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 요한계시록 4:4-8 이십사 보좌와 네 생물
요한계시록 강론 16
요한계시록 4:4-8
이십사 보좌와 네 생물
오늘날의 한국 교회는 목사가 어떤 신학을 지향하느냐 또는 교회 역사 안에서 세워진 어떤 교리와 신조를 받아들이는가는 중요하지 않은 문제로 보인다. 보수적이며 개혁적인 것을 지향하는 교회나 오순절 신학을 지향하는 교회나 혹은 자유주의 신학을 지향하는 교회이든 상관없이 교회만 크게 키우면 그것이 하나님이 인정하시는 교회라고 하는 사고방식이 팽배해 있다.
교인들의 수를 많게 하는 일이라면 목사는 무엇이든지 할 각오가 되어 있다. 개척 교회를 열어서 몇 개월 혹은 몇 년 만에 문을 닫는다는 것은 수치스러운 것으로 여긴다. 교회를 크게 부흥시킨 목회자만 대접받고 인간 취급받는 세상이 지금의 한국 기독교계이다. 이런 이야기하는 저만 잘났고 바르다는 뜻이 결코 아니다. 이것이 우리의 현주소이고 죄악 된 모습의 실상이라는 것이다. 복음이냐 아니냐 하는 문제를 이야기하고 싶은 것이다. 복음에 의해 예수 그리스도를 머리로 한 그의 몸 된 교회인가를 묻고 싶은 것이다.
요한 사도는 지상의 일곱 교회를 통해 예수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가 어떤 것인지를 보여준 다음 장면을 전환하여 하늘의 모습을 보여준다. 하늘에 열린 문이 있는데 “이리로 올라오라!”라는 주님의 음성이 있었다. 요한이 성령 안에서 본 것은 다름 아닌 보좌였다. 아니 하늘의 열린 문에 보니 자연스럽게 보좌에 시선이 집중될 수밖에 없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보좌가 중심이 된 나라, 완성된 하늘 성전, 그것이 열린 문의 하늘 상황이었다.
계속해서 요한 사도가 본 것은 “또 보좌에 둘려 이십사 보좌들이 있고 그 보좌들 위에 이십사 장로들이 흰옷을 입고 머리에 금관을 쓰고 앉았더라”(4절)라고 하였는데 이런 말씀도 만화 같은 분위기로 상상해서는 곤란하다. 성경에 이런 표현들 때문에 사이비 종파들의 교주들을 보면 면류관 같은 것을 만들어 쓰고 요한계시록의 말씀을 문자적으로 적용해서 어린이 놀이방 같은 분위기로 꾸미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요한계시록의 표현은 하늘의 상황을 이 땅의 언어로 표현한 것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이십사 장로”란 구약을 배경으로 한다. 아니 신약에서 완성된 것을 구약에 미리 보여주신 것인데 ‘장로’(히, ‘자켄’)는 ‘나이 먹은, 늙은, 노인’이라는 뜻으로 이스라엘의 지도자, 대표로 표현되는 용어이다(출 3:16,18, 4:29, 12:21, 민11:14-17, 수 7:6 등). “엘르아살의 자손 중에 우두머리가 이다말의 자손보다 많으므로 나눈 것이 이러하니 엘르아살 자손의 우두머리가 열여섯 명이요 이다말 자손은 그 조상들의 가문을 따라 여덟 명이라”(대상 24:4)라고 하여 제사장 그룹을 ‘이십사’로 표현한다. 아론 계통의 이십사 제사장들이 많은 제사장을 대표하여 선출된다는 점에서 대표성을 상징한다고 볼 수 있다(참고 대상 25:9-31).
모세와 아론과 나답과 아비후와 이스라엘 장로 칠십 인이 올라가서 10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보니 그의 발 아래에는 청옥을 편 듯하고 하늘 같이 청명하더라(출 24:9-10)
그 때에 달이 수치를 당하고 해가 부끄러워하리니 이는 만군의 여호와께서 시온 산과 예루살렘에서 왕이 되시고 그 장로들 앞에서 영광을 나타내실 것임이라(사 24:23)
하나님께서 왕으로서 영광이 드러나는 현장에 이스라엘의 장로들을 언급한다. 구약에서 이스라엘을 대표한 이십사 장로를 요한 사도가 언급한 것은 단순히 구약만 이야기한 것으로 볼 수 없다. 구약에서 보여준 이십사 장로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완성된 의미로 나타낸다. 이런 점에서 구약의 열두 지파와 신약에서 열두 지파를 상징하는 열두 사도로 표현하여 ‘이십사’라는 숫자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완성된 교회를 의미한다.
