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 창세기 7:17-24 물 위에 떠오른 방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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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 강론 31
창세기 7:17-24
물 위에 떠오른 방주
노아의 방주, 홍수에 대한 기록을 십자가 사건을 미리 보여주신 것으로 읽지 못한다면 성경은 한낱 세상의 책과 다를 바가 없다. 왜냐하면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증언이라고 예수님께서 직접 말씀하셨기 때문이다(요 5:39). 그러기에 우리는 역사적 사실이라는 것을 증명하거나 사건의 전후가 사실에 부합하느냐 하는 관점으로 본 것이 아니라 계속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계시로 이해하고자 했다. 그래서 신약에서 노아에 대해 말씀한 것들도 면밀히 살펴보았었다.
특히 베드로전서 3:21에서 “물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이제 너희를 구원하는 표니 곧 세례라 이는 육체의 더러운 것을 제하여 버림이 아니요 하나님을 향한 선한 양심의 간구니라”라고 말씀한 것을 통해 물은 예수님의 부활로 말미암아 나타내신 구원의 표라는 것을 확인했었다. 부활로 말미암았다는 것은 십자가에 근거해 있다는 뜻이다. 다시 말해서 방주 밖의 세상이 물로 잠겨 죽음을 맞이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은 죄로 말미암아 말씀에 의해 죽임을 당해야 하고 그 죽음은 방주를 통해 죄를 덮으시고 속죄를 이루신 예수 그리스도를 보여준다.
이런 점에서 “홍수가 땅에 사십 일 동안 계속된지라 물이 많아져 방주가 땅에서 떠올랐고”(17절)라는 말씀도 단순히 비가 많이 오니 방주가 물에 뜰 수밖에 없었다는 식으로 생각할 문제는 아니다. 기록의 모든 내용이 예수 그리스도를 보여주고 설명하기 위한 것이기 때문이다. “계속된지라”라는 말 역시 히브리어로 ‘하야’이다. 즉 땅에 하나님 자신을 보여주시는 말씀이 임했다는 뜻이다.
“떠올랐고”라는 말은 히브리어로 ‘나사’인데 ‘들어 올리다, 나르다, 취하여 가다, 가지고 가다’라는 뜻이다. 그래서 이 말씀을 직역하면 ‘물이 들어 올렸다’ 혹은 ‘물이 취하여 갔다’라는 말이다. 이런 표현들은 단순히 방주가 물에 떠올랐다는 것을 표현한 것이 아니라 방주가 말씀에 의해 들어 올려졌음을 의미한다. 방주 밖은 사망이지만 방주는 말씀에 의해 들어 올려 하나님의 언약을 드러내는 것으로 나타내고 있다.
“물이 더 많아져 땅에 넘치매 방주가 물 위에 떠 다녔으며”(18절). 여기서 “넘치매”라는 말은 히브리어 ‘가바르’인데 ‘강하다, 이기다, 우세하다, 굳게 하다’라는 뜻이고 “더 많아져”(히, ‘라바 메오드’)라고 하였는데 직역하면 ‘물이 대단한 힘으로 쏘아 땅을 이겼다’라는 표현이다. 다시 말해서 말씀이 땅적 존재를 이겼다는 의미로 말씀하였다.
“떠 다녔으며”라는 표현은 히브리어 ‘얄라크’를 번역한 것인데 ‘가다, 오다, 걷다’라는 뜻을 지니고 있다. 좀 웃기는 표현인지 모르지만 문자 그대로 표현하면 ‘상자가 물 위를 걸어 다녔다’라는 말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 말씀을 통해 어떤 연관된 사건을 생각할 수 있는가? 예수님께서 물 위를 걸으신 표적이다.
16 저물매 제자들이 바다에 내려가서 17 배를 타고 바다를 건너 가버나움으로 가는데 이미 어두웠고 예수는 아직 그들에게 오시지 아니하셨더니 18 큰 바람이 불어 파도가 일어나더라 19 제자들이 노를 저어 십여 리쯤 가다가 예수께서 바다 위로 걸어 배에 가까이 오심을 보고 두려워하거늘 20 이르시되 내니 두려워하지 말라 하신대 21 이에 기뻐서 배로 영접하니 배는 곧 그들이 가려던 땅에 이르렀더라(요 6:16-21)
제자들의 배는 노를 저어 가고 있었으나 큰 바람과 파도를 이기지 못하고 있었던 상황을 요한 사도는 저물어 어둠의 상태라고 밝힌다. 노가 없는 방주와 대조된 상태를 보여주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예수님께서 바다 위로 걸어서 “내니 두려워하지 말라”라고 하셨는데 ‘에고 에이미’(나는 ~이다)는 구약에서 “나는 스스로 있는 자”(출 3:14)라는 표현의 히브리어 ‘예흐예 아쉘 예흐예’(‘나는 나다, 나는 나로서 존재한다’)라는 말씀의 헬라어 번역이다. 즉 방주를 통해 말씀하셨던 오직 홀로만 존재이신 하나님께서 친히 이 땅에 십자가 죽음을 이루기 위해 오셨다는 의미이다.
