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약강론/요한계시록

35. 요한계시록 8:12-13 넷째 나팔

불편한 진리 2023. 5. 7. 17: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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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계시록 강론 35

요한계시록 8:12-13

넷째 나팔

 

골로새서에 보면 만물이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 창조되었다고 선언한다. 만물은 만물보다 먼저 계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 섰다고 하였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가 교회의 머리요 만물의 으뜸이라고 말씀한다(골 1:15-18). 다시 말해서 창조는 단순히 하나님께서 세상을 어떻게 지었고 사람이 지음받은 것은 창조주 하나님을 섬기라고 한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위한 것이다. 그렇다면 본문에서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것들이 제 기능을 상실하는 내용을 언급하고 있다는 것은 단순히 자연적인 현상이 어떻게 되는가를 말씀한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라는 복음을 설명하기 위한 것임을 알아야 한다. 요한계시록은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1:1)라는 선언으로 시작하기 때문이다.

“넷째 천사가 나팔을 부니 해 삼분의 일과 달 삼분의 일과 별들의 삼분의 일이 타격을 받아 그 삼분의 일이 어두워지니 낮 삼분의 일은 비추임이 없고 밤도 그러하더라”(12절). “타격을 받아”(헬, ‘에플레게’)라는 말은 ‘치다, 때리다’라는 뜻을 지닌 ‘플렛소’의 과거 수동태이다. 즉 ‘타격을 받았다’라는 말로 치명적인 공격을 받은 상태를 의미한다. 애굽에 내려진 재앙에 쓰인 용어이다(출 9:31-32). 넷째 천사를 통해 드러난 하나님의 말씀에 의한 심판은 해와 달과 별의 삼분의 일이 타격을 받았다는 것인데 이 모든 말씀은 창조를 통해 보여주신 하나님의 언약 안에 있는 것이다.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영은 수면 위에 운행하시니라(창 1:2)

 

“혼돈”과 “공허”와 “흑암”으로 창조를 말씀하고 그와는 대조적으로 “하나님의 영”이 일할 것을 보여주셨다. 그렇다면 ‘혼돈, 공허, 흑암’은 하나님을 알지 못하여 생명이 없는 상태를 표현하는 말이다.

 

22 내 백성은 나를 알지 못하는 어리석은 자요 지각이 없는 미련한 자식이라 악을 행하기에는 지각이 있으나 선을 행하기에는 무지하도다 23 보라 내가 땅을 본즉 혼돈하고 공허하며 하늘에는 빛이 없으며 24 내가 산들을 본즉 다 진동하며 작은 산들도 요동하며 25 내가 본즉 사람이 없으며 공중의 새가 다 날아갔으며 26 보라 내가 본즉 좋은 땅이 황무지가 되었으며 그 모든 성읍이 여호와의 앞 그의 맹렬한 진노 앞에 무너졌으니 27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길 이 온 땅이 황폐할 것이나 내가 진멸하지는 아니할 것이며 28 이로 말미암아 땅이 슬퍼할 것이며 위의 하늘이 어두울 것이라 내가 이미 말하였으며 작정하였고 후회하지 아니하였은즉 또한 거기서 돌이키지 아니하리라 하셨음이로다(렘 4:22-28)

 

하나님께서 궁창을 만드시고 궁창 아래의 물과 위의 물로 나누신 후 궁창을 하늘이라고 부르셨다. 그리고 넷째 날에 궁창에 광명체들을 두시고 낮과 밤을 주관하게 하셨다. 하나님은 이러한 창조를 통해 낮은 빛의 세계요 밤은 어두움의 세계라고 말씀하셨다(창 1:5). 낮과 밤의 교체를 알려주는 물체가 하늘에 있다는 것은 먼저 빛과 어두움의 세계가 존재하고, 동시에 땅은 항상 하늘의 영향권 아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큰 광명체로 하여금 낮을 주관하고 작은 광명체로 밤을 주관하게 하심으로 단순히 밤이라는 어두움만 있는 것이 아니라 광명체가 어두움을 지배하는 형식으로 자리하고 있다. 그래서 광명체들이 하늘의 궁창에서 땅을 비추는 형태로 만드셨다(창 1:15). 그러기에 밤이 온다고 할지라도 여전히 낮은 그 속에 있고, 밝음은 항상 존재한다는 것이다. 이로써 창조를 통해 낮이나 밤이나 하나님께서 항상 지배하고 주도권을 쥐고 있는 형식으로 드러내고 있다. 그래서 이사야 선지자는 어두움도 하나님이 창조하셨다고 선포하였다(사 45:7).

