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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 언약으로 보기 03_창세기 1:26-2:3 창조 언약

불편한 진리 2023. 3. 22. 14: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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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 언약으로 보기 03

창세기 1:26-2:3

창조 언약

 

성경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를 생각하기 위해 서론격으로 ‘하나님의 자기 계시’와 ‘하나님의 언약’에 대하여 나누었다. 하나님께서 자기 계시를 언약으로 말씀하셨고 그것을 기록된 말씀으로 주신 것이 성경이다. 그런데 하나님의 언약은 한 번만 주어진 것이 아니라 시대별로 다른 사람을 세워서 주셨다. 그렇지만 각기 다른 언약이 아니라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하나의 언약으로 주셨다. 그 각각의 언약을 구체적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처음 언약을 어떻게 설명하고 있는가를 좀 찾아보았더니 ‘창조 언약’을 다 ‘아담 언약’으로 설명하고 아담 언약은 ‘행위 언약’으로 규정하고 있었다. 이러듯 아담 언약을 행위 언약으로 보는 이유는 성경을 ‘창조, 타락, 구속’이라는 세 주제를 근간으로 하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셔서 아담에게 선악과를 먹지 않는 목표점을 주심으로 더 높은 단계의 상태가 되기를 원하셨는데 그것이 행위 언약이라고 한다. 그러나 아담은 더 높은 단계로 가지 못하고 떨어져 타락하였고 타락 이후 하나님께서 은혜로 구속하실 것을 말씀하셨는데 그것이 은혜 언약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언약을 ‘행위 언약’과 ‘은혜 언약’으로 나누어서 본다.

이렇게 본다면 문제가 무엇인가 하면 아담의 행위에 의해 결과가 좌우된다는 결론을 내릴 수밖에 없다. 아담이 선악과를 먹지 않았다면 완전한 상태로 하나님이 원하시는 높은 단계의 상태가 되는가? 어차피 그렇게 높은 단계에 이르러야 한다면 하나님께서 애초에 선악과를 만들지 말고 높은 단계의 존재로 창조하셨으면 될 문제이다. 그렇게 된다면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를 지실 이유가 없는데 이는 창세 전에 하셨다는 언약과 모순이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하신 창조 언약은 어떤 내용으로 주셨는지 본문을 통해 살펴보자.

“하나님이 이르시되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들로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가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26절). 이것이 하나님의 계획이다. 다른 말로 표현하면 하나님께서 스스로 언약을 하셨다는 뜻이다. 흔히 “우리”라는 표현을 삼위일체 하나님으로 이해하나 그것은 문맥을 무시한 뜬금없는 해석이다. 성경은 처음부터 ‘엘’이라는 단수 형태로 쓰지 않고 복수 형태인 ‘엘로힘’으로 나타낸다. 히브리서 11:3에서 창조는 말씀으로 지어졌다고 선언하였다. 그 말씀을 요한복음에서 이렇게 선언한다.

 

1 태초에 (그)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그)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2그가 태초에 (그)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3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요 1:1-3)

 

헬라어 성경에는 관사로 명확하게 그 의미를 나타내고 있다. 그 말씀이신 분이 구약에서 창조하신 그 하나님과 함께 계셨는데 그분이 하나님이라고 하였다. 구약에서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을 그 하나님이라고 하였고 함께 계셨던 하나님을 말씀이신 예수 그리스도라고 하였다. 이렇게 보자면 여기서 “우리”라고 표현한 것은 적어도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람을 만들어 다스리도록 하자고 언약을 맺으신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27절)라고 말씀한다. 즉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께서 언약을 하시고 사람을 만드셨다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26절에서 “사람을 만들고”, 27절의 “사람을 창조하시되”라는 표현에서 분명히 “사람”을 단수로 썼다. 그런데 26절에서 “그들”, 28절에서도 두 번 “그들”이라고 복수로 쓰고 있다. 즉 만드신다는 표현에서 ‘한 사람’(단수)인데 다스리게 하자는 표현에서는 ‘그들’(복수)이다.

