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구약강론/창세기

21. 창세기 3:21-24 생명 나무의 길

불편한 진리 2022. 11. 13. 14: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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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 강론 21

창세기 3:21-24

생명 나무의 길

 

구약은 약 1,100년경, 신약은 1,500년경부터 성경의 장절을 구분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니 성경을 기록된 말씀으로 주어진 이후 쉽게 찾고 읽기 위해 장절을 후대에 만들면서 하나님께서 성경을 통해 말씀하고자 하신 뜻을 생각하지 못한 상태에서 우리의 편의대로 만든 것이다. 그러다 보니 어떤 장절에서는 본문의 의미를 연결해서 생각해야 할 부분에서 문맥을 끊어버리는 경우들이 많기에 장절을 넘어 폭넓게 성경을 봐야 할 필요성이 있다.

4장 이후는 에덴동산 밖에서 일어난 일들이다. 그래서 3장의 마지막 이 본문을 단순히 아담과 하와가 에덴동산에서 쫓겨났다는 것으로만 읽고 이해한 것으로 끝난다. 그렇게만 본다면 우리는 이 본문을 통해 말씀하고자 하시는 복음을 읽어내기 힘들다. 모든 말씀들을 복음으로 설명하려는 과도한(?) 열심으로 무조건 예수 그리스도의 피 또는 십자가와 연결시키면 다 좋은 해석으로 생각하는 것 같다. 그러다 보니 무리하게 상상을 동원한 해석을 한다.

그 대표적인 예가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가죽옷을 입히셨다는 것이다. 가죽옷을 입혔다는 것은 짐승을 잡아야 하니 피를 흘리는 것은 당연하다는 전제를 가지고 가죽옷을 예수 그리스도의 피 흘리심에 대한 계시로 보는데 그것은 우리의 상상일 뿐이다. 해석이 아니라 이렇게 했을 것이다. 저렇게 했을 것이라는 우리의 추측에 불과한 것이다. 성경이 예수님의 피 흘리심에 대한 계시를 주시려면 정확하게 주셨을 것이지 우리가 상상하여 해석하도록 맡겨두신 성경이 아니다.

3장은 여자가 선악의 지식 취한 이후 하나님께서 진노와 심판을 발산하신 내용이 아니라 복음을 말씀하신 것임을 우리는 계속 상고하면서 3장의 마지막 본문까지 왔다. 다시 말해서 아담과 하와 뱀에게 처절한 응징을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의 날로 말씀하시고 그 속에서 복음으로 나타내셨다. 이런 점에서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과 그의 아내를 위하여 가죽옷을 지어 입히시니라”(21절)라고 하신 말씀을 갑자기 피에 대한 것으로 복음을 말씀하셨겠는가 하는 것이다.

여기서 “아담과 그의 아내를 위하여”라고 하였는데 정확하게 표현하자면 ‘그 사람과 그 여자의’라는 말이다. 히브리어로 정관사가 붙은 ‘하 아담’이다. 우리 성경에서는 2:5,7,8,15,16,18에서는 “사람”으로 번역하였으나 같은 표현을 2:19부터 갑자기 “아담”이라고 번역하였다. 사람과 아담을 같은 것으로 본다는 것이 뭐가 문제인가라고 생각할 수 있겠지만 히브리어에서 사람 이름에 정관사를 붙이는 경우는 없다. 이런 점에서 성경은 ‘사람’이라는 표현을 한 것이지 ‘아담’이라는 특정 개인을 말씀하는 것이 아니다(5:1에서 비로소 “아담”이 이름으로 기록되었다). 그러므로 성경은 ‘사람’에 대한 계시로 전제하고 말씀한 것이지 아담과 하와가 에덴 동산에서 쫓겨난 사건을 말씀하는 것이 아니다.

“가죽옷”은 히브리어로 ‘케토네트 오르’인데 ‘케토네트’는 ‘세마포, 긴 옷, 덮개’를 의미한다. 가죽옷으로 생각하기보다 ‘가죽 덮개’라고 생각하는 것이 좋겠다. 일차독자의 입장에서 ‘가죽’이라고 하였을 때 그들이 늘 보는 것은 성막의 덮개이고 또한 제사에서 동물의 가죽을 처리하는 것이다. 성막의 덮개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씀한다.