그러므로 하늘은 하나님의 창조 사역을 영원히 보여주는 스크린과 같은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변함없는 낮과 밤의 교체는 하나님께서 창조하셨다는 사실을 영속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된다. 우리는 낮과 밤이 교체되는 것을 통해 하나님께서 빛과 어두움을 창조하셨고 또한 주도권을 가지고 늘 주관하신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어야 한다. 그것을 보여주는 것이 낮과 밤을 주관하게 하신 별들이다(창 1:18). 결국 별들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라는 복음을 말씀하고자 한 것이다. 이런 점에서 하늘은 이 증거를 담은 배경으로 존재한다.

하늘은 땅을 내려다보는 위치에 있다. 시편 14:2에 보면 “여호와께서 하늘에서 인생을 굽어살피사”라고 말씀하여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찾으심을 하늘에서 살피시는 것으로 표현하였다. 그러기에 땅은 계속해서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본래 목적을 수행해야 하고 그것을 온전히 드러내야 한다. 그 목적이란 다름이 아니라 어두움 속에 빛을 새겨 넣은 하나님의 창조 작업을 담아내는 일이다. 낮이나 밤이나 발광체를 통해서 말씀의 절대성을 모든 피조물에 적용시키시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다. 이런 배경으로 어두움이 임하는 것을 여호와의 날에 대한 묘사로 표현한다.

 

14 사람이 많음이여, 심판의 골짜기에 사람이 많음이여, 심판의 골짜기에 여호와의 날이 가까움이로다 15 해와 달이 캄캄하며 별들이 그 빛을 거두도다(욜 3:14-15)

 

어두움이 세상을 장악하고 있는 현상은 애굽에 내려진 흑암 재앙을 생각나게 한다.

 

21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하늘을 향하여 네 손을 내밀어 애굽 땅 위에 흑암이 있게 하라 곧 더듬을 만한 흑암이리라 22 모세가 하늘을 향하여 손을 내밀매 캄캄한 흑암이 삼 일 동안 애굽 온 땅에 있어서 23 그 동안은 사람들이 서로 볼 수 없으며 자기 처소에서 일어나는 자가 없으되 온 이스라엘 자손들이 거주하는 곳에는 빛이 있었더라(출 10:21-23)

 

여호와의 날은 심판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 심판을 통해 구원을 나타내는 말씀이다. 그렇다면 애굽은 흑암이, 이스라엘은 빛이 장악하였다는 것은 애굽은 심판의 상태이지만 이스라엘에게는 구원의 상태가 될 것을 암시하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부분적이지만 하늘의 해와 달과 별이 제 기능을 잃고 땅에 어두움이 임하게 된다는 것은 단순히 자연 현상을 가지고 말씀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어두움의 세력을 어떻게 심판하는가를 보여주시는 것이다.

 

하늘이여 위로부터 공의를 뿌리며 구름이여 의를 부을지어다 땅이여 열려서 구원을 싹트게 하고 공의도 함께 움돋게 할지어다 나 여호와가 이 일을 창조하였느니라(사 45:8)

 

하나님께서 하늘에서 의를 땅에 붓는다고 말씀하는 이유는 죄의 권세 아래 있는 땅을 심판하실 근거를 마련하시기 위해서이다. 하늘의 의와 대비해서 땅의 죄악을 심판하시겠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땅이 하늘의 의를 어떻게 수용하는가를 보여주심으로 하나님께서 땅을 심판하실 명분이 확실히 드러난다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셨다는 사실은 하늘의 의가 이 땅에 주어졌고 땅이 하늘의 의를 어떻게 대하는가를 폭로하는 것이 된다.

 

16 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시고 곧 물에서 올라오실새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성령이 비둘기 같이 내려 자기 위에 임하심을 보시더니 17 하늘로부터 소리가 있어 말씀하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하시니라(마 3:16-17)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음성이 들렸다. 많은 사람이 요한에게 세례를 받았지만 오직 예수님만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아들이라고 말씀하셨다.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신 것은 하나님의 의를 이루는 것이기 때문이다(마 3:15). 즉 예수님의 세례는 십자가 죽음을 이루시겠다는 의미이다. 그것이 바로 의이다. 결국 이사야 45:8에서 말씀하는 “의”, “공의”란 하늘에서 오시는 메시아를 지칭하는 것이며 곧 예수 그리스도를 의미한다.

