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약강론/요한계시록

60. 요한계시록 16:1-3 첫째와 둘째 대접

불편한 진리 2023. 11. 19. 18: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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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계시록 강론 60

요한계시록 16:1-3

첫째와 둘째 대접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 이제 일곱 대접 심판이 본격적으로 드러난다. 일곱 대접 재앙은 처음 네 개(1-9절)와 마지막 세 개(10-21절)로 구분되어 하나의 묶음을 형성한다. 1-9절에서는 대접을 땅, 바다, 강과 물 근원, 해에 쏟는 반면, 10-21절에서는 짐승의 왕좌, 큰 강 유브라데, 공중에 대접을 쏟는 것으로 말씀한다. 우리는 본문의 분량과 강론의 편의상 첫째와 둘째 대접을 묶어서 먼저 보고 셋째부터 일곱째 대접까지 각각 나누어서 살펴볼 것이다.

“또 내가 들으니 성전에서 큰 음성이 나서 일곱 천사에게 말하되 너희는 가서 하나님의 진노의 일곱 대접을 땅에 쏟으라 하더라”(1절). “또 내가 들으니”라는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가 요한 사도에게 보는 것(4:1, 5:6, 6:5 등)과 듣는 것(1:10, 5:13, 6:1 등)으로 주어졌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이 들렸다는 것은 예수님께서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으라”(막 4:9, 23, 눅 8:8, 14:35)라는 말씀대로 듣는 은혜가 주어졌다는 뜻이고, 또한 “귀 있는 자”(2:7, 11, 17, 29, 3:6, 13, 22)로 일곱 교회가 되어 계시의 말씀을 밝히 드러낸다는 의미이다. 따라서 교회가 된 자만 볼 수 있고 들을 수 있는 말씀이다.

“성전에서 큰 음성이 나서”라는 표현은 하나님의 말씀이 하늘 성전으로부터 주어졌다는 뜻이다. 성전에서 주어진 말씀이라면 어린 양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에 근거하여 주어진 말씀이다. 일곱 대접 재앙 역시 하나님의 절대적 말씀의 권위에 의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기준으로 심판이 이루어진다는 것을 드러낸다.

“일곱 대접을 땅에” 쏟는다. “대접”이란 지난 강론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어린 양의 피를 담아 속죄와 함께 언약을 맺는 일에 사용된 그릇으로 “일곱 대접”이라는 표현을 통해 성전의 등잔대에 올려진 일곱 잔으로 하나님께서 언약으로 온전히 성취한 것에 근거한 심판이라는 의미가 담겨 있다.

“땅”이란 하늘 성전과 대조된 의미로 일차적으로는 유대인들이다. 또한 이방인들이라 할지라도 유대인과 마찬가지로 자기가 원하는 종교적 중심을 성전으로 세워 놓고 율법적 행위로 영생을 누리려는 모든 자를 의미한다. 고로 모든 땅적 존재들을 지칭하는 것이다. “쏟으라”라는 말의 ‘엑케오’는 성경에서 다음과 같이 사용된 단어이다.

 

이것은 죄 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엑케오) 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마 26:28)

 

저녁 먹은 후에 잔도 그와 같이 하여 이르시되 이 잔은 내 피로 세우는 새 언약이니 곧 너희를 위하여 붓는(엑케오) 것이라(눅 22:20)

 

하나님이 오른손으로 예수를 높이시매 그가 약속하신 성령을 아버지께 받아서 너희가 보고 듣는 이것을 부어 주셨느니라(엑케오)(행 2:33)

 

성경의 표현들로 보았을 때 대접을 쏟는다는 것은 심판 가운데서 하나님의 백성, 즉 예수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로 구별하시는 의미를 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다시 말해서 재앙이나 심판이란 “하나님의 진노”가 쏟아진 세상에서 하나님의 백성이 어떤 모습으로 드러나는가를 보여주는 도구가 되는 것이다. 창세 전의 약속대로 자기 백성을 새롭게 창조하시기 위한 하나님의 열심을 의미한다. 그래서 여기서도 “진노”를 ‘뒤모스’로 쓰고 있다.

“첫째 천사가 가서 그 대접을 땅에 쏟으매 짐승의 표를 받은 사람들과 그 우상에게 경배하는 자들에게 악하고 독한 종기가 나더라”(2절). “악하고”의 헬라어 ‘카코스’는 ‘무가치한, 무능력, 연약함’이라는 뜻이고, “독한”이란 ‘포네로스’는 ‘아픈, 악한, 나쁜 상태에 있는’이라는 뜻이고, “종기”의 ‘헬코스’는 ‘곪은 상처’라는 뜻이다. 즉 무가치한 악한 것, 곪은 상처가 주어졌다는 것은 짐승의 표 아래에서 비진리를 좇아가는 상태를 표현한 말씀이다.