“흰옷을 입고”라는 표현을 정확하게 하면 ‘흰옷이 입혀져’이다. 이십사 보좌에 앉은 장로들에게 흰옷이 입혀졌다는 것은 하나님의 의로움이 입혀져 정결해졌다는 의미이다. “머리에 금관을 쓰고 앉았더라”라는 말씀은 승리와 영광의 상징으로 주님과 더불어 다스리고 있음을 의미한다. 결국 하늘의 보좌와 그 보좌를 두르고 있는 이십사 보좌의 장로들 모두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 된 자기 백성들과 함께 다스리고 계심을 보여주는 것이다.
“보좌로부터 번개와 음성과 우렛소리가 나고 보좌 앞에 켠 등불 일곱이 있으니 이는 하나님의 일곱 영이라”(5절). 보좌에서 번개와 음성과 우렛소리가 나는 이 모습은 시내 산에서 이스라엘과 언약을 맺으시며 율법의 말씀이 주어질 때의 모습을 반영한 것이다. 시내 산의 모습을 성막에 옮겨 놓은 것이고 성막의 모습은 곧 하늘 성전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셋째 날 아침에 우레와 번개와 빽빽한 구름이 산 위에 있고 나팔 소리가 매우 크게 들리니 진중에 있는 모든 백성이 다 떨더라(출 19:16)
이것은 보좌에서 나오는 말씀의 위상을 표현한 것으로 보좌에서 위엄과 권위의 말씀으로 심판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나타내 준다. 또한 “보좌 앞에 켠 등불 일곱이 있으니 이는 하나님의 일곱 영”이라고 하였는데 천지 창조 때 혼돈과 공허와 흑암의 상태에서 생수의 근원을 품고 일하고자 하셨던 그 하나님의 영(창 1:2)이 십자가의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온전히 성취하셨기에 그 완성을 의미한다는 점에서 “하나님의 일곱 영”으로 나타내고 있다.
“보좌 앞에 수정과 같은 유리 바다가 있고”(6a절) “수정과 같은 유리 바다”란 실제 바다가 있다는 말이 아니라 ‘수정 같은 유리 바다 같은 어떤 것’이 있다는 뜻이다. 에스겔에서 이렇게 말씀한다.
그 생물의 머리 위에는 수정 같은 궁창의 형상이 있어 보기에 두려운데 그들의 머리 위에 펼쳐져 있고(겔 1:22)
역대하 4:2-6에서 솔로몬은 지상 성전이 하늘 성전을 반영하고 있는데 놋으로 만든 물두멍을 바다라고 하여 제사장이 정결하게 하는 곳이고, 성전의 거룩성을 유지하는 도구였다. 에스겔 선지서의 궁창에 대한 말씀과 솔로몬 성전에서의 바다를 홍해에서 애굽을 제압하고 이스라엘을 구원하여 바다 위에 앉으심으로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언약이 성취되었다는 차원에서 표현한 것이다(계 15:2-3).
“보좌 가운데와 보좌 주위에 네 생물이 있는데 앞뒤에 눈들이 가득하더라 그 첫째 생물은 사자 같고 그 둘째 생물은 송아지 같고 그 셋째 생물은 얼굴이 사람 같고 그 넷째 생물은 날아가는 독수리 같은데 네 생물은 각각 여섯 날개를 가졌고 그 안과 주위에는 눈들이 가득하더라”(6b-8a절). 에스겔서에 보면 이렇게 말씀한다.
그 얼굴들의 모양은 넷의 앞은 사람의 얼굴이요 넷의 오른쪽은 사자의 얼굴이요 넷의 왼쪽은 소의 얼굴이요 넷의 뒤는 독수리의 얼굴이니(겔 1:10)
5:9과 7:9에서 “족속과 방언과 백성과 나라”라고 하여 네 항목을 언급한 것과 7:1에서 “땅 네 모퉁이”라고 표현한 것을 보면 “네 생물”은 생명체 전체의 질서를 표현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이런 점에서 네 생물이 하늘에 존재한다는 것은 모든 피조물의 원천이 하늘에 있음을 말씀한다. “그 안과 주위에는 눈들이 가득하더라”라는 것은 세상의 그 어떤 것도 숨겨질 수 있는 것이 없다는 뜻이다.
