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약강론/요한계시록

26. 요한계시록 6:12-17 여섯째 인

불편한 진리 2023. 2. 26. 2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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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계시록 강론 26

요한계시록 6:12-17

여섯째 인

 

현대는 지구의 온난화 현상으로 기후변화의 위기에 있다고 한다. 그래서 정부나 사회단체들은 여기에 대비한 온갖 대책을 세우려고 한다. 그런데 문제는 오늘날 교회들이 이런 현상에 편승하고 있다는 것이다. 지진이나 해일, 화산 폭발 등의 자연적인 현상을 가지고 종말을 말하면서 예수님의 재림에 대한 전조현상으로 요한계시록을 해석한다는 것이다. 만약 그것이 맞는 말이고 요한계시록이 미래를 말하는 것이라면 구약 시대에는 자연적인 현상이 없었어야 한다. 그러나 성경은 이 땅의 자연적인 현상만을 가지고 하나님의 심판으로 말씀하지 않는다. 다시 말해서 자연적인 현상을 모티브로 종말을 나타내고 있지 않다.

그러면 오늘 본문이 말씀하는 바가 어떤 의미인지 생각해 보자. 본문은 세 부분으로 나눌 수 있는데 12-14절은 심판의 현상을 말씀하고, 15-16절은 심판에 대한 반응을 나타낸 후, 17절은 성경의 선언을 전한다. “내가 보니 여섯째 인을 떼실 때에 큰 지진이 나며 해가 검은 털로 짠 상복같이 검어지고 달은 온통 피같이 되며 하늘의 별들이 무화과나무가 대풍에 흔들려 설익은 열매가 떨어지는 것 같이 땅에 떨어지며 하늘은 두루마리가 말리는 것 같이 떠나가고 각 산과 섬이 제 자리에서 옮겨지매”(12-14절). “큰 지진”이란 하나님이 창조하신 것을 흔들어 심판하시는 맹렬한 진노를 상징한다(참고, 학 2:6-7, 마 24:7). “해가 검은 털로 짠 상복같이 검어지고”라는 말씀은 검다는 것에 대한 극적인 표현으로 출애굽 때 흑암의 재앙(출 10:22)과 같은 어둠의 심판을 표현한 것이다(참고, 사 50:3, 마 24:29).

“달은 온통 피같이 되며”라는 말씀은 첫째 인에서 보여주신 것처럼 엄청난 살육의 공포에 대한 상징이다(참고, 마 24:29). “하늘의 별들이 … 땅에 떨어지며”라는 표현이나 “하늘은 두루마리가 말리는 것 같이 떠나가고 각 산과 섬이 제 자리에서 옮겨지매”라는 말씀은 인간의 생각에는 전혀 움직여질 수 없는 것이라 여겨진 것들이 제 자리를 잃어버리는 심판을 말씀한다(참고, 겔 32:7, 사 34:4, 마 24:29). 여기서 우리 성경에 “떠나가고”라고 번역하였는데 헬라어 ‘아포코리조’는 ‘분리되다, 갈라지다’라는 뜻이다. 우리가 보기에는 이러한 말씀이 생소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구약 성경을 알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이러한 묘사가 생소한 것이 아니다. 종말에 대한 구약 선지자들의 표현이기 때문이다.

 

19 내가 질투와 맹렬한 노여움으로 말하였거니와 그날에 큰 지진이 이스라엘 땅에 일어나서 20 바다의 고기들과 공중의 새들과 들의 짐승들과 땅에 기는 모든 벌레와 지면에 있는 모든 사람이 내 앞에서 떨 것이며 모든 산이 무너지며 절벽이 떨어지며 모든 성벽이 땅에 무너지리라(겔 38:19-20)

 

9 보라 여호와의 날 곧 잔혹히 분냄과 맹렬히 노하는 날이 이르러 땅을 황폐하게 하며 그 중에서 죄인들을 멸하리니 10 하늘의 별들과 별 무리가 그 빛을 내지 아니하며 해가 돋아도 어두우며 달이 그 빛을 비추지 아니할 것이로다 11 내가 세상의 악과 악인의 죄를 벌하며 교만한 자의 오만을 끊으며 강포한 자의 거만을 낮출 것이며(사 13:9-11)

 

28 그 후에 내가 내 영을 만민에게 부어 주리니 너희 자녀들이 장래 일을 말할 것이며 너희 늙은이는 꿈을 꾸며 너희 젊은이는 이상을 볼 것이며 29 그 때에 내가 또 내 영을 남종과 여종에게 부어 줄 것이며 30 내가 이적을 하늘과 땅에 베풀리니 곧 피와 불과 연기 기둥이라 31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이 이르기 전에 해가 어두워지고 달이 핏빛 같이 변하려니와 32 누구든지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니 이는 나 여호와의 말대로 시온산과 예루살렘에서 피할 자가 있을 것임이요 남은 자 중에 나 여호와의 부름을 받을 자가 있을 것임이니라(욜 2:28-32)

 

구약에서 종말은 여호와의 날로 표현되는데 성령 강림을 경험한 베드로는 이렇게 강론하였다.

