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2. 요한계시록 14:6-7 영원한 복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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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계시록 강론 52
요한계시록 14:6-7
영원한 복음
짐승의 표와 대조하여 하나님의 인을 맞은 자들, 곧 십사만 사천은 하늘에서 나는 소리가 진리의 말씀으로 들렸기에 그에 대한 화답으로 새 노래를 하는 자들이다. 곧 여자와 더불어 더럽히지 않은 순결한 자들이며, 어린 양이 인도하는 대로 따라가며, 속량함을 받아 처음 익은 열매로 하나님과 어린 양에게 속한 자들로 그 입에 진리를 가진 흠이 없는 자들이다. 그러므로 새 노래란 시온산에 서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새롭게 된 자들이 부르는 승리의 노래이다.
“또 보니 다른 천사가 공중에 날아가는데 땅에 거주하는 자들 곧 모든 민족과 종족과 방언과 백성에게 전할 영원한 복음을 가졌더라”(6절). “또 보니”라는 말의 헬라어 ‘카이 에이돈’은 ‘그리고 나는 보았다’라는 말인데 새로운 장면의 전환이나 주요 장면으로 새롭게 등장하는 일에 집중하도록 하기 위해 확실하게 보았음을 강조한 표현이다. 6절에서 장면이 전환되어 세 천사를 통해 복음이 선포되는 내용을 말씀한다. 요한 사도가 본 것은 다른 첫 번째 “천사가 공중에 날아가는” 것이었는데 이는 땅에 있는 모든 자들이 다 보도록 하기 위함이다.
“거주하는”이라는 말 ‘카데마이’는 13:8과 12절의 “땅에 사는 자들”과 14절의 “땅에 거하는 자들”이라는 말 ‘카토이케오’(거주하다, 정착하다)와는 조금 다른 표현으로 왕이 권력을 상징하는 자리에 앉거나 재판관이 판결을 위해 앉는 것, 또한 랍비나 회당장이 가르치기 위해 앉는 권위 있는 자세를 가리킨다(참고 마 23:2). 예수님께서 앉아서 가르치셨다는 표현으로 많이 사용되었다(마 13:1, 24:3, 요 6:3 등). 이런 점에서 “땅에 거주하는 자들”이란 땅적 사상과 원리를 가르친다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 성경에는 “땅에 거주하는 자들 곧 모든 민족과 종족과 방언과 백성에게”라고 번역하였는데 “곧”이라고 하여 땅에 거주하는 자들에 대한 앞의 말을 반복하여 설명하는 모든 민족과 종족, 방언, 백성으로 이해되기 쉽다. 그러나 여기서 “곧”이라는 말의 헬라어 ‘카이’는 ‘그리고’라는 뜻으로 앞의 땅에 거주하는 자들과 모든 민족을 다른 뜻으로 쓰고 있다는 것이다.
정리하자면 “땅에 거주하는 자들”이란 땅에 속하여 땅적 사상과 원리를 가르치는 것인데 이스라엘, 유대인들이 이방 나라와 백성들에게 짐승의 정신이나 표, 곧 율법적 행위가 믿음의 증거라고 가르쳤음을 지칭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따라서 이미 앞에서 일곱 교회에 말씀하실 때 “자칭 유대인이라 하는 자들”(2:9, 3:9)이나 “자칭 선지자라 하는 여자 이세벨”(2:20), “니골라 당의 행위나 교훈”(2:6,15)은 “사탄의 회당”(2:9, 3:9)이고 “사탄의 권좌가 있는 데”(2:13)라고 말씀하였던 것이다.
“전할”이란 말의 ‘유앙겔리조’란 ‘좋은 소식을 선포하다’라는 뜻이다. 그렇다면 유대인이나 이방 모든 민족에게 선포된 “영원한 복음”을 구체적으로 “그가 큰 음성으로 이르되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그에게 영광을 돌리라 이는 그의 심판의 시간이 이르렀음이니 하늘과 땅과 바다와 물들의 근원을 만드신 이를 경배하라 하더라”(7절)라고 말씀한다. “큰 음성으로”라는 표현은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한다는 의미이다. 하나님의 말씀이 큰 음성으로 선포된다는 것은 땅에서 짐승의 표를 진리로 가르치는 자들에게 다 듣도록 하려는 의도가 있음을 볼 수 있다.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 보내심을 받은 천사가 날아가며 큰 소리로 외치는 것은 그가 전하는 메시지가 대단히 중요할 뿐만 아니라 긴박한 메시지임을 느끼게 한다.
