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 창세기 8:13-22 노아의 번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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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 강론 33
창세기 8:13-22
노아의 번제
“육백일 년 첫째 달 곧 그 달 초하룻날에 땅 위에서 물이 걷힌지라 노아가 방주 뚜껑을 제치고 본즉 지면에서 물이 걷혔더니 둘째 달 스무이렛날에 땅이 말랐더라”(13-14절). “육백일 년 첫째 달 곧 그 달 초하룻날”라고 하였는데 노아가 육백 세(7:11)에 홍수가 시작되었으니 그로부터 1년이 지나 방주에서 나오게 되었다는 단순히 시간 계산을 위한 언급이 아니라 새로운 세계가 열렸다는 의미로 표현한 것이다. 출애굽으로 유월절 어린 양의 희생으로 구원이 이루지는 것을 설명하시기 위해 새로운 날로 시작하는 것과 같다. 이런 점에서 방주는 출애굽 사건의 또 다른 방식으로의 계시이다.
1 여호와께서 애굽 땅에서 모세와 아론에게 일러 말씀하시되 2 이 달을 너희에게 달의 시작 곧 해의 첫 달이 되게 하고(출 12:1-2)
“걷힌지라”, “걷혔더니”(13절)라는 말 히브리어 ‘하라브’(마르다), “말랐더라”라는 말 ‘야베쉬’는 단순히 물이 물러가서 말랐다는 그 이상의 뜻을 가지고 성경은 언급하였다. 이 단어를 사용하고 있는 표현을 성경에서 여러 곳에서 볼 수 있는데 대표적으로 몇 구절만 보면 하나님의 능력으로 구원을 이루시는 것과 관련하여 쓰고 있다(참고 사 50:2, 나 1:4 등).
이에 홍해를 꾸짖으시니 곧 마르니(하라브) 그들을 인도하여 바다 건너가기를 마치 광야를 지나감 같게 하사(시 106:9)
바다를, 넓고 깊은 물을 말리시고(하라브) 바다 깊은 곳에 길을 내어 구속 받은 자들을 건너게 하신 이가 어찌 주가 아니시니이까(사 51:10)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요단 물을 너희 앞에서 마르게 하사(야베쉬) 너희를 건너게 하신 것이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우리 앞에 홍해를 말리시고(야베쉬) 우리를 건너게 하심과 같았나니(수 4:23)
하나님께서 방주를 통해 죄를 덮어 속죄를 이루신 것은 하나님의 능력에 의한 구원이라는 것을 강조하신 것이다. 죄 용서가 이루어짐으로 새로운 세계에 들어가게 된 것이 구원이다. 그래서 “하나님이 노아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15절)라고 하셨다. 이 표현은 단순히 하나님께서 말씀하셨다는 것이 아니다. 히브리어 그대로 말하자면 ‘다바르 엘로힘 에트 노아흐 아마르’이다. “말씀하여 이르시되”란 히브리어로 ‘다바르’이다. 성경에서 처음 사용되었다. 이제까지 “하나님이 이르시되”라는 말은 히브리어로 ‘아마르’(선포하다)라는 단어로 사용하였으나(1:3,6,9,11,14,20 등) 노아와 언약을 맺기로 하신 이후에 처음으로 ‘다바르’로 나타내신 것이다. 즉 방주를 통해 노아에게 하나님의 죄 용서가 이루어졌으니 이제 새로운 구원의 세계에서 하나님의 말씀 안에 거하는 상태가 되었다는 것을 나타내신 것이다(참고 요 14:23-24, 15:7 등). 이것을 요한 사도는 죄 용서가 이루어짐으로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의 자유가 주어진 것이고 그것을 또한 사귐이라고 하였다.
31 그러므로 예수께서 자기를 믿은 유대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 참으로 내 제자가 되고 32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요 8:31-32)
우리가 보고 들은 바를 너희에게도 전함은 너희로 우리와 사귐이 있게 하려 함이니 우리의 사귐은 아버지와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더불어 누림이라(요일 1:3)
너는 네 아내와 네 아들들과 네 며느리들과 함께 방주에서 나오고 너와 함께 한 모든 혈육 있는 생물 곧 새와 가축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 이끌어내라 이것들이 땅에서 생육하고 땅에서 번성하리라 하시매”(15-17절). “네 아내와 아들들과 네 며느리들”이라고 번역하였는데 노아와 ‘여자와 아들들과 여자들’이다. 언약의 대표자인 노아에 의해 방주에서 나오는 것이다. “땅에서 생육하고 땅에서 번성하리라”라는 말씀은 다시 소위 말하는 ‘문화명령’을 주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땅에 진리가 충만하도록 일 하실 것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는 표현이다.
