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주제 강론/십계명(열 말씀) & 언약

언약의 열 말씀 강론 01_출애굽기 19:1-6 하라와 하지 말라

불편한 진리 2023. 5. 31. 13:54

https://www.youtube.com/live/t8toqQKZEsU?feature=share 

 

 

 

언약의 열 말씀 강론 01

출애굽기 19:1-6

하라와 하지 말라

 

인간이 구원을 얻는 방법은 둘 중의 하나이다. 율법을 행위로 완전하게 지키는 것 아니면 예수 그리스도의 믿음을 선물로 받는 것이다. 야고보서 2:10의 “누구든지 온 율법을 지키다가 그 하나를 범하면 모두 범한 자가 되나니”라는 말씀을 통해 보면 율법을 완벽하게 지켜 온전한 자가 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그렇다면 예수 그리스도의 믿음을 선물로 받는 것 외에는 다른 길이 없다. 이것 역시 우리 쪽에서는 불가능한 것이기에 하나님의 언약에 근거하여 은혜로 주신다고 말씀한다. 그러므로 율법 역시 언약의 관점에서 보지 않으면 은혜로 허락하시는 생명을 우리는 확인할 수 없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언약을 받은 것은 장정만 약 60만 명이나 되는 나라로 번성하여 출애굽을 한 것은 야곱이 70명의 가족을 이끌고 애굽에 내려간 이후(창 46:1-27) 430년이 지난 때였다(출 12:37-40). 두 달 만에 신 광야를 지나 시내 광야에 도착하여 약 1년을 거하는데 여기서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해 이스라엘과 언약을 맺으시며 율법을 주셨다. 이렇게 이스라엘이 출애굽하게 된 것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주신 언약에 기인한 것이었다(창 15:13-14). 하나님의 언약에 기인하였다는 것은 이스라엘이 스스로 탈출할 수 없었다는 뜻이다. 그래서 언약을 주신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이스라엘은 자기들이 행동으로 지켜야 할 율법으로 이해하였기에 창세기에서 신명기까지의 모세오경을 ‘토라’라고 하였고 613개의 법 조항으로 만들었다. 그런데 실제로 613개의 계명에 따른 구체적인 실천 사항들까지 규례로 나열한다면 수천 개가 된다. 대부분의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런 구체적이고 실제적인 조항들을 하나하나 다 지키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대로 사는 것으로 생각하였다. 그러면 언약의 관점에서 하나님의 의도는 어떤 것일까?

이스라엘을 구원하신 것은 제사장 나라로 삼으시기 위한 것이었다. 세계가 다 하나님께 속한 것이만 이스라엘을 소유로 삼으신다는 것은 언약을 위한 선택이라는 의미이다. 5절에서 “너희가 내 말을 잘 듣고 내 언약을 지키면”이라고 하였는데 히브리어로 “듣고”는 ‘샤마’이고 “지키면”은 ‘샤마르’인데 이 말의 명령형이 ‘쉐마’이다. 신명기 6장에서 ‘쉐마 이스라엘’(들으라! 이스라엘아!)이라는 말씀이다.

 

4 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유일한 여호와이시니 5 너는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 6 오늘 내가 네게 명하는 이 말씀을 너는 마음에 새기고 7 네 자녀에게 부지런히 가르치며 집에 앉았을 때에든지 길을 갈 때에든지 누워 있을 때에든지 일어날 때에든지 이 말씀을 강론할 것이며 8 너는 또 그것을 네 손목에 매어 기호를 삼으며 네 미간에 붙여 표로 삼고 9또 네 집 문설주와 바깥 문에 기록할지니라(신 6:4-9)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는 것을 말씀을 마음에 새기는 것이라고 하셨다. 우리 성경에 “이 말씀을 너는 마음에 새기고”라고 번역하였데 직역하면 ‘마음이 말씀이 되라’라는 말이다. 즉 언약의 말씀이 되는 것이 여호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다. 마음에 새기기 위하여 말씀을 자녀에게 부지런히 가르치고 강론하는 것이며 또한 그것을 손목에 매고 미간에 붙이며 문설주와 바깥 문에 기록하라고 하셨다. 즉 주된 본질은 마음이 말씀이 되는 것이지 가르치고 기록하는 행위가 중요한 것이 아니다. 들리지 않으면 그들의 마음이 말씀이 될 수 없다. 따라서 ‘샤마’ 즉 알아듣는 것이 순종이다(삼상 15:22).