“물이 땅에 더욱 넘치매 천하의 높은 산이 다 잠겼더니 물이 불어서 십오 규빗이나 오르니 산들이 잠긴지라”(19-20절). 여기서도 “넘치매”라는 말은 ‘가바르’, 즉 ‘이기다’라는 뜻이다. 그리고 그다음에 “천하의 높은 산이 다 잠겼더니”라고 우리 성경에 번역하였는데 직역하면 ‘하늘 아래의 높은 산이 덮혀졌다’라는 말이다.
“잠겼더니”라는 말 히브리어 ‘카사’는 ‘덮다, 숨기다, 감추다’라는 뜻이다. 세상의 모든 산들이 다 잠겼다는 표현이 아니라 땅적 존재가 있는 땅과 대조된 하늘, 즉 하늘나라를 의미하는 표현이다. 하늘의 생명에 의해 덮혀지고 진리의 말씀 안에 감추어져야 한다. 그것이 구원이다.
“높은 산”(히, ‘하르 가보아흐’)이란 말의 히브리어 ‘가보아흐’는 성경에서 단순히 높다는 표현으로만 쓴 것이 아니라 ‘교만하다, 지위가 높아졌다’라는 뜻으로 쓰인다.
여호와께서는 높이 계셔도 낮은 자를 굽어살피시며 멀리서도 교만한 자를 아심이니이다(시 138:6)
너는 어느 지방에서든지 빈민을 학대하는 것과 정의와 공의를 짓밟는 것을 볼지라도 그것을 이상히 여기지 말라 높은 자는 더 높은 자가 감찰하고 또 그들보다 더 높은 자들도 있음이니라(전 5:8)
이렇게 보자면 하늘나라, 영원한 생명의 물이 있는 그 하늘에 의해 산으로 표현된 세상의 권세 있는 모든 교만한 것들을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이기셨다는 것을 나타내고 있는 말씀이다. 이사야서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다.
7 네가 높고 높은 산 위에 네 침상을 베풀었고 네가 또 거기에 올라가서 제사를 드렸으며 8 네가 또 네 기념표를 문과 문설주 뒤에 두었으며 네가 나를 떠나 벗고 올라가서 네 침상을 넓히고 그들과 언약하며 또 네가 그들의 침상을 사랑하여 그 벌거벗은 것을 보았으며 9 네가 기름을 가지고 몰렉에게 나아가되 향품을 더하였으며 네가 또 사신을 먼 곳에 보내고 스올에까지 내려가게 하였으며(사 57:7-9)
이사야서는 북 이스라엘은 이미 앗수르에 의해서 망했고 남 유다가 지금 멸망 당할 위기에 있는 상태에서 선포한 말씀이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율법을 주신 이유가 언약에 담긴 뜻을 알라는 것이었다. 다시 말해서 언약이 지향하고 보여주는 메시아를 기다리라는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행동으로 율법을 지키는 것으로 하나님을 잘 섬긴다고 착각하고 있었다. 그들을 하나님은 무당의 자식, 간음자와 음녀의 자식들(사 57:3)이라고 하시고 그들이 높은 산 위에 침상을 베풀었다고 말씀하셨다.
“침상”이란 히브리어로 ‘미쉬카브’인데 이 단어는 자음으로는 ‘성막’(히, ‘미쉬칸’)과 같은 단어이다. 바알과 몰렉에게 하는 제사 행위가 음행이었다. 이런 점에서 ‘침상’(미쉬카브로)을 그들의 ‘성막’(미쉬칸)으로 삼았다는 뜻이다.
이런 점에서 다윗은 시편에서 “그는 그의 침상에서 죄악을 꾀하며 스스로 악한 길에 서고 악을 거절하지 아니하는도다”(시 36:4)라고 하여 침상에서 음행의 죄악을 행한다고 하였고, 또한 예수님께서 “사람이 등불을 가져오는 것은 말 아래에나 평상 아래에 두려 함이냐 등경 위에 두려 함이 아니냐”(막 4:21)라고 하셨는데 여기서 “평상”의 헬라어 ‘클리네’는 ‘침대, 침상’을 뜻한다. 즉 등불을 켜서 등경 위에 두는 것처럼 침상 아래 두고 음행의 죄악이 다 드러날 것을 말씀하셨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언약을 무시하여 말씀과는 상관없는 상태의 교만한 마음으로 우상을 섬기는 상태를 “높은 산”으로 나타내신 것이었다. 결국 천하의 높은 산이 다 잠겼다는 말씀은 홍수로 말미암아 지구상의 모든 높은 산들이 다 잠겼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언약 안에 있는 노아의 가족을 제외한 나머지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에 의해 멸망당할 수밖에 없는 것이 죄악 가운데 있는 이 땅의 상태라는 것이다. 하나님의 언약을 알지 못하는 상태가 바로 교만한 것이다.