예수님은 십자가 죽음과 부활로 사망의 권세를 휘두르는 사탄의 힘을 온전히 파하셨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부활은 생명으로 하늘과 땅의 권세를 온전히 장악하셨다는 증거이다. 그래서 하나님 아버지께서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마 28:18)라고 말씀하셨다. 하늘과 땅의 권세를 가지신 분이 하늘의 의를 가지고 죄악 된 땅을 심판하시는 것은 너무도 합당한 것이다.

이를 통해 분명히 보여주시는 것은 셋째 나팔을 통해 큰 별이 하늘에서 물의 근원에 떨어져 쓴 물이 되어 사람을 죽이는 것으로 비진리로 말미암아 죽임을 당하는 그 상태가 밤의 상태임을 넷째 나팔을 통해 나타내신 것이다. 땅이 하늘을 용납하고 수용할 수 없는 것은 진리가 아닌 것을 먹고 이미 죽은 상태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진리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알 수 없는 상태를 죽음, 어두움의 상태라고 말씀하는 것이다.

그래서 “내가 또 보고 들으니 공중에 날아가는 독수리가 큰 소리로 이르되 땅에 사는 자들에게 화, 화, 화가 있으리니 이는 세 천사들이 불어야 할 나팔 소리가 남아 있음이로다 하더라”(13절)라고 말씀한다. 보좌 앞의 네 생물 중에서 “그 넷째 생물은 날아가는 독수리 같은데”(4:7)라고 하였다. 독수리가 날아가는 것으로 “땅에 사는 자들에게” 삼중적 “화”를 전하는 역할을 한다. “화”란(헬, ‘우아이’) 구약에서 음행하며 우상을 섬기는 이스라엘에 대한 심판 용어이다(참고 사 5:8-23, 렘 13:27, 겔 13:18 등).

예수님께서 바리새인들에 대하여 일곱 가지 “화 있을진저”(마 23:13,15,16,23,25,27,29)라는 말씀을 하셨다. 율법에 매여 외식으로 하나님을 섬기는 것 자체가 심판 아래 있는 죄인들의 모습인 것을 적나라하게 고발하셨다. 이어서 24장에서 성전이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고 다 무너뜨려지리라”(마 24:2)라는 심판을 말씀하시면서 종말에 대하여 선언하셨다.

 

29 그 날 환난 후에 즉시 해가 어두워지며 달이 빛을 내지 아니하며 별들이 하늘에서 떨어지며 하늘의 권능들이 흔들리리라 30 그 때에 인자의 징조가 하늘에서 보이겠고 그 때에 땅의 모든 족속들이 통곡하며 그들이 인자가 구름을 타고 능력과 큰 영광으로 오는 것을 보리라(마 24:29-30)

 

이 모든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로 온전히 드러내셨다. 그렇다면 넷째 나팔을 통해 보여주시는 하나님의 말씀 역시 먼 미래에 일어날 일을 우리에게 대비하라는 차원에서 하신 말씀이 아니라 십자가로 말씀을 완성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죄의 권세 아래에서 율법에 매여 있는 자기 백성에게 임하시면 구원이 이루어진다는 말씀이다. 아직 “삼분의 일이 타격을 받아”(12절)라고 표현하고 있는 이유는 “세 천사들이 불어야 할 나팔 소리가 남아”(13절) 있기 때문이다. 시간적으로 남아 있다는 말이 아니라 아직 말씀으로 덜 보여주고 있다는 뜻이다. 다시 말해서 십자가로 말씀의 성취가 온전히 다 드러났지만 요한 사도가 아직 더 설명하고 보여주어야 할 것이 있다는 의미이다.

결국 성도란 자연 현상을 가지고 하늘의 뜻을 알려고 하는 자가 아니라 하늘의 징조를 말씀으로 이해하고 십자가로 확인할 수 있다면 자연의 현상과 상관없이 날마다 십자가에 자기가 부인되어 죽음을 통해 생명을 확인하게 된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와 한몸된 교회요 성도가 되었다는 의미는 낮이고 빛이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행한다는 뜻이다. 그것은 오직 십자가 안에서 자기 죄를 확인함과 동시에 하늘의 생명을 확인하는 은혜이다. 그 생명이 확인되어지지 않는다면 해와 달과 별이 수만 번 빛을 잃는다고 할지라도 밤의 상태에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할 뿐만 아니라 스스로 벗어날 수도 없는 것이다. 그래서 맹인을 고치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4 때가 아직 낮이매 나를 보내신 이의 일을 우리가 하여야 하리라 밤이 오리니 그 때는 아무도 일할 수 없느니라 5 내가 세상에 있는 동안에는 세상의 빛이로라(요 9:4-5)

 

(20230507 강론/주성교회 김영대 목사).

 

계35.0812-13 넷째 나팔(20230507).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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