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약강론/요한계시록

19. 요한계시록 5:6-7 책을 취하신 어린 양

불편한 진리 2023. 1. 1. 12: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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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계시록 강론 19

요한계시록 5:6-7

책을 취하신 어린 양

 

사람은 어떤 특정한 종교적 행위가 있는 것을 신앙생활이라고 생각한다. 예컨대 예배, 기도, 찬송, 헌금을 하면서 교회 다니면 예수님을 믿고 하나님을 섬기는 기독교인으로 여긴다. 그런데 문제는 용어만 다를 뿐이지 세상의 모든 종교에 이런 종교적 행위들이 다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기독교 신앙이란 별반 차이 없는 종교 생활에 불과할 뿐이다. 성경에서 복음은 종교 행위로 표현하는 것이 아니라 생명이라고 말씀한다. 하나님께서 생명으로 찾아오신 것이지 우리가 종교적 행위로 하나님께 나아가서 생명을 쟁취하는 것이 아니다.

어쩌면 교회마다 이런 전제를 다 가지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거기에 우리의 신앙 행위가 반드시 드러나야 하는 것으로 덧붙인다는 데 문제가 있다. 단순히 성경만 읽으면 안 되고 Q.T라는 것을 하며 성경을 적극적으로 읽고 묵상해야 하고, 교회에서 시행하는 제자훈련에 참여하여 말씀과 삶이 일치해야 성숙한 신앙인으로 인정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기독교 신앙을 한다는 사람들의 말을 들어보면 대부분 우리가 의식적으로 잘 갖추고 성심성의껏 예배, 기도, 찬송, 헌금을 드리면 하나님이 들으시고 또한 기쁘게 받으시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의 것을 받지 않는다. 다시 말해서 죄인의 것을 받지 않으신다. 생명이시고 의로우신 하나님께서 죽은 죄인의 것을 받으시고 교제한다는 것은 용납이 되지 않는 사안이다. 죄인이 하나님을 만난다는 것은 불가능한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죄인들과 만나고 교제하는 장치를 마련하셨는데 그것이 무엇인가 하면 ‘언약’이라는 것이다. 하나님은 역사 속에서 계속 반복하여 치밀하게 보여주셨다. 비록 이스라엘이라고 할지라도 하나님의 언약에서 합당하지 않는 것이라면 철저히 거부된다. 하나님께서 그것을 통해 보여주고자 하신 것은 언약 안에서만 일하신다는 원칙이었다.

그러므로 구약에서 하나님의 부르심을 입은 이스라엘은 오직 하나님의 언약에 집중해야 했었다. 그러나 인간의 본성이 죄의 권세 아래 있다는 사실을 잘 아시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이 언약에 집중하도록 율법과 함께 여러 가지 제도와 장치를 주셨다. 그것이 곧 절기와 제도, 의식 같은 것들이다. 결국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주어진 유월절을 비롯한 많은 절기, 안식일, 성전, 제사 의식, 제사장, 십일조 제도 등은 언약의 실체이신 메시아를 보내실 것을 알라고 하신 수단이나 도구에 불과한 것이었다.

수단이나 도구가 목적이 될 수 없다. 성전제사나 안식일, 절기를 지키는 것이 결코 목적이 될 수 없다. 오히려 희생 제사를 통해 언약의 실체가 오시면 이렇게 자신들의 죄 때문에 희생하실 것이라는 사실을 인정해야 했다. 성전에서 희생 제사를 드리는 제사장을 보면서 자기를 위한 속죄제가 없는 완전한 성전이신 제사장이 오심을 기다려야 했다. 여러 가지 절기와 안식일을 지키면서 메시아로 말미암는 안식을 기대해야 했었다. 성경은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언약을 인정하지 않았던 죄를 폭로하면서 그 언약의 실체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라고 선언한다.

언약 안에서 예수님의 십자가는 온전한 희생 제사였다. 단번에 드린 의의 제사였기에 더이상 죄인의 제사가 필요하지 않다.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으로 말미암아 차별이 없는 의가 예수 그리스도의 믿음 안에서 주어지게 되었다. 죄인이 의롭게 되는 것은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만 가능하다는 사실이 온전히 밝혀지고 드러났다. 그러므로 성도에게는 여러 가지 제도나 의식 혹은 절기로 언약을 기대하는 일은 없다. 히브리서 기록자는 이렇게 말씀한다.

