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구약강론/창세기

29. 창세기 6:18-7:5 내 언약을 세우리니

불편한 진리 2023. 2. 19. 16: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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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 강론 29

창세기 6:18-7:5

내 언약을 세우리니

 

노아의 방주에 대한 말씀을 대하면 많은 의문을 가지고 접근한다. 예컨대 그 시대에는 공룡도 있었을 것인데 몸집이 큰 공룡을 비롯하여 그 많은 동물을 어떻게 다 실었으며 또 노아가 방주에 있었던 기간 동안 동물들의 먹이와 배설물을 노아의 식구 8명이 어떻게 해결하였을까? 하는 의문이 크다. 홍수의 범위에 대해서도 지역에 한정된 것인가 아니면 세계적인 홍수인가에 대한 논란도 많다. 그러나 성경은 그에 대한 답을 시원하게 주지 않는다.

방주 이야기하면 나라마다 대홍수가 있었다는 고대 설화를 말하고 그것이 성경에 연유되었다고 주장하면서 역사적 사실로 증명하려고 한다. 방주에 대한 많은 의문이 있고 그에 대한 답이 구체적으로 해결되지 않았다 할지라도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니 알아서 적절하게 해결하셨을 것으로 생각한다. 오래전에 이런 일이 있었다는 사실을 과학적으로 증명하고 확인하면 우리에게 남은 것은 무엇인가? “그래 성경의 내용은 다 사실이었구나 내가 그것을 이제 분명히 알게 되었고 이제 나는 하나님이 살아계심을 확실히 믿게 되었어”라고 하는 것을 믿음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노아의 홍수에 대한 사실을 부정하자는 것도 아니고 알 필요가 없다는 말이 아니다. 문제는 그러한 믿음으로 생명을 누릴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단순히 살아 계신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성경에서 말씀하는 하나님이 아닌 우상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성경에서 말씀하는 믿음이란 무엇인가? 아니 성경이 말씀하는 믿음이 누구인가?

 

사람이 감당할 시험 밖에는 너희가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하지 못할 시험당함을 허락하지 아니하시고 시험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고전 10:13)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롬 1:17)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그는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히 12:2)

 

또 내가 하늘이 열린 것을 보니 보라 백마와 그것을 탄 자가 있으니 그 이름은 충신과 진실이라 그가 공의로 심판하며 싸우더라(계 19:11)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엡 2:8)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갈 2:20)

 

 

 

방주(히, ‘테바’)는 고페르 나무로 만들고 역청(히, ‘코페르’)을 칠하였다(히, ‘카파르’)는 것이 단순히 배를 만들어 방수 공사를 하라는 말씀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들의 죄를 덮으시고 속전을 이루시어 생명을 허락하시겠다는 것을 보여주신 상자요 궤였다. 다시 말해서 안식의 뜻을 지닌 노아가 방주를 만들었다는 것은 안식이신 분이 이 땅에 오셔서 죄를 덮으시고 속전을 이루시는 메시아를 미리 보여주신 것이다. 이런 점에서 방주는 패역한 죄인들을 쓸어버리신 하나님의 심판만 말씀한 것이 아니라 생명을 은혜로 허락하실 것을 나타내신 말씀이다.

그래서 본문 18절에서 “그러나 너와는 내가 내 언약을 세우리니”라고 말씀하신다. “언약”이란 말이 여기서 처음 나오지만 이미 하나님께서 언약의 뜻을 앞에서 수없이 밝히셨다. 히브리어로 ‘베리트’인데 ‘언약, 계약, 조약, 약속, 서약, 동맹, 법령, 협정’이라는 뜻으로 ‘바라’(‘자르다, 끊다, 새기다’)에서 파생한 말이다. 약속을 어길 경우에는 죽음 및 관계 단절이 뒤따른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내 언약”이라고 하셨다. 본문을 주의 깊게 보면 홍수를 기다리는 7일(7:4,10), 40일 동안의 홍수(7:17), 150일 동안 물이 불어남(7:24) 그리고 반복해서 150일 동안 물이 걷힘(8:3), 40일 동안의 기다림(8:6), 7일 동안 기다림(8:10,12)으로 나타내고 있다. 7과 40은 하나님의 일하심을 나타내는 수이다.

그리고 150일은 노아 홍수에서 한 달을 30일로 산정한다. 그래서 150일은 5개월을 의미한다. 이렇게 보자면 5는 율법의 수이다. 5:29에서 “땅의 저주”가 율법이 짐이 되는 땅이라는 의미를 생각했었다. 그 대상을 17절에서 “무릇 생명의 기운이 있는 모든 육체를 천하에서 멸절하리니 땅에 있는 것들이 다 죽으리라”라고 말씀하였다. “생명의 기운이 있는 모든 육체”라고 하였는데 “기운”은 히브리어로 ‘루아흐’인 하나님의 영이 없는 땅의 살아 있음을 의지하는 육체, 네피림, 땅적 존재, 즉 율법의 짐이 되는 땅에 갇힌 존재를 멸절하신다는 것이다. 결국 150일의 5개월은 율법의 저주 아래에서 하나님의 심판이 철저히 내려져 그 안에 갇힌 상태를 나타낸다.