“노아가 그 아들들과 그의 아내와 그 며느리들과 함께 나왔고 땅 위의 동물 곧 모든 짐승과 모든 기는 것과 모든 새도 그 종류대로 방주에서 나왔더라”(18-19절). “나오고”(16절), “이끌어 내라”(17절), “나왔고”(18절), “나왔더라”(19절)라는 표현을 전부 ‘야차’로 쓰고 있다. 즉 떠나서 다시는 돌아오지 않는 상태를 말씀한 것이다. 그래서 출애굽을 이렇게 표현하였다.
1 하나님이 이 모든 말씀으로(다바르) 말씀하여(다바르) 이르시되(아마르) 2 나는 너를 애굽 땅, 종 되었던 집에서 인도하여 낸(야차) 네 하나님 여호와니라(출 20:1-2)
방주가 구원의 도구라면 거기서 나와야 한다. 나옴으로 인해 그 방주가 저주에서 속량하는 상징물이 된다. 다시 말해서 방주를 계속 붙잡고 있는 것은 죄 용서에 감사해서 그것만 되새기는 것에 불과하다. 그것은 구원이 아니며 새 생명의 상태가 아니다. 거기서 나와서 새로운 생명의 세계를 사는 상태여야 한다. 그래서 방주는 나오기 위해 들어갔던 것처럼 십자가는 하나님의 심판과 구원의 그 두 가지 의미를 담고서 우리에게 주어진 은혜의 상징이다. 이런 점에서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셨다는 것은 창조를 통해 보여주고자 하셨던 모든 것이 다 드러나고 모든 비밀이 다 밝혀지면 더 이상 있어야 할 가치는 없다. 그래서 멸망시키기 위한 창조인 것처럼 방주는 나오기 위해 들어갔던 것이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 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에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갈 3:13)
“노아가 여호와께 제단을 쌓고 모든 정결한 짐승과 모든 정결한 새 중에서 제물을 취하여 번제로 제단에 드렸더니”(20절). “제단”이란 히브리어로 ‘미즈베아흐’인데 ‘살육하다, 죽이다, 도살하다’라는 말의 ‘자바흐’에서 유래한 단어로 ‘죽이는 장소, 죽음이 담기는 곳, 죽는 곳’이라는 뜻이다. 그리고 우리 성경에 “정결한 새 중에서 제물을 취하여”라고 번역하였는데 히브리어 성경에는 ‘제물’이라는 단어가 없다.
“번제”란 히브리어로 ‘올라’인데 ‘올라가다, 오르막 길, 계단’이라는 뜻을 가진 ‘올가’에서 유래한 단어이다. 우리는 흔히 ‘번제’라고 하면 무조건 다 태워서 드리는 제사라고 생각하는데 그것은 모세의 율법 안에서 번제를 ‘화제’로 드리라고 하였기에 인식된 개념이지 본래 번제라는 말에는 제물을 태워서 드린다는 개념이 없다(참고 출 29:18, 레 1:9).
7:1에 보면 “여호와께서 노아에게 이르시되 너와 네 온 집은 방주로 들어가라 이 세대에서 네가 내 앞에 의로움을 내가 보았음이니라”라고 하였다. 그리고 2-3절에서 “너는 모든 정결한 짐승은 암수(히, ‘이쉬 잇샤’) 일곱씩, 부정한 것은 암수(히, ‘이쉬 잇샤’) 둘씩을 네게로 데려오며 공중의 새도 암수(히, ‘자카르 네케바’) 일곱씩을 데려와 그 씨를 온 지면에 유전하게 하라”라고 하였는데 여기서 ‘정결한 것’은 히브리어로 ‘타호르’(‘깨끗하게 하다, 씻기다’라는 뜻을 지닌 ‘타헤르’에서 유래한 단어이다)라고 하고, ‘부정한 것’은 ‘로타호르’(레위기에서 부정하다는 것은 ‘타메’라는 단어를 사용한다. 이런 점에서 율법에서 정결한 것과 부정한 것의 구분과 같은 것으로 볼 수 없다), 즉 정결한 것과 정결하지 못한 것으로 말씀하였다. “유전하게 하라”라는 말은 ‘하야’를 사용하여 ‘살게 하라, 구원하라’라는 의미이다.