 

16 이는 곧 선지자 요엘을 통하여 말씀하신 것이니 일렀으되 17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말세에 내가 내 영을 모든 육체에 부어 주리니 너희의 자녀들은 예언할 것이요 너희의 젊은이들은 환상을 보고 너희의 늙은이들은 꿈을 꾸리라 18 그 때에 내가 내 영을 내 남종과 여종들에게 부어 주리니 그들이 예언할 것이요 19 또 내가 위로 하늘에서는 기사를 아래로 땅에서는 징조를 베풀리니 곧 피와 불과 연기로다 20 주의 크고 영화로운 날이 이르기 전에 해가 변하여 어두워지고 달이 변하여 피가 되리라 21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 하였느니라(행 2:16-21)

 

베드로 사도는 요엘서의 예언이 예수 그리스도로 성취되었다고 하였다. “하나님이 오른손으로 예수를 높이시매 그가 약속하신 성령을 아버지께 받아서 너희가 보고 듣는 이것을 부어 주셨느니라”(행 2:33)라고 하였다. 그래서 구약에서 “누구든지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는 자가 구원을 얻으리니”라는 예언을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라고 표현하여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은 이 예수를 하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다고 선언하였다(행 2:36).

그래서 본문 12절에서 “큰 지진이 나며, … 상복같이 검어지고, … 피같이 되며”라는 말씀들이 헬라어 성경에는 ‘큰 지진이 일어났고, 상복같이 검어졌고, 피같이 되었으며’라고 과거형으로 썼고, 또한 13절에서도 “땅에 떨어지며”라는 말씀은 ‘떨어졌으며’이고, 14절에서도 “떠나가고 … 옮겨지매”라는 말씀은 ‘분리되었고 … 옮겨졌으매’라고 과거형으로 표현하였다. 즉 요한 사도가 미래에 일어날 일들을 예견하여 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심판이 이미 이 땅에 드러나 확정된 것으로 나타내었다.

그렇다면 여섯째 인을 열어 보여주신 이 심판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셋째 인이 열렸을 때도 검은 말을 탄 자가 저울을 가진 것으로 먹을 것이 없는 심판의 내용이 드러났는데 그것은 단순히 경제적인 문제가 아니라 말씀이 없는 기근이라고 우리는 생각했었다. 그리고 둘째 인과 넷째 인을 개봉하신 것에서도 드러난 심판은 단순히 우리의 목숨이 끊어지는 것이 아니라 말씀으로 인해 죽는 영적인 죽음의 상태를 보여주는 것으로 이해하였다. 그렇다면 여기서도 심판의 내용이 단순히 자연적인 현상이 어떻게 될 것이라는 말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것들을 통해 나타내고자 하셨던 모든 것이 제대로 다 드러나지 못하는 현상을 하나님의 심판 아래에 있는 모습으로 말씀한 것이다.

하늘에는 열린 문이 있지만(4:1) 땅은 흔들리고 하늘의 해와 달, 별은 빛을 잃는 어둠으로 하늘의 뜻을 밝히 볼 수 없어 예수 그리스도를 살육할 수밖에 없는 상태가 심판 아래의 모습이다. 구약에서 이스라엘에게 언약을 주셨으나 그들은 무화과나무의 열매가 설익어 땅에 떨어진 것처럼 이 땅에 내동댕이쳐질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하나님은 진짜 이스라엘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언약을 온전히 성취하셨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셨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하늘의 문을 열어 하늘의 비밀, 그 뜻을 나타내신 것이었으나 죄인들은 스스로 하늘의 문을 닫고 오히려 자기식으로 편하게 하늘을 갈라 하나님을 생각하여 하늘의 뜻에는 관심이 없는 상태로 살았다. 그것이 심판 아래 있는 모습이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 적이 있다.

 

이르시되 너희 믿음이 작은 까닭이니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만일 너희에게 믿음이 겨자씨 한 알 만큼만 있어도 이 산을 명하여 여기서 저기로 옮겨지라 하면 옮겨질 것이요 또 너희가 못할 것이 없으리라(마 17:20)

 

성경에서 “산”은 ‘권세’나 ‘힘’을 상징하는데 하나님께서 무너뜨리고 파괴하실 것이라고 할 때 산은 하나님의 언약에 도전하는 인간의 나라나 세상의 권세를 지칭하는 것(욥 9:5, 렘 51:25, 사 40:4, 암 9:13 등)이며, 반면 하나님께서 임재하여 자신을 나타내시며 언약을 주시는 곳으로 지칭할 때 ‘성전’ 혹은 ‘시온산’을 의미한다(창 22:1-19, 출 19:20, 대하 3:1, 사 2:2, 시 2:6 등).