그런데 “너는 네 아들들과 네 아내와 네 며느리들과 함께 그 방주로 들어가고”라고 말씀한다. 이 말씀을 가지고 노아 한 사람 잘해서 그 가족이 다 구원받는다는 식으로 말하는데 이 말씀은 그런 의미가 아니라 노아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의 안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하나님의 언약이라는 의미이다. 이런 점에서 “여호와께서 노아에게 이르시되 너와 네 온 집은 방주로 들어가라 이 세대에서 네가 내 앞에 의로움을 내가 보았음이니라”(1절)라고 말씀한다. 이 말씀 역시 노아의 의로움을 보셨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를 방주에 넣으시는 구원을 이루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의가 노아에게 은혜로 주어졌고 노아가 하나님의 은혜를 발견하였다는 의미이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영의 함께 하지 않는 육체, 네피림, 땅적 존재인 동물들을 방주에 태우시는 이유가 무엇인가? “혈육 있는 모든 생물을 너는 각기 암수 한 쌍씩 방주로 이끌어 들여 너와 함께 생명을 보존하게 하되 새가 그 종류대로, 가축이 그 종류대로, 땅에 기는 모든 것이 그 종류대로 각기 둘씩 네게로 나아오리니 그 생명을 보존하게 하라 너는 먹을 모든 양식을 네게로 가져다가 저축하라 이것이 너와 그들의 먹을 것이 되리라”(19-21절).

여기서 “생명을 보존하되”라는 말은 히브리어로 ‘하야’이다(히브리어 성경에는 ‘생명’이라는 말이 없다). 2:7에서 “생령”을 히브리어로 ‘네페쉬 하야’라고하였을 때 ‘하야’라는 말이다. 즉 너(언약이 주어진 노아)와 함께 살게 하신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동물들, 땅적 존재인 짐승들을 방주에 태우는 이유는 노아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언약이 어떻게 작동하는가를 보여주신 말씀이다. 다시 말해서 노아와 같은 안식이신 메시아가 이 땅에 주어지면 그 메시아에 의해 땅적 육체, 네피림과 같은 땅적 존재들을 살리시는 역할을 할 것이라는 하나님의 언약이 담겨 있다. 그래서 베드로 사도는 다음과 같이 선언한다.

 

20 그들은 전에 노아의 날 방주를 준비할 동안 하나님이 오래 참고 기다리실 때에 복종하지 아니하던 자들이라 방주에서 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은 자가 몇 명뿐이니 겨우 여덟 명이라 21 물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이제 너희를 구원하는 표니 곧 세례라 이는 육체의 더러운 것을 제하여 버림이 아니요 하나님을 향한 선한 양심의 간구니라(벧전 3:20-21)

 

“선한 양심”이란 헬라어로 ‘쉬네이데시스 아가도스’인데 “양심”이란 말의 ‘쉬네이데시스’는 ‘함께 보다, 이해하다’라는 뜻의 ‘쉬네이도’에서 유래한 단어이다. 그러니까 양심이란 모든 사람이 생각하고 함께 보는 상식적인 것이 양심이라는 뜻이다. 그런데 여기서 “선한”이라는 말이 붙어 있다. 그렇다면 이 말씀의 의미는 ‘하나님과 함께 보는 시각을 구한다’라는 의미이다. 하나님께서 악이라고 보시는 것을 악으로 보고 하나님께서 선이라고 보시는 것을 선으로 보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베드로 사도는 노아의 홍수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의한 세례, 즉 죽음을 상징하는 물이라고 밝혔다. 홍수의 비는 물로 씻으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내려짐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주어지는 생명을 말씀하고 있다. 다시 말해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죽고 살아나는 새로운 창조의 의미를 나타낸 것이다.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말씀대로 이루어졌다.

“노아가 그와 같이 하여 하나님이 자기에게 명하신 대로 다 준행하였더라”(22절). 7:5에서도 “노아가 여호와께서 자기에게 명하신 대로 다 준행하였더라”라고 하였고, 9절에서도 “하나님이 노아에게 명하신 대로”, 16절에서도 “하나님이 그에게 명하신 대로 들어가매”라고 하여 철저히 말씀대로 이루어졌음을 보여준다. 말씀대로 이루어졌다는 것은 말씀으로 하신 하나님의 언약대로 이루어졌다는 뜻이고 하나님의 언약의 실체는 말씀이신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그렇다면 단순히 노아가 말씀대로 잘 준행하였다는 것이 아니라 말씀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만들어 내신다는 의미이다.

 

26 형제들아 아브라함의 후손과 너희 중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들아 이 구원의 말씀을 우리에게 보내셨거늘 27 예루살렘에 사는 자들과 그들 관리들이 예수와 및 안식일마다 외우는 바 선지자들의 말을 알지 못하므로 예수를 정죄하여 선지자들의 말을 응하게 하였도다(행 13:26-27)

 

8 그러면 무엇을 말하느냐 말씀이 네게 가까워 네 입에 있으며 네 마음에 있다 하였으니 곧 우리가 전파하는 믿음의 말씀이라 9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받으리라(롬 10:8-9)

 

(20230219 강론/주성교회 김영대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