그러므로 “짐승의 표를 받은 사람들과 그 우상에게 경배하는 자들”이란 단순히 세상 사람들을 지칭한 것이 아니라 땅적 정신을 가지고 세상의 가치관으로 존재하는 것, 죄의 권세 아래에서 비진리를 좇는상태를 의미한다. 곧 교회요 성도라고 할지라도 육적 상태에 있는 우리의 모습을 말씀한 것이다.

“둘째 천사가 그 대접을 바다에 쏟으매 바다가 곧 죽은 자의 피 같이 되니 바다 가운데 모든 생물이 죽더라”(3절). “바다”로 상징되는 세상 나라는 하나님을 대적한 이 땅의 성전과 같다. 그러기에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견주어 보았을 때 이미 죽은 상태에 있음이 드러났다. “모든 생물이 죽더라”라는 표현은 바다가 그 역할을 하지 못한다는 것이고 그것은 곧 바다가 없어진다는 뜻이다. 8:9의 둘째 나팔 재앙에서 바다 생물들의 삼분의 일이 죽지만 대접 재앙에서는 바다 가운데 모든 생물이 다 죽기 때문이다. 그래서 “죽은 자의 피 같이 되니”라는 말씀은 비진리를 좇는 그것 자체가 죽음이라는 의미이다.

일곱 인을 떼시는 것이나 일곱 나팔을 통해 보았던 것처럼 하나님께서 과거에 행하신 일을 근거로 말씀하신 것인데 곧 출애굽 때 하나님께서 내리신 재앙을 반영한다. 첫째 대접은 애굽에 내려진 여섯 번째 악성 종기 재앙을, 둘째 대접 역시 애굽에서 물이 피가 되는 첫 번째 재앙의 반영이다.

애굽의 재앙은 단순히 이스라엘을 억압하고 고통스럽게 하는 애굽을 징계하고 이스라엘을 구해내기 위한 것이 아니었다. 왜냐하면 이스라엘이 애굽의 종이 된 것은 이미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신 하나님의 계획이었다(창 15:13-14). 하나님의 언약에 의해 이스라엘이 애굽의 종이 되었고 모세를 보내서 이스라엘을 구출하셨다. 그러기에 애굽의 재앙을 단지 이스라엘의 구출을 위한 것으로만 이해한다면 하나님은 참으로 번거로운 방법을 사용하셨다. 왜냐하면 애초부터 이스라엘을 애굽의 종이 되지 않게 하시든지 아니면 체제 전복을 일으켜 애굽을 지배하도록 만들어 주시면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렇게 하시지 않고 이스라엘을 애굽의 종이 되게 하시고 바로의 마음을 완악하게 버려두심으로 이스라엘을 순순히 보내지 않도록 하면서 재앙을 내리시는 모든 과정에는 하나님의 의도가 있었다. 한 마디로 그것은 여호와 하나님이 어떤 분이며 그에게 속하여 언약을 맺은 하나님의 백성은 어떤 존재인가를 보여주시기 위해서이다. 이스라엘이라고 해서 모두 하나님의 백성이 아니다. 애굽 사람이라고 해서 더 악하고 이스라엘 사람이라고 해서 덜 악한 존재가 아니다.

그래서 처음 세 재앙은 이스라엘과 애굽에 구분이 없이 주어졌으나 네 번째 재앙부터는 이스라엘과 애굽이 구분되어 주어진다(출 9:22). 결국 이것은 이스라엘도 애굽과 같은 존재로 취급을 받았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고 나중에 구별된 재앙 속에서 이스라엘은 애굽의 징벌을 보면서 하나님께서 무엇을 말씀하시려는가를 생각해야 되었던 것이다.

애굽 사람들은 전적으로 자신들이 일해서 얻은 소산물을 의존하였다. 이는 이스라엘이라고 해서 예외가 아니었다. 그래서 그들은 나중에 광야에서 애굽적 삶의 모습을 드러내고 하나님을 원망하였던 것이다. 이런 점에서 하나님은 애굽인이 의존하는 소산물을 공격하신다. 그들이 의존하며 신과 같이 여기는 모든 것들을 치셨다. 그들이 의존하는 것을 건드리심으로 생명의 근원이 하나님께 있음을 이스라엘에게 보여주셨다. 결국 재앙을 통해 자신의 힘과 노력으로 생명을 유지하고 지킬 수가 있다는 죄성을 가진 인간들이 심판받아야 할 대상이며 원수가 된다는 사실을 보여주셨다. 비록 이스라엘이라 할지라도 애굽적 마음을 버리지 못한다면 그들 역시 애굽과 같은 하나님의 대적이요 재앙을 받아야 할 원수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주어진 것이 열 번째 재앙이다. 어린 양의 피를 문에 바르지 않으면 살아날 수 없었다. 어린 양의 피 안에서만 생명이다. 이제 누구든 생명의 근원을 애굽과 같이 자신의 힘으로 거둬들인 세상의 소산물에 두는 것이 아니라 어린 양의 피에 두는 마음으로 바뀐다면 그가 곧 하나님의 백성이고 이스라엘이다. 이렇게 하심으로 하나님은 유월절 어린 양의 정신이 계속 이어지는 이스라엘만을 참된 이스라엘로 인정을 하신다. 이스라엘은 애굽에 내려진 재앙을 통해 새롭게 탄생 된 공동체가 바로 광야 교회이다(행 7:38). 이런 차원에서 하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나는 너희의 하나님이 되려고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여호와라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레 11:45)