그래서 “땅 위에 움직이는 생물이 다 죽었으니 곧 새와 가축과 들짐승과 땅에 기는 모든 것과 모든 사람이라 육지에 있어 그 코에 생명의 기운의 숨이 있는 것은 다 죽었더라 지면의 모든 생물을 쓸어버리시니 곧 사람과 가축과 기는 것과 공중의 새까지라 이들은 땅에서 쓸어버림을 당하였으되 오직 노아와 그와 함께 방주에 있던 자들만 남았더라”(21-23절)라고 말씀한다. 여기서 “죽었으니”, “죽었더라”라는 말의 히브리어 ‘가와’는 ‘멸하다’라는 뜻이다.
여호와가 말하노라 이 온 땅에서 삼분의 이는 멸망하고 삼분의 일은 거기 남으리니(슥 13:8)
홍수로 말미암아 단순히 죽었다는 것이 아니라 죄의 권세 매인 땅적 존재들이 본질적으로는 죽어 있음을 드러낼 뿐만 아니라 심판으로 말미암아 진리의 말씀으로 완전히 멸망을 받을 수밖에 없는 존재임을 말씀한 것이다. 그래서 여기서 “쓸어버리시니”라는 표현의 히브리어 ‘마하’는 ‘씻다, 닦아내다’라는 뜻이다. 죄악 가운데 있는 상태에서 진리의 말씀으로 씻어내지 않으면 안 된다는 뜻을 담고 있다. 물론 여기서 씻어낸다는 것은 단순히 닦고 깨끗하게 한다는 정도가 아니라 진리의 말씀 안에 죽는 것이라는 의미이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이 물로 씻어 말씀으로 깨끗하게 하신 것이라고 말씀하였다.
25 남편들아 아내 사랑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그 교회를 위하여 자신을 주심 같이 하라 26 이는 곧 물로 씻어 말씀으로 깨끗하게 하사 거룩하게 하시고 27 자기 앞에 영광스러운 교회로 세우사 티나 주름 잡힌 것이나 이런 것들이 없이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려 하심이라(엡 5:25-27)
“땅 위에 움직이는 생물이 다 죽었으니 곧 새와 가축과 들짐승과 땅에 기는 모든 것과 모든 사람이라 육지에 있어 그 코에 생명의 기운의 숨이 있는 것은 다 죽었더라 지면의 모든 생물을 쓸어버리시니 곧 사람과 가축과 기는 것과 공중의 새까지라”(21-23a)라고 하니까 흔히 이 말씀 가지고 물고기는 심판받지 않았다고 주장하는 자들이 있는데 본문은 그런 말씀을 하는 것이 아니라 땅적 존재가 다 심판받아 멸망하였다는 것을 말씀한 것이다. “생명의 기운의 숨이 있는 것”에서 “기운”이란 ‘루아흐’이다. 즉 살아 있다고 하나 하나님의 영이 없어 땅의 숨(호흡)을 의지하는 자들은 육체, 네피림에 불과한 것이기에 죽어 있는 것이다.
그래서 비록 사람이라고 할지라도 죄의 권세에 매인 상태는 동물, 짐승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새, 가축, 들짐승, 땅에 기는 것으로 표현하여 땅적 존재를 총칭한다. 땅적 존재는 진리의 말씀이신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망할 수밖에 없으나 죄를 덮으시고 속죄의 방주가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생명이 주어진다는 것이 노아에게 주신 언약이다. 방주 밖과 같은 예수 그리스도 밖은 영원한 사망이요 방주 안과 같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는 영원한 생명이다.
그것을 다시 강조한 말씀이 “물이 백오십 일을 땅에 넘쳤더라”(24절)라는 표현이다. 노아 홍수를 30일로 산정한 것을 생각하였을 때 150일은 5개월로 율법의 수이다. 즉 율법 아래 매여 율법을 좇아 행하는 땅적 존재가 철저하게 말씀의 심판을 받을 수밖에 없는 것으로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27 그런즉 자랑할 데가 어디냐 있을 수가 없느니라 무슨 법으로냐 행위로냐 아니라 오직 믿음의 법으로니라 28 그러므로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 있지 않고 믿음으로 되는 줄 우리가 인정하노라(롬 3:27-28)
(20230305 강론/주성교회 김영대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