우리 성경에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라고 번역하였는데 직역하면 ‘남자인 여자로 창조하시고’라는 말이다. ‘남자’(히, ‘자칼’)는 ‘씨 가진 존재’이고 ‘여자’(히, ‘네케바’)는 ‘씨 없는 존재’이다. 그렇다면 이 표현은 ‘씨 가진 여자’로 만드셨다는 뜻이다. 이런 점에서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셨는데 한마디로 ‘씨 가진 여자’를 하나님께서 보내셨다는 뜻이다. 그래서 속량하여 우리로 아들이 되게 하신다는 말씀이다(갈 4:4-6). 이렇게 보면 “그들”은 하나님께서 복을 주셨기에 나온 ‘그들’이다. 다시 말해서 예수 그리스도라는 복을 통해 그들이 된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형상”이란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라는 말씀을 통해 어떤 지향점을 갖고 계신다는 뜻인데 그것이 바로 “우리”이다. 한마디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자기 백성들과 하나 되는 의미에서 ‘우리’이다. “형상”이란 히브리어로 ‘첼렘’이라는 말인데 ‘그림자, 닮음’이라는 뜻으로 비유적으로는 ‘허상’을 의미한다. “모양”이란 히브리어로 ‘데무트’라는 말인데 ‘닮음, 같은 것’이라는 뜻이다. 즉 ‘그림자, 허상’을 창조하심으로 ‘닮은, 같은 존재’로 완성하시겠다는 의미이다. 그러므로 인간이라는 형상은 허상에 불과한 것이기에 진짜 형상이 와서 모양, 즉 하나님과 같은 존재로 만들어주어야 한다. 그래서 하나님의 형상이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과 같은 존재로 완성되는 것을 구원으로 설명한다(참고 고후 4:4, 골 1:13-17).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을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롬 8:29)

 

“본받게 하기 위하여”라고 번역하였는데 헬라어 ‘쉼모르포스’는 ‘같은 모양, 같은 형상’이라는 뜻이다. 이렇게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창조하신 분의 형상을 입은 존재를 ‘새 사람’이라고 하였고(골 3:10), 같은 형상으로 되는 것은 오직 성령에 의해서 완성된다(고후 3:18).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하나님이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28절a). “생육”(히, ‘파라’)이란 ‘열매를 맺다, 결실하다, 풍부하다’라는 뜻이고, “번성”(히, ‘라바’)은 ‘많다, 증가하다’, “충만”(히, ‘말레’)이란 ‘가득차다, 완성하다’, “정복”(히, ‘카바쉬’)이란 ‘다스리다’라는 뜻이다. 그러므로 이 말씀은 사람에게 주신 ‘문화명령’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열매를 맺어 땅적 존재들에게 하늘의 진리로 채우시고 다스리심으로 완성하실 것이라는 언약의 말씀이다.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28절b)라는 말씀은 땅적 존재를 총칭한 것이다. “다스리라”라는 히브리어 ‘라다’는 ‘덮어씌우다’라는 뜻이다. 명령형으로 주셨지만 인간은 이 명령을 수행할 수 없다는 것을 하나님은 전제하고 계신다. 그러기에 하나님의 형상으로 보내실 분을 하나님께서 계획하셨는데 그분이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따라서 이 말씀은 수행할 능력이 없는 우리에게 하신 말씀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늘의 은혜와 진리로 덮어씌워 다스리게 하실 것이라는 하나님의 언약이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온 지면의 씨 맺는 모든 채소와 씨 가진 열매 맺는 모든 나무를 너희에게 주노니 너희의 먹을거리가 되리라”(29절)라고 하셨다. 다스리심이 완성되기 위해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 “씨 맺는 모든 채소와 씨 가진 열매 맺는 모든 나무”이다. “씨는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하였다(눅 8:11). 그렇다면 말씀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자신을 씨로 뿌려 주셔야 양식으로 완성된다(마 13:23).

그러므로 “땅의 모든 짐승과 하늘의 모든 새와 생명이 있어 땅에 기는 모든 것”(30절)이라고 한 말씀도 역시 같은 의미로 어떻게 해서든지 땅에서 움직여 날면서 먹고 살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모든 것들, 즉 ‘씨 없는 네케바’의 상태가 짐승이요 동물이다. 이성 없는 짐승으로 진리를 담지 못하고 있는 존재들은 그저 땅에서 하늘의 생명과 상관없는 상태에 있다.

그래서 “하나님이 지으신 그 모든 것을 보시니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여섯째 날이니라”(31절)라고 말씀한다. 사람과 짐승에 대한 말씀이 혼재되어 있는 상태를 여섯째 날이라고 하셨다. 즉 ‘여섯’(6)은 하나님의 안식에 미치지 못하는 상태에 있음을 나타낸 말씀이다. 이렇게 여섯째 날까지의 창조를 통해 하나님의 언약이 드러나고 있기에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라고 하셨다.