이런 점에서 예수님의 산상수훈 강론과 변화산 변모는 언약의 온전한 성취인 십자가 사건을 앞당겨 미리 보여주심으로 하나님의 권세를 나타내신 것이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겨자씨 한 알 만큼의 믿음만 있어도 산을 명하여 옮겨질 것이라는 말씀은 제자들의 믿음 없음을 폭로한 것이다. 열두 제자가 구약의 이스라엘을 보여주는 존재라면 곧 이스라엘의 실패를 담고 있어야 하는 자들이라는 점에서 유대인들에게 내려지는 하나님의 심판을 선언하고 있다고 보아야 한다.

겨자씨 한 알 만큼의 믿음이 있는 자가 이스라엘 중에 있었는가? 진짜 이스라엘로 오신 예수님 외에는 없었다. 오직 예수님께서 믿음으로 이 땅에 오셨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예수님 자신의 믿음으로 산을 옮기실 것이라는 말씀이다. 즉 이스라엘이라는 나라가 누리는 하나님과의 언약 관계가 예수님의 믿음에 의해 이방인들에게로 옮겨지고 그들도 언약의 복을 누리게 될 것이라는 하나님의 심판을 말씀하신 것이다. 이런 점에서 “각 산과 섬이 제 자리에서 옮겨지매”라는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이미 그렇게 ‘옮겨졌다’라는 선언으로 심판 아래 있는 상태를 나타낸 것이다. 섬이란 어디에 있든지 바다로 차단된 곳으로 심판을 나타낸다. 그래서 요한 사도는 밧모섬에서 이 땅은 심판 아래 있다는 의미를 담고 일곱 교회에 서신을 보낸 것이다.

“땅의 임금들과 왕족들과 장군들과 부자들과 강한 자들과 모든 종과 자유인이 굴과 산들의 바위틈에 숨어 산들과 바위에게 말하되 우리 위에 떨어져 보좌에 앉으신 이의 얼굴에서와 그 어린 양의 진노에서 우리를 가리라”(15-16절). “땅의 임금들과 왕족들과 장군들과 부자들과 강한 자들과 모든 종과 자유인”이라고 일곱 부류의 사람들을 언급하였는데 이 땅의 모든 사람이 하나님의 심판의 대상이라는 뜻이다.

산사태가 나면 피하는 것이 본능적이다. 그러나 오늘 본문에서는 산과 바위를 향해 호소한다. 산과 바위틈에서 산과 바위에게 말한다. 우리 위에 떨어져서 나를 덮치라고 부르짖는다. 차라리 산에 매몰되어 세상의 권세에 죽임을 당하는 것이 훨씬 낫다는 것이다. 그렇게 말하는 이유는 보좌에 앉으신 이의 얼굴과 어린 양의 진노가 너무도 두렵기 때문이다. 산과 바위가 무너지는 것보다 더 두렵고 무서운 것이 어린 양의 진노이다.

선악의 나무를 취한 인간은 동산 나무 사이에 숨었다(창 3:8-10). 우리 성경에 동산 나무 사이에 숨었다고 번역하였는데 사실은 동산 나무 중앙에 숨었다는 뜻이다. 자기 자신을 기준으로 선악을 판단하는 율법의 나무와 하나 되어 찾아오신 하나님을 만날 수 없었다는 뜻이다. 창세기에서 선악의 나무를 취한 죄인이 하나님 앞에 설 수 없었던 그대로 요한계시록에서 묘사한 것이다. 그래서 “그들의 진노의 큰 날이 이르렀으니 누가 능히 서리요 하더라”(17절). 누구도 하나님 앞에 설 수 있는 자는 없다(스 9:15, 나 1:5-6, 말 3:2). 그래서 바울 사도는 이렇게 고백하였다.

 

7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8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9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부터 난 의라(빌 3:7-9)

 

우리의 율법적 행위로 하나님의 심판에서 벗어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많은 돈을 기부하여 성전(?)을 짓고, 교인 수가 많은 대형 교회에 속했다는 것이 심판에서 벗어날 수 있는 권리가 아니다. 십일조와 주일성수를 철저히 하며, 기도와 전도를 엄청나게 한 실적과 성경을 100독, 200독 하고 필사한 경험은 어린 양의 진노를 피하는 것과 아무 상관이 없다. 오히려 그렇게 하는 우리의 행위가 심판 아래 있는 것이다. 그래서 야고보 사도는 “긍휼은 심판을 이기고 자랑하느니라”(약 2:13)라고 하였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요 19:30)라고 선언하신 그 말씀 안에 있는 긍휼, 불쌍히 여기심을 받은 은혜여야 한다. 그러므로 오늘도 예수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요 성도는 십자가의 길에서 하나님의 긍휼을 확인할 수밖에 없다(20230226 강론/주성교회 김영대 목사).

 

계26.60612-17 여섯째 인(20230226).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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