 

붉은 물 들인 숫양의 가죽으로 막의 덮개를 만들고 해달의 가죽으로 그 윗덮개를 만들지니라(출 26:14)

 

성막의 지붕는 네 겹의 덮개로 되어 있는데 안쪽에서부터 첫 번째는 삼색 실 앙장이고, 두 번째는 염소털 실 앙장이고, 세 번째는 붉은색 숫양 가죽 덮개이고, 네 번째는 해달 가죽 덮개이다. 이 가죽 덮개로 인해 성막의 안을 볼 수 없다. 볼 수 없다고 해서 성막 안에 아무 것도 없는 것이 아니라 성막 안은 등잔대, 떡상, 분향단, 언약궤가 있지만 가죽으로 덮혀 있기 때문에 밖에서는 볼 수 없는 상태였다. 다시 말해서 언약궤를 비롯한 성막의 모든 기구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상징들인데 가죽 덮개를 제거해야 볼 수 있는 것이다.

 

10 너는 수송아지를 회막 앞으로 끌어오고 아론과 그의 아들들은 그 송아지 머리에 안수할지며 11 너는 회막 문 여호와 앞에서 그 송아지를 잡고 12 그 피를 네 손가락으로 제단 뿔들에 바르고 그 피 전부를 제단 밑에 쏟을지며 13 내장에 덮인 모든 기름과 간 위에 있는 꺼풀과 두 콩팥과 그 위의 기름을 가져다가 제단 위에 불사르고 14 그 수소의 고기와 가죽과 똥을 진 밖에서 불사르라 이는 속죄제니라(출 29:10-14)

 

속죄제에 대한 규례에서 특이점은 제사장이 제물의 피를 휘장 앞에 일곱 번 뿌리고 분향단 뿔에 바른 후 나머지는 번제단 밑에 쏟는다. 성소에 피가 뿌려지는 것은 인간의 죄가 성소를 날마다 더럽히고 있다는 것을 전제한다. 그리고 기름과 내장은 번제단에 태우고 제물의 나머지 부분, 즉 “고기와 가죽과 똥”은 진영 바깥 재 버리는 곳에서 불사르게 되어 있다(레 4:1-12).

“고기”는 히브리어로 ‘바사르’인데 ‘살, 육체’라는 말이다. 창세기 17:11에 보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할례를 명하시면서 “너희는 포피를 베어라 이것이 나와 너희 사이의 언약의 표징이니라”라고 말씀하셨는데 “포피”가 ‘바사르’이다. 잘라내는 ‘살, 육체’라는 뜻이다. 이런 점에서 “고기와 가죽과 똥”을 같은 것으로 취급하여 불살랐다는 것은 이스라엘 진 밖으로 버려야 하는 것이며 하나님의 심판의 대상이 된다는 의미이다. 이 말씀의 성취를 히브리서 기록자는 이렇게 말씀한다.

 

11 이는 죄를 위한 짐승의 피는 대제사장이 가지고 성소에 들어가고 그 육체는 영문 밖에서 불사름이라 12 그러므로 예수도 자기 피로써 백성을 거룩하게 하려고 성문 밖에서 고난을 받으셨느니라 13 그런즉 우리도 그의 치욕을 짊어지고 영문 밖으로 그에게 나아가자(히 13:11-13)

 

가죽옷을 입혔다고 하니까 단순히 가죽옷을 입히시려면 동물을 잡아야 하고 동물을 잡으면 피를 흘리는 일이 있어야 하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피 흘리심을 보여주는 계시라고 해석하기에는 우리의 상상을 동원한 무리한 해석이다. 오히려 성경이 말씀하는 것은 버려야 하고 하나님의 심판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다는 의미로 가죽옷을 입히신 것이었다. 다시 말해서 누군가가 심판의 대상이 되어 버려지고 죽임을 당함을 상징하는 가죽옷을 벗겨내고 새로운 옷을 입히실 것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는 입히심이 가죽옷이다. 그래서 가죽옷은 벗겨내야 하는 옷으로 심판을 보여준다. 그 심판을 예수 그리스도께서 홀로 다 담당하신 것이었다. 그러므로 구원이란 반드시 심판이 전제되어 있고 그 심판 속에서 주어지는 새로운 입히심, 덮으심이다.