“영원한 복음”은 시간을 초월한 것이라는 뜻이다. 즉 시간 개념이나 공간 개념이 없다. 그러기에 복음은 인간들이 만들어 내거나 전파하여 어떤 결과를 이루어 낼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복음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친히 이루시고 은혜로만 전파되어 그 결과를 만들어 내신다는 의미가 담겨 있다.
23 너희가 거듭난 것은 썩어질 씨로 된 것이 아니요 썩지 아니할 씨로 된 것이니 살아 있고 항상 있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되었느니라 24 그러므로 모든 육체는 풀과 같고 그 모든 영광은 풀의 꽃과 같으니 풀은 마르고 꽃은 떨어지되 25 오직 주의 말씀은 세세토록 있도다 하였으니 너희에게 전한 복음이 곧 이 말씀이니라(벧전 1:23-25)
“영원한 복음”을 본문에서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그에게 영광을 돌리라”라는 것과 “하늘과 땅과 바다와 물들의 근원을 만드신 이를 경배하라”라는 것으로 말씀한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영광을 돌리는 삶을 산다고 살았다. 또한 오늘날 대부분의 교인은 그렇게 살려고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말씀한다는 것은 이제까지 인간들이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영광 돌린다고 한 모든 것이 영원한 복음이 아니기에 하나님이 거부하셨다는 뜻이다. 요한복음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다.
41 나는 사람에게서 영광을 취하지 아니하노라 42 다만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너희 속에 없음을 알았노라 43 나는 내 아버지의 이름으로 왔으매 너희가 영접하지 아니하나 만일 다른 사람이 자기 이름으로 오면 영접하리라 44 너희가 서로 영광을 취하고 유일하신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영광은 구하지 아니하니 어찌 나를 믿을 수 있느냐(요 5:41-44)
사람에게서 영광을 취하지 아니하신다는 것은 사람에게서 하나님의 영광을 볼 수 없다는 뜻이다. 이런 점에서 영광의 출처는 하나님이라고 밝히신 것이다(요 7:18, 13:32, 17:22, 24). 아버지가 아들에게 주신 것이기에 하나님 아버지의 영광이 곧 독생자의 영광이라고 말씀하셨고 거기에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다고 하셨다(요 1:14). 그래서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앞두고 이렇게 말씀하셨다.
23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인자가 영광을 얻을 때가 왔도다 24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요 12:23-24)
이 말씀을 통해 보자면 예수님은 자신의 십자가 죽음으로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게 드러나는 것을 영광이라고 말씀하셨다(참고 7:39). 결국 하나님의 영광이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으로 자기 백성들과 하나 되는 것이라고 요한복음 17장에서 잘 밝혀준다.
21 아버지여,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 같이 그들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 세상으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믿게 하옵소서 22 내게 주신 영광을 내가 그들에게 주었사오니 이는 우리가 하나가 된 것 같이 그들도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이니이다 23 곧 내가 그들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어 그들로 온전함을 이루어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은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과 또 나를 사랑하심 같이 그들도 사랑하신 것을 세상으로 알게 하려 함이로소이다(요 17:21-23)
오직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됨이 하나님께 영광이다. “두려워하며”라는 말의 ‘포베오’는 두려워한다고도 번역할 수 있지만 ‘놀라다, 존경하다, 경외하다’라는 뜻이 있다. “돌리라”라는 말은 ‘디도미’로 ‘넘겨주다’라는 뜻이다. 따라서 하나님을 단순히 두려워한다기보다 경외하는 마음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은혜로 받은 영광을 다시 하나님께 넘겨드리는 것이다. 그것이 “하늘과 땅과 바다와 물들의 근원을 만드신 이를 경배”하는 것이다. 우리 성경에 “경배”라고 번역하였는데 ‘프로스퀴네오’는 ‘예배하다, 경배하다’라는 뜻이다.
23 아버지께 참되게 예배하는 자들은 영과 진리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아버지께서는 자기에게 이렇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24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영과 진리로 예배할지니라(요 4:23-24)
“영과 진리로 예배할 때”란 오직 성령의 이끌리심을 받는 예수 그리스도만 진리이시기에 십자가 죽음의 때를 의미한다. “영과 진리로 예배할지니라”라는 말씀에서 우리 성경에는 분명히 드러나지 않지만 정확하게 표현하면 ‘반드시 영과 진리로 예배할지니라’라는 말이다. 그렇다면 영과 진리로 예배하게 된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에 동참되는 것이다.