이는 출애굽한 이스라엘에게 성막으로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나타낸다. 그 성막에는 언약궤가 있고 언약궤는 그룹의 형상이 있어 보좌를 상징하는 속죄소라는 덮개로 가려져 있다. 그룹은 말씀을 보호하고 언약궤의 모습은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다스리시는 것을 상징한다(출 25:22). 이스라엘의 이동은 언제나 언약궤를 중심으로 이루어진다. 언약궤를 중심으로 레위 지파가 위치하고 그다음은 세 지파가 네 방향으로 위치한다. 이것은 네 생물이 보좌를 두르고 있는 모습이다. 그래서 “네 생물은 각각 여섯 날개를 가졌고”라고 하였는데 네 방향의 세 지파가 두 날개를 펴고 있는 형상을 한다면 여섯 날개를 가진 모습이 된다. 결국 하나님의 보좌가 있는 언약궤를 중심으로 이스라엘이 배치되는데 이는 곧 “에덴 동산 동쪽에 그룹들과 두루 도는 불 칼을 두어 생명 나무의 길을 지키게 하시니라”(창 3:24)라는 말씀을 나타내신 것이었고 요한계시록 본문에서 네 생물이 보좌를 중심으로 존재하여 온전히 성취된 모습을 보여준다.
“그들이 밤낮 쉬지 않고 이르기를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여 전에도 계셨고 이제도 계시고 장차 오실 이시라”(8b절).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스리시는 네 생물은 처음 창조하신 본연의 모습을 완전하고 충만하게 드러내고 있다. 그 다스림 안에서의 모습은 찬양으로 드러난다.
1 웃시야 왕이 죽던 해에 내가 본즉 주께서 높이 들린 보좌에 앉으셨는데 그의 옷자락은 성전에 가득하였고 2 스랍들이 모시고 섰는데 각기 여섯 날개가 있어 그 둘로는 자기의 얼굴을 가리었고 그 둘로는 자기의 발을 가리었고 그 둘로는 날며 3 서로 불러 이르되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만군의 여호와여 그의 영광이 온 땅에 충만하도다 하더라(사 6:1-3)
요한이 보았던 것은 이사야 선지자가 보았던 것과 같은 모습이었다. 아니 묵시 속에서 이미 완성된 것을 미리 이사야 선지자에게 보여주신 것이었다. 이것이 요한 사도가 본 하늘의 광경이다.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열린 하늘 문의 모습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의롭고 정결하게 된 자기 백성들과 하나 되어 모든 것을 성령에 의해 다스리고 계신다는 것을 요한 사도에게 보여주신 것이다.
요한 사도가 본 것은 요한 혼자만 갑자기 보는 전혀 새로운 것이 아니었다. 이미 창세기 이후에 기록하고 있는 모든 말씀에 다 내포된 것이었다. 이미 성막(성전)을 통해 구약에서 그림 언어로 보여주셨던 그 모습을 그대로 옮겨 놓은 것이다. 아니 묵시 속에서 이미 하늘에 성취된 이 모습을 구약에서 미리 보여주신 것이었다. 예수 그리스도는 창조 때부터 언제나 하나님 왕국의 중심이 되셔서 자기 백성들을 이렇게 다스리셨다.
내가 또 보니 보좌와 네 생물과 장로들 사이에 한 어린 양이 서 있는데 일찍이 죽임을 당한 것 같더라 그에게 일곱 뿔과 일곱 눈이 있으니 이 눈들은 온 땅에 보내심을 받은 하나님의 일곱 영이더라(계 5:6)
그러므로 여기서 하늘이란 새로운 다른 공간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차원의 세계이다. 하늘의 보좌에 어린 양이신 예수님께서 앉아 계신다는 것은 새로운 세계가 십자가에서 희생당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움직여지고 있음이 온전히 다 드러난 것이다. 그러기에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것은 세상에 의해 거부당하고 세상의 미움을 받을 수밖에 없다.
18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면 너희보다 먼저 나를 미워한 줄을 알라 19 너희가 세상에 속하였으면 세상이 자기의 것을 사랑할 것이나 너희는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요 도리어 내가 너희를 세상에서 택하였기 때문에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느니라(요 15:18-19)
(20221127 강론/주성교회 김영대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