 

9 이 장막은 현재까지의 비유니 이에 따라 드리는 예물과 제사는 섬기는 자를 그 양심상 온전하게 할 수 없나니 10 이런 것은 먹고 마시는 것과 여러 가지 씻는 것과 함께 육체의 예법일 뿐이며 개혁할 때까지 맡겨 둔 것이니라 11 그리스도께서는 장래 좋은 일의 대제사장으로 오사 손으로 짓지 아니한 것 곧 이 창조에 속하지 아니한 더 크고 온전한 장막으로 말미암아 12 염소와 송아지의 피로 하지 아니하고 오직 자기의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 단번에 성소에 들어가셨느니라(히 9:9-12)

 

10절에서 “개혁”이란 제도나 기구를 새롭게 고치는 정도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헬라어 ‘디오르도시스’란 말은 ‘본래의 상태로 회복시키는 것’을 의미한다. 하나님께서 원하셨던 것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본래의 상태로 회복되었다는 것이다. 요한계시록은 이 본래의 상태인 하늘을 보여준다. 요한 사도가 본 하늘은 보좌에 모든 관심이 집중되는 곳이었다. 그곳에서 벌어지고 있는 현상은 보좌에 앉으신 분에게 영광과 찬양과 존귀를 돌려드리는 것이었다.

그런데 요한 사도는 하나님의 오른손에 일곱 인으로 봉한 책이 있는 것을 발견하고 울었다. 능히 책을 펴거나 보거나 할 자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때 장로 중의 하나가 요한에게 “유대 지파의 사자 다윗의 뿌리가 이겼으니”(5:5)라고 하면서 그분이 인을 떼시리라고 가르쳐준다. 그래서 요한이 자세히 보니 보좌와 네 생물과 장로들 사이에 어린 양이 서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내가 또 보니 보좌와 네 생물과 장로들 사이에 한 어린 양이 서 있는데 일찍이 죽임을 당한 것 같더라 그에게 일곱 뿔과 일곱 눈이 있으니 이 눈들은 온 땅에 보내심을 받은 하나님의 일곱 영이더라”(6절). “사이”라고 한 헬라어 ‘메소스’는 ‘중심, 한가운데’라는 뜻인데 시간적으로나 공간적으로 중심의 위치를 의미한다. 어린 양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중심이라는 뜻이다. “유대 지파의 사자 다윗의 뿌리”이신 분이란 왕으로서 다스리시기에 충분하신 분이다. 언약을 완성하신 분이시기에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지고 다스리실 수 있는 분이다. 그런데 “사자”를 왜 여기서 새삼스럽게 “어린 양”으로 묘사하나?

그 이유는 유다 지파의 사자요 다윗의 뿌리로 오신 그분이 어떻게 승리하셨는가를 설명하기 위한 것이다. 이런 점에서 “일찍이 죽임을 당한 것 같더라”라고 하였는데 십자가 죽임을 당한 것 같이 보인다는 비현실적인 것을 가상하여 말하는 것이 아니라 죽임을 당했는데 살아 계심을 함의하는 표현이다. 즉 ‘죽임을 당한 것으로 끝난 것 같은데 그것이 아니라 살아 계신다’라는 의미로 “일찍이 죽임을 당한 것 같더라”라고 하였다. 어린 양이란 출애굽기 12장에서 유월절 양을 말씀한 것이다.

 

내가 애굽 땅을 칠 때에 그 피가 너희가 사는 집에 있어서 너희를 위하여 표적이 될지라 내가 피를 볼 때에 너희를 넘어가리니 재앙이 너희에게 내려 멸하지 아니하리라(출 12:13)

 

피의 사건은 수수께끼 같은 사건이 아니었고 신비로운 미신이 아니었다. 죄인들을 대신하여 제물로 드린 순전하고 흠 없는 양을 통해 희생양으로 보내실 메시아를 나타내고자 하셨다. 이런 점에서 중심에 “한 어린 양이 서 있는데”라는 말씀은 헬라어로 ‘히스테미’를 써서 하나님께서 세우신 그 언약을 어린 양이 완성하셨다는 의미로 드러내고 있다. 이는 이미 이사야 53장에 예언된 말씀이다.

 

6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7 그가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에도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음이여 마치 도수장으로 끌려 가는 어린 양과 털 깎는 자 앞에서 잠잠한 양 같이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사 53:6-7)

 

이러한 예언의 말씀에 근거하여 세례자 요한은 예수님을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요 1:29)이라고 하였고, 바울 사도도 “너희는 누룩 없는 자인데 새 덩어리가 되기 위하여 묵은 누룩을 내버리라 우리의 유월절 양 곧 그리스도께서 희생되셨느니라”(고전 5:7)라고 하였으며. 또한 베드로 사도도 죄인들의 구원은 “오직 흠 없고 점 없는 어린 양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된 것이니라”(벧전 1:19)라고 선언하였다. 그러므로 희생양은 십자가에서 대속의 죽음을 이루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말씀한 것이다.