마태복음 19:16-22에 보면 한 부자 청년이 예수님을 찾아와 “내가 무슨 선한 일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라고 묻는 물음에 “네가 생명에 들어가려면 계명들을 지키라”라는 것이 예수님의 답변이었다. 그러자 부자 청년은 “이 모든 것을 내가 지키었사온대 아직도 무엇이 부족하니이까?”라고 다시 묻는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네가 온전하고자 할진대 가서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라고 말씀하신다. 부자 청년이 예수님께 물은 것은 영생을 취하는 행위에 대한 것이었다. 그러나 예수님은 하나님 한 분만이 선하고 온전하시다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부자 청년이 아무리 율법을 잘 지켰다고 하나 온전할 수 없다는 선언이었다. 율법이 부자 청년을 온전하게 만들어 주지 못했다면 무엇이 문제인가? 하나님께서 주신 율법이기에 거룩하고 의로우며 선한 것이므로 율법이 죄가 아니다(롬 7:7-12).

여기서 문제는 부자 청년의 말과 예수님의 말씀에서 ‘지킨다’라는 말이 서로 달랐다. 헬라어로 부자 청년의 표현은 ‘퓔랏소’(20절)인데 ‘퓌오’(나오다, 자라다)에서 온 말로 ‘꺼내 놓다’, ‘만들어 내다’, ‘밖으로 보여주다’라는 말이고 예수님의 표현 ‘테레오’(17절)는 ‘안으로 간직하다’, ‘마음에 새기다’라는 뜻이다. 우리말에도 지킨다는 말을 ‘어떤 말이나 명령에 대한 것을 행위로 지켜 드러낸다’라는 뜻과 ‘소중한 것을 잃지 않도록 지킨다’라는 두 가지 의미로 생각할 수 있다. 그런데 예수님이 말씀하신 것은 마음에 품고 새긴다는 뜻이다. 즉 계명(말씀)을 마음으로 간직하고 새겨야 한다는 것이었으나 부자 청년은 자신이 율법을 열심히 지키며 행동으로 옮긴 것을 예수님 앞에 꺼내 자랑하고 있었다.

그래서 “네가 온전하고자 할진대 가서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21절)라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여기서 “가난한 자”(헬 ‘프토코스’)란 절대적인 가난으로 남의 도움 없이는 살 수 없는 존재를 의미한다. 이런 점에서 예수님의 말씀은 가지고 있는 재물을 팔아서 물질적으로 가난한 자에게 나누어 주라는 말씀이 아니라 네 속에 온전한 진리의 말씀이 있다면 심령이 가난한 자들에게 진리의 말씀을 나누고 흘려 주라는 것이었다.

결국 부자 청년은 영적으로 갈급한 가난한 자들에게 나누어 줄 진리의 말씀이 자기 안에 없었기에 나누어 줄 수 없었다. 율법을 다 지켰다고 하였지만 그것은 다른 사람들 앞에 보여주기 위한 것에 불과했지 결코 율법으로 온전하게 될 수 없다는 것, 즉 율법을 완전하게 지켜서 영생에 들어가지 못하는 존재임을 스스로 증명하고 말았다. “그 청년이 재물이 많으므로 이 말씀을 듣고 근심하며 가니라”(22절)라고 하였는데 직역하면 ‘그 청년이 그 말씀을 떠났다’라는 말이다. 부자 청년이 예수님의 말씀을 듣긴 들었으나 진리의 말씀이신 예수님으로 들리지 않았기에 떠날 수밖에 없었다. 이 말씀은 어떤 특정한 사람의 이야기가 아니라 부자 청년을 통해 당시 율법에 매인 유대인들의 상태를 폭로하신 것이었다. 유대인들이 그러하다면 죄의 권세에 매여 율법을 온전히 지킬 수 없는 모든 사람의 실상이라는 의미이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언약을 ‘하라’와 ‘하지 말라’라는 율법으로 주셨을까? ‘십계명’(일단 편의상 십계명이라고 쓰겠다)은 애굽에서 구원받은 이스라엘에게 주어진 것이기에 ‘하지 말라’라는 계명으로 그들이 과거에 어떤 형편에 있었는지 밝혀진다.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보고 들은 것에 대하여 그와 같은 것을 하지 말라는 식이다. 그러므로 부정적인 명령은 ‘죄악 된 애굽’과 관련되어 있다.

이스라엘이 애굽 땅에서 나올 수 있는 근거가 무엇인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자기 백성으로 택하신 것은 그들이 의롭다거나 수효가 많아서 택하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의 언약 때문이었다(신 7:6-8).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나왔다고 해서 그들의 죄악에 대한 심판이 없어진 것은 아니다. 잠시 유보된 상태일 뿐이다(출 15:26, 신 7:9-11). 어린 양의 희생이 이스라엘에 대한 심판을 안고 있는 것이었다. 이런 점에서 출애굽 한 백성들에게 주어진 것이 십계명이다.

이제 이스라엘은 유월절을 통해 어린 양으로 인해 구원받았음을 알아야 하고, 또한 십계명을 통하여 자신들이 어디서부터 구원되었는가를 알아야 한다. 단순히 지리적인 의미의 애굽 땅에서라든지 정치적인 의미에서의 속박이 아니라 ‘하지 말라’라는 죄악의 항목에 속박되어 있었던 것이고, 출애굽이란 죄의 권세에서 벗어난 것이다. 그렇다면 애굽에서 나온 이스라엘은 지금 어디로 가야 하는가?