“여호와 하나님이 이르시되 보라 이 사람이 선악을 아는 일에 우리 중 하나 같이 되었으니 그가 그의 손을 들어 생명 나무 열매도 따먹고 영생할까 하노라 하시고”(22절). 우리 성경에 여기서는 또 아담이라고 번역하지 않고 제대로 “이 사람”이라고 하였다. 단수의 한 사람을 지칭한 것이다. “우리 중 하나 같이 되었으니”라는 표현은 히브리어 ‘밈멘누’라는 말인데 ‘~으로부터, ~에 의하여, ~와 함께’라는 뜻이다(이 표현은 2:17에 2번, 3:3,5,11,17,22에 쓰였다). “손을 들어”라는 말은 히브리어로 ‘샬라흐’인데 ‘버리다, 보내다, 갈라서다, 파송하다’라는 뜻이다. ‘이 사람’이라는 존재를 통해 생명 나무를 취하여 영생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보여주시겠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이 말씀은 단순히 아담이 선악의 나무를 취함으로 하나님과 같이 되어 하나님께서 우리와 같은 존재가 되었으니 더 이상 생명 나무에 접근하지 못하도록 빨리 막아야 한다는 의미가 아니라 진짜 사람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늘에서 보냄을 받아 이 땅에 오심으로 생명 나무를 취하는 영생을 이루시겠다는 약속이다(참고 빌 2:6-8).

 

3 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은 하시나니 곧 죄로 말미암아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육신에 죄를 정하사 4 육신을 따르지 않고 그 영을 따라 행하는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가 이루어지게 하려 하심이니라(롬 8:3-4)

 

예수님은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아 육의 상태로 율법의 저주 아래로 오셨다. 그래서 십자가에서 하나님의 버리심을 처절하게 선언하셨던 것이다.

 

제구시쯤에 예수께서 크게 소리 질러 이르시되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시니 이는 곧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는 뜻이라(마 27:46)

 

“여호와 하나님이 에덴동산에서 그를 내보내어 그의 근원이 된 땅을 갈게 하시니라”(23절). 여기서도 “내보내어”라는 말은 ‘샬라흐’이다. “근원”이라는 말의 히브리어 ‘라카흐’는 ‘취하다’라는 뜻이고 “갈게 하시니라”라는 히브리어 ‘아바드’는 ‘섬기다, 예배하다’라는 뜻이다. 그렇다면 이 말씀은 아담이 에덴동산에서 쫓겨나서 자기 자신의 근본이 되는 땅을 일구며 사는 존재가 된다는 저주가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께서 에덴동산으로부터 진짜 사람을 보내어 땅을 취하여 땅을 섬기게 하시겠다는 약속이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요 5:24)

 

살아 계신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시매 내가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는 것 같이 나를 먹는 그 사람도 나로 말미암아 살리라(요 6:57)

 

“이같이 하나님이 그 사람을 쫓아내시고 에덴동산 동쪽에 그룹들과 두루 도는 불 칼을 두어 생명 나무의 길을 지키게 하시니라”(24절). “그룹들”(히, ‘케루브’)이란 단순히 천사로만 생각할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보내심을 받아 하나님의 일을 하는 존재로 생각해야 할 것이다. 일차독자의 입장에서는 성막의 언약궤 위에 속죄소로 덮혀 있는 것을 생각할 수밖에 없다. 즉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은 자의 날개로 언약의 말씀으로 주신 돌판과 이스라엘의 죄의 증거들(만나의 항아리, 싹난 지팡이)을 덮고 있는 것을 통해 메시아가 오시면 온전한 말씀으로 드러날 것을 기대하는 것이 되었다.

 

그룹들이 그 날개를 높이 펴서 그 날개로 속죄소를 덮었으며 그 얼굴은 서로 대하여 속죄소를 향하였더라(출 37:9)

 

“두루 도는”이란 표현은 히브리어로 ‘하파크’인데 ‘변화시키다, 뒤집어엎다’라는 뜻이다. “불”이란 심판을 상징하고 “칼”이란 말씀을 의미한다. 이스라엘의 성막 입구는 ‘동쪽’이었다. 이런 점에서 여호와 하나님께서 동쪽으로부터 오는 생명 나무를 취하는 길을 두심으로 참사람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보내심을 받아 홀로 버림을 당하는 심판을 통해 말씀으로 뒤집어엎어 생명 나무와 하나 되는 길이 되게 하시겠다는 약속이다. 예수님께서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화평이 아니요 검을 주러 왔노라”(마 10:34)라고 하신 것은 말씀이신 자신을 주시겠는 선언이다.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만 생명의 길이시고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 영생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 14:6)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요 17:3)

 

(20221113 강론/주성교회 김영대 목사).

 

창21.0321-24 생명 나무의 길(20221113).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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