어린 양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이렇게 영원한 복음 안에서 하나가 되고 하나님께 예배하게 되는 이유는 “이는 그의 심판의 시간이 이르렀음이니”라고 밝히고 있다. “이르렀음이니”라는 말의 ‘엘코마이’는 ‘오다, 나타나다’라는 뜻이다. 즉 심판의 때가 다 드러났다는 뜻이다. 이런 점에서 “하늘과 땅과 바다와 물들의 근원”이란 창조를 통해 드러내신 진리의 근원이신 하나님이 곧 예수 그리스도이시고 만드신 분이기에 파기하실 수 있다는 의미이다.
많은 사람이 본문을 잘못 이해하여 환상과 현실을 착각하여 혼동한다. 말세가 임박하면 하나님이 천사를 보내어서 인류에게 회개를 촉구하며 놀라운 은혜를 특별하게 베풀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이 환상은 이미 살펴본 것처럼 장차 특정한 시공간에 천사가 나타나서 전 인류를 향해서 회개하라고 소리치는 일이 있을 것이라는 말씀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영원한 복음”, 즉 십자가로 이미 복음의 본질을 다 드러내셨다. 그러기에 더 이상 초현실적인 일이나 놀라운 기적으로 복음을 믿도록 부르시는 일은 없다.
누가복음 16장에 보면 거지 나사로는 죽어서 아브라함의 품에 안기고 부자는 음부의 고통 중에 있었다. 부자는 자기 집의 형제 다섯에게 나사로를 보내어 이렇게 고통받는 곳에 오지 않도록 해 달라고 구한다. 그렇지만 그것은 불가능한 것이었다. 불가능하기에 안 되는 것이 아니라 죽은 나사로가 살아서 다시 돌아가 부자의 형제들에게 전한다고 할지라도 듣지 않을 것이라는 의미이다. 아브라함이 부자에게 말한 것으로 표현된 성경의 말씀은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29 아브라함이 이르되 그들에게 모세와 선지자들이 있으니 그들에게 들을지니라 30 이르되 그렇지 아니하니이다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만일 죽은 자에게서 그들에게 가는 자가 있으면 회개하리이다 31 이르되 모세와 선지자들에게 듣지 아니하면 비록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는 자가 있을지라도 권함을 받지 아니하리라 하였다 하시니라(눅 16:29-31)
더 이상의 어떤 여지는 없다. 여기서 “모세와 선지자들이 있으니 그들에게 들을지니라”라는 표현은 모세와 선지자가 살아 있다는 말이 아니라 그들이 이미 나사로가 되어 기록된 말씀으로 주셨다는 뜻이다. 기록된 말씀을 듣지 않는다면 죽은 나사로가 살아서 증거한다고 할지라도 회개하지 않는다는 의미이다. 마찬가지로 오늘날 기록된 성경 말씀이 주어져 있는데 이 말씀들을 믿음으로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아무리 천사가 가서 전하며 이적으로 하나님의 증거들을 나타낸다고 할지라도 듣지 않을 것이다. 그러기에 하나님께서는 결코 그런 식으로 일하시지 않는다.
오늘날 한국교회는 이런 것에 현혹된 가짜 교회라는 것을 여실히 드러낸다. 천국 갔다 왔다는 간증이 난무하고, 엄청난 많은 시간의 투자는 기도 응답을 이루는 열쇠이고, 지극한 정성과 경건한 마음으로 하는 예배는 하나님을 감동시키는 것이라는 거짓을 남발하며, 놀라운 이적들이 하나님께서 보여주신 믿음의 증거라고 사기를 친다. 그러나 이 모든 것들은 “영원한 복음”과는 아무 상관이 없고 오히려 십자가를 대적하는 원수 노릇이다.
18 내가 여러 번 너희에게 말하였거니와 이제도 눈물을 흘리며 말하노니 여러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느니라 19 그들의 마침은 멸망이요 그들의 신은 배요 그 영광은 그들의 부끄러움에 있고 땅의 일을 생각하는 자라 20 그러나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 거기로부터 구원하는 자 곧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노니 21 그는 만물을 자기에게 복종하게 하실 수 있는 자의 역사로 우리의 낮은 몸을 자기 영광의 몸의 형체와 같이 변하게 하시리라(빌 3:18-21)
(20230917 강론/주성교회 김영대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