광야가 그들의 목표는 아니었다. 그 방향은 십계명에 있는 두 개의 ‘하라’라는 말씀으로 밝혀진다. 따라서 ‘하라’라는 것은 이스라엘이 가야 할 ‘가나안 땅’과 관련되어 있다. 이스라엘의 구원이 단순히 지리적인 장소의 애굽이 아니라면 이스라엘이 들어가고자 하는 곳도 지리적인 장소의 가나안이라는 의미를 넘어선다. 이런 점에서 이스라엘을 자신의 처소로 삼으시는 하나님과 함께 거하는 것이고 그것이 바로 안식이다.

그러면 왜 하나님께서 5계명을 통해 “네 부모를 공경하라”라고 말씀하셨는가?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살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의 구속에 의해서이고 이 구속을 직접 체험한 자로서 증거할 자는 부모이다(출 12:26-27, 13:14). 부모들은 이 구속에 근거해서 말씀을 자녀들에게 가르친다. 이때 부모는 자녀들에게 하나님과 같이 존재이다. 이렇게 하여 보여주는 것이 4계명에서 밝혀주고 있는 “안식”이다. 따라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가나안이란 하나님께서 홀로 일하신 결과로 주어지는 안식이요, 하나님 왕국이다. 그것을 도표로 표현하면 다음과 같다.

 

 

예수님께서 부자 청년에게 말씀하셨듯이 행위로 무엇인가 하여 영생을 취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에 새기는 것이라고 밝히셨듯이 하나님께서 십계명을 통해 보여주고자 하신 것은 바로 이것이다. 계명으로 받아 행위로 지켜야 하는 것이 아니라 말씀이 담고 있는 의미는 마음에 새기게 하여 안식을 누리게 하시는 것이었다. 이것이 하나님의 언약이다. 결국 언약의 말씀이 이스라엘을 제사장 나라로 거룩한 백성으로 만드신다는 의미이다. 그래서 이미 언약에 의해 이스라엘을 구원하신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이제 확인해야 하는 것은 언약의 말씀이 보여주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가?

 

그러나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 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라(벧전 2:9)

 

베드로 사도는 출애굽기 19:6의 말씀을 그대로 인용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성도들에 대하여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이며 거룩한 나라로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라고 선언한다. 어떻게 이것이 가능하게 되었는가? 베드로는 2:4에서 하나님의 택하심을 입은 산 돌이신 예수 그리스도에 의한 것으로 설명한다. 하나님께서 산 돌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시니 어떤 자들에게는 걸려 넘어지는 돌이 되나 너희(성도)들에게는 건축자들의 버린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다고 선언한다.

걸려 넘어지는 자들은 말씀을 순종하지 아니함으로 넘어졌다고 하였다(벧전 2:8). 여기서 순종하지 않았다는 말의 의미는 ‘말을 알아듣지 못한 상태’, ‘설득을 당하지 않는 상태’를 말한다. 하나님의 언약의 말씀을 이해하지 못하여 설득 당하지 않으려고 하는 완악한 마음, 즉 죄의 권세 아래 있는 인간의 상태를 말씀한다. 그러므로 누구나 다 예수 그리스도를 보고 그분께 나아간다고 하지만 산 돌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긍휼에 의해 받은 자는 걸려 넘어지는 돌이 아니라 산 돌로 받아 그 돌이 모퉁이돌 즉 기초가 되어 예수 그리스도로 집이 지어지나 하나님의 긍휼을 입지 못한 자에게는 걸려 넘어지는 돌이 될 수밖에 없다.

베드로 사도가 2장에서 왜 갑자기 출애굽기 19장의 말씀을 그대로 인용하면서 예수님을 돌로 설명할까? 그것은 바로 출애굽 당시 십계명 돌판을 주신 것(출 31:18, 34:1-9)을 배경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설명하려고 하였기 때문이다. 십계명 돌판을 언약의 말씀으로 이해하지 못하고 오직 자기 행위로 지켜내려고 하는 자들에게는 걸려 넘어지는 돌이 되나 언약의 말씀을 마음에 담고 새기라는 하나님의 말씀에 설득되고 굴복된 자는 그 돌판이 의미하고 가리키는 분이 바로 산 돌이신 예수 그리스도이심을 알게 된다. 그래서 하나님의 긍휼을 입은 자는 구약 시대에서도 십계명을 단순히 돌판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앞으로 오실 언약의 말씀이신 메시아로 보게 된다. 오늘날 우리도 역시 십계명 돌판이 언약의 말씀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로 알아듣는 자는 십계명을 행위로 지키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에서 대속의 죽음을 이루신 예수 그리스도의 믿음을 받는 은혜로 주어진다(20230531 강론/주성교회 김영대 목사).

 

언약의 열 말씀 강론 01_출1901-06 하라와 하지 말라(20230531).pdf
0.13MB