이제 “천지와 만물이 다 이루어지니라”(2:1)라고 말씀한다. ‘완료되었다, 완성하였다, 결국에 이르렀다’라고 선언하신 것이다. “하나님이 그가 하시던 일을 일곱째 날에 마치시니 그가 하시던 모든 일을 그치고 일곱째 날에 안식하시니라 하나님이 그 일곱째 날을 복되게 하사 거룩하게 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그 창조하시며 만드시던 모든 일을 마치시고 그 날에 안식하셨음이니라”(2:2-3). “일곱째 날”(히, 욤 셰비이) 다 이루어 완성하심으로 모든 날은 “일곱째 날”을 목적으로 하고 있었다. 결국 하나님은 이 일곱째 날을 통해 하나님의 안식을 보여주시기 위해 창조하셨다.

하나님의 창조 과정에서 계속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1:5,8,13,19,23,31)라고 하였는데 일곱째 날에는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라는 표현이 없다. 더 이상 날을 세어야 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문제는 왜 ‘아침이 되고 저녁이 되니’가 아니고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라고 표현한 것일까? “저녁”이란 히브리어로 ‘에레브’인데 ‘섞다, 교환, 무역’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어둠의 시작으로 밤은 실체가 온전히 다 드러나지 않은 상태를 말한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시고 첫째 날에 “빛을 낮이라 부르시고 어둠을 밤이라 부르시니라”(1:5)라고 하였다. 이때 “낮”(히, ‘욤’)은 곧 ‘날’이다. 그래서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라는 표현은 창조의 상태가 혼돈과 공허와 어둠의 상태에서 그 어둠의 실체가 아침(낮)이 되어 온전히 다 드러날 것을 보여준다.

그러므로 “날”에는 하나님의 언약을 담고 있고 그 언약을 ‘일곱’(7)으로 나타내고 있다. 이런 점에서 성경에서 ‘칠, 일곱’이란 숫자는 하나님의 일하심, 언약의 완성을 설명하고 보여주는 숫자이다. 결국 “일곱째 날”은 여섯 날의 한 날, 한 날을 일곱 번 반복하여 표현함으로 첫째 날이 아닌 ‘한 날, 하루의 날’을 통해 낮이라는 빛이요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 되는 그것이 바로 “안식”(히, ‘샤바트’)이라는 것을 보여주시기 위한 것이었다.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주시려는 안식은 이 세상에서 있다가 없어질 그런 일시적인 쉼이나 휴식을 말씀하지 않는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더 이상 우리의 힘으로 영생을 취하려고 하는 그런 수고하지 않아도 되는 영원한 안식 그리고 여기서도 얻고 우리 육적 존재가 이 땅에서 사라져도 계속해서 누릴 수 있는 그 영원한 안식을 말씀하신다. 그것이 언약의 완성으로써 참된 안식이다. 하나님은 이것을 언약으로 계속 말씀하신다.

 

8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하게 지키라 9 엿새 동안은 힘써 네 모든 일을 행할 것이나 10 일곱째 날은 네 하나님 여호와의 안식일인즉 너나 네 아들이나 네 딸이나 네 남종이나 네 여종이나 네 가축이나 네 문안에 머무는 객이라도 아무 일도 하지 말라(출 20:8-10)

 

9절에서 “엿새 동안은 힘써 네 모든 일을 행할 것이나”라고 번역하였는데 히브리어 성경에는 “힘써 네 모든 일”이라는 표현이 없다. “행할 것이나”라고 번역한 ‘멜라카’는 오늘 본문 2:2에서 “그가 하시던 모든 일”을 말한다(참고 렘 50:25, 시 73:28 등). 직역하면 ‘엿새 동안 (하나님이) 모든 일을 행하신다’라는 말이다. 말씀이 일하고 계시는 상태 그것이 ‘엿새’(6)이다. 그리고 그 다음에 ‘칠’(7), 즉 안식이 온다. 완성되기까지 밤의 실체, 육(체)은 씨를 품지 못하고 있는 상태라는 것을 하나님께서 자기 말씀으로 철저히 드러내신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라는 안식을 주신다.

마태복음 28:1에서 (인간의) “안식일이 다 지나고 안식 후 첫날이 되려는 새벽에”라고 하여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어 새로운 시작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을 통해 완성하신 안식(하나님 왕국)을 보여준다. 오늘 우리는 육을 산다. 육을 살면서 무엇을 양식으로 삼고 있는가가 철저히 폭로될 것이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드러내신다. 그래서 일곱째 날인 예수 그리스도를 알게 하신다. 이렇듯 성경은 어느 특정 부분이 아닌 하나님의 모든 창조 속에서 철저히 하나님 자신의 언약을 보여주신다. 그 언약은 하나님의 계획 속에서 인간의 죄를 전제하고 하나님의 일하심에 의해 은혜로 주어진다는 것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20230322 강론/주성교회 김영대 목사).

 

성경,언약으로 보기03.창0126-0203 창조 언약(20230322).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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