그리고 성경에는 동물들을 ‘암수’로 표현함에 있어서 ‘이쉬 잇샤’로 쓰고 있는 본문이 여기 외에는 없다. 다 ‘자칼 네케바’라는 단어를 사용한다. 그렇다면 여기서 ‘이쉬 잇샤’를 사용하였다는 것은 동물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남자 여자로 말씀한 것이고 남자 여자를 통해 정결함과 정결하지 못한 것에 대한 계시를 주시기 위한 것임을 짐작할 수 있다.
그렇다면 이 말씀은 방주에 들어간 존재가 누구인가를 설명을 하는 것이지 방주에 들어간 동물이 일곱쌍이냐 두썅이냐 하는 문제로 논쟁할 거리가 아니다. 이런 점에서 보자면 1절에서 하나님께서 노아의 의로움을 보셨다고 하였는데 단순히 보았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목하셨다’라는 뜻이다. 즉 하나님께서 노아의 의에 주목하고 계신다는 뜻이다. 하나님께서 노아의 의에 주목하신 이유는 노아의 의와 관련되어 말씀하시고 싶은 것이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노아의 가족들과 동물들이 함께 방주에 들어갈 수 있었던 것은 노아에게 은혜로 주신 ‘하나님의 의’가 살린다는 것을 보여주시기 위함이다. 그래서 베드로 사도는 이렇게 밝혔다.
옛 세상을 용서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의를 전파하는 노아와 그 일곱 식구를 보존하시고 경건하지 아니한 자들의 세상에 홍수를 내리셨으며(벧후 2:5)
남자와 여자가 하나가 되는 것, 이것을 바울 사도는 그리스도와 교회에 대한 비밀이라고 하였다(엡 5:31-32). 그렇다면 노아가 정결한 것으로 번제로 드렸다는 것은 정결함의 존재가 죽음을 통해 정결하지 못한 땅적 존재를 품어 방주가 보여주고자 한 죄를 덮어 속죄가 이루어지는 것이 하나님께서 노아에게 주신 의라는 것을 나타내신 것이고 또한 일곱이라는 것으로 그것은 전적으로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이라는 것을 보여주신 것이다.
그래서 “여호와께서 그 향기를 받으시고 그 중심에 이르시되 내가 다시는 사람으로 말미암아 땅을 저주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사람의 마음이 계획하는 바가 어려서부터 악함이라 내가 전에 행한 것 같이 모든 생물을 다시 멸하지 아니하리니”(21절)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이 말씀은 노아가 제사를 잘 드렸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것을 받으시고 이제는 더 이상 물로는 심판하시지 않겠다고 하신 것이 아니다. 다시 말해서 노아의 제사가 조건이 되어서 하나님께서 심판하지 않겠다는 것이 아니라 노아에게 주신 하나님의 의가 어디에 있는가를 보여주신 것이다.
이런 점에서 “향기를 받으시고”라는 말을 쓰고 있는데 히브리어로 ‘니호아흐 레아흐’인데 ‘니호아흐’는 ‘진정시키다, 달래다, 기쁘게 하다’라는 뜻이고 ‘레아흐’는 ‘루아흐’에서 온 말이다. 즉 하나님의 영, 하나님의 호흡으로 죄의 권세에 매인 땅에 내려진 심판을 달래고 진정시킬 수 있다는 의미이다. 그것은 죽음의 자리에 올라갈 것이 올라가 하나님의 의가 어디에 있는가 하는 것이 온전히 드러날 때 하나님의 심판은 진정되는 것이다. 그것이 십자가이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이렇게 선언하였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롬 12:1)
“땅이 있을 동안에는 심음과 거둠과 추위와 더위와 여름과 겨울과 낮과 밤이 쉬지 아니하리라”(22절). 이 말씀은 노아의 홍수 이후 지구의 축이 23.5도 기울어 계절의 변화가 생겼다는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언약 안에서 이 땅의 심음, 거둠, 추위, 더위 등이 그대로 유지될 것이라는 뜻이다. 다시 말해서 이 땅에 주신 언약은 역사 속에서 종말을 향해 있다. 그렇다면 언젠가 종말이 주어지면 이 땅은 새 하늘과 새 땅으로 바뀔 것이다. 그것은 언약이 지향하는 바 언약의 실체이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완성됨을 암시적으로 말씀한 것이다. 물 심판으로는 죄가 없어질 수 없는 것이기에 땅이 있을 동안 하나님께서 다시 자신의 언약을 나타내시고 말씀하실 것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는 말씀이다(20230319 강론/주성교회 김영대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