 5:19-21에서도 하나님의 백성을 압박하는 왕들의 패배를 언급함으로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들에 대한 심판의 산으로 언급된다. 그렇다면 이 산은 ‘시온산’을 의미한다. 세 영이 용과 짐승, 거짓 선지자들이 연합하여 진리가 아닌 거짓말들로 예수 그리스도를 대적하기 위해 모으지만 그 산에서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심판하시고 완전한 승리를 이루신다. 그것이 십자가로 완성된 것이다. 그래서 14:1에서 “어린 양이 시온산에 섰고 그와 함께 십사만 사천이 서 있는데 그들의 이마에는 어린 양의 이름과 그 아버지의 이름을 쓴 것이 있더라”라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한몸된 모습을 말씀하였다(20240114 강론/주성교회 김영대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