 

7 너희는 스스로 깨끗하게 하여 거룩할지어다 나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이니라 8 너희는 내 규례를 지켜 행하라 나는 너희를 거룩하게 하는 여호와이니라 … 26 너희는 나에게 거룩할지어다 이는 나 여호와가 거룩하고 내가 또 너희를 나의 소유로 삼으려고 너희를 만민 중에서 구별하였음이니라(레 20:7-8, 26)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무조건 거룩하라고 명령하신 것이 아니었다. 이 말씀은 애굽에서 건져 내신 후에 하신 말씀이다. 즉 애굽에서 스스로 빠져나오도록 하신 것이 아니었고 애굽에서 구원해 내신 이후에도 어떤 목표 지점을 주시면서 거기까지 찾아오라는 것이 아니었다. 애굽에서 구원하신 후에 거룩하라고 하셨기에 하나님 자신과 같은 상태에 있음을 말씀하신 것이다. 그렇다면 이 말씀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거룩하게 만드시겠다는 뜻이다. 그래서 “나는 너희를 거룩하게 하는 여호와니라”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이렇게 보자면 “내 규례를 지켜 행하라”라는 것은 행동으로 지켜서 거룩하게 되라는 것이 아니라 이미 거룩하게 하신 분께 속해 있기에 말씀을 마음에 품고 새기는 것을 통해 거룩하신 분께 속하여 있음이 드러나야 한다는 말씀이다. 그래서 언약을 배반하는 이스라엘을 향해 하나님께서 선지자들을 통해 이렇게 말씀하셨다.

 

그 정사와 평강의 더함이 무궁하며 또 다윗의 왕좌와 그의 나라에 군림하여 그 나라를 굳게 세우고 지금 이후로 영원히 정의와 공의로 그것을 보존하실 것이라 만군의 여호와의 열심이 이를 이루시리라(사 9:7)

 

이는 남은 자가 예루살렘에서 나오며 피하는 자가 시온 산에서 나올 것임이라 만군의 여호와의 열심이 이를 이루시리이다(사 37:32)

 

이 말씀을 신약에서는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15 내가 비옵는 것은 그들을 세상에서 데려가시기를 위함이 아니요 다만 악에 빠지지 않게 보전하시기를 위함이니이다 16 내가 세상에 속하지 아니함 같이 그들도 세상에 속하지 아니하였사옵나이다 17 그들을 진리로 거룩하게 하옵소서 아버지의 말씀은 진리니이다 18 아버지께서 나를 세상에 보내신 것 같이 나도 그들을 세상에 보내었고 19 또 그들을 위하여 내가 나를 거룩하게 하오니 이는 그들도 진리로 거룩함을 얻게 하려 함이니이다(요 17:15-19)

 

결국 이스라엘을 거룩하게 만드시겠다고 하신 하나님께서 자기 열심으로 이루어 내신 것이 예수 그리스도와 한몸된 교회로 만드시는 것이고 그것이 언약의 완성이다. 애굽에 내려진 열 재앙을 통해 거룩한 자와 거룩하지 못한 자, 곧 산 자와 죽은 자를 구분하신 것처럼 오늘날도 동일하게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이렇게 이루어 내신다.

이런 점에서 오늘 본문도 애굽에 내려진 재앙과 결코 무관하지 않다. 애굽의 재앙을 통해 어린 양의 피로 인해 이스라엘이 탄생한 것처럼 하나님의 진노가 쏟아진 이 땅의 거룩한 공동체, 산 자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탄생한 교회이다. 그렇다면 대접을 쏟으심으로 자기 백성들, 곧 예수 그리스도와 한몸된 교회를 구별해 내심이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와 한몸된 교회요 성도는 하나님의 열심에 의해 어린 양 예수 그리스도의 피만 남기시는 재앙임을 아는 자이다. 두려움 가운데서 미래를 대비하고자 하는 자가 아니라 날마다 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 죽는 것으로 일곱 교회임을 드러내는 마음으로 사는 자들이다(20231119 강론/주성교회 김영대 목사).

 

계60.1601-03 첫째와 둘째 대접(20231119).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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