결국 “사자”와 “어린 양”이라는 대조적인 두 모습을 나열함으로 진정한 승리가 어떻게 이루어지게 되었는가를 설명하려는 것이다. 즉 유다 지파의 사자와 같은 다윗의 뿌리이신 예수님의 왕적인 승리가 어린 양처럼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음으로 쟁취된 것임을 말씀한 것이다. 다시 말해서 사자 같은 분이시지만 힘으로 제압하여 승리한 것이 아니라 어린 양처럼 나약한 모습으로 처참하게 십자가의 죽음으로 이루어낸 승리라는 뜻이다.

“일곱 뿔”이란 힘, 능력을 나타내는 은유적 표현이다(신 33:17, 삼상 2:10, 왕상 22:11, 시 89:17). 17장에 가면 “열 뿔”을 가진 자를 언급하는데 그것과 대조하여 ‘7’이라는 언약의 수를 사용하여 언약을 완성하신 분으로 강조한 것이다. 성경에서 원수들을 물리치고 기름 부음 받은 자의 뿔이 드러날 것을 구원으로 말씀한다.

 

여호와를 대적하는 자는 산산이 깨어질 것이라 하늘에서 우레로 그들을 치시리로다 여호와께서 땅 끝까지 심판을 내리시고 자기 왕에게 힘을 주시며 자기의 기름 부음을 받은 자의 뿔을 높이시리로다 하니라(삼상 2:10)

 

여호와는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요새시요 나를 건지시는 이시요 나의 하나님이시요 내가 그 안에 피할 나의 바위시요 나의 방패시요 나의 구원의 뿔이시요 나의 산성이시로다(시 18:2)

 

“일곱 눈”이란 스가랴 선지자의 예언을 생각나게 한다.

 

작은 일의 날이라고 멸시하는 자가 누구냐 사람들이 스룹바벨의 손에 다림줄이 있음을 보고 기뻐하리라 이 일곱은 온 세상에 두루 다니는 여호와의 눈이라 하니라(슥 4:10)

 

하나님의 깊은 것을 아시고 그것을 자기 백성에게 계시하시며 그것으로 말미암아 예수 그리스도를 좇게 하시는 분은 성령님이시다. 성령님은 늘 자기 백성들을 보살피고 계신다. 이러한 성령님의 사역은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셔서 하나님의 언약에 온전히 순종하신 결과로 말미암아 이루어진 것이다. 그래서 “이 눈들은 온 땅에 보내심을 받은 하나님의 일곱 영이더라”라고 밝혀주고 있다.

결국 1:4에서 “보좌 앞에 있는 일곱 영”을 4:5에서 “보좌 앞에 켠 등불 일곱이 있으니 하나님의 일곱 영”이라고 하였고, 1:12-13에서 “일곱 금 촛대(등잔대)”를 보았는데 “사이(중심)에 인자”가 계셨다. 3:1에서 “일곱 영과 일곱 별을 가지신 이”가 예수 그리스도이신데 한마디로 정리하자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언약의 완성에 근거하여 성령으로 온 땅을 다스리고 계심을 의미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그 어린 양이 나아와서 보좌에 앉으신 이의 오른손에서 두루마리를 취하시니라”(7절). 어린 양이 그 책을 취한다는 것은 어린 양으로 말미암아 이루어지는 일이 철저히 하나님의 언약에 의한 것이며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이루시는 일이라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언약의 책을 취하실 수 있는 분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뿐이다. 그래서 “일곱 뿔”, “일곱 영”으로 언약의 완성이 “어린 양”이라고 말씀하였다. 이십사 장로의 찬양은 어린 양으로 희생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은혜에 근거한 것이다. 십자가에서 그 영을 넘겨주셨기에 성령께서 오늘도 자기 백성들을 살펴보고 계신다. 이것이 어린 양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로 다스리심이다.

기독교는 매 주일이나 수요일, 금요일에 종교적인 의식을 정기적으로 행하는 종교가 아니다. 절기를 지키고 송구영신 예배로 새해를 맞아야 하는 것이 아니다. 형식과 의식을 언제 어떻게 하며, 어떤 순서로 하느냐는 문제를 중시하는 종교가 아니다. 나의 선한 행위를 보여주어야 하는 것이 복음이 아니다. 우리는 여전히 죄 가운데 있는데 2023년 1월 1일을 맞이하는 오늘이 어제와 다른 날인가? 오히려 오직 십자가에서 희생하신 어린 양 안에서 나는 죽은 죄인의 모습으로 드러나는 것이 생명이다. 하나님께서 자기 피로 사신 교회이기 때문이다(행 29:28, 히 13:12). 나는 어린 양의 희생 안에서 그 피를 마음에 담은 자로 살고 있는가?(20230101 강론/주성교회 김영대 목사).

 

계19.0506-07 책을 취하신 어린 양(20230101).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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