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 창세기 3:13-16 언약-심판과 구원
창세기 강론 19
창세기 3:13-16
언약 - 심판과 구원
창세기 말씀을 나누면서 우리는 계속 하나님의 언약적 관점에서 이해하고 그 언약이 드러내는 실체는 예수 그리스도이심을 늘 확인했었다. 그러므로 새삼스럽게 하나님께서 언약을 주셨다는 의미로 생각해야 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창세기는 처음부터 계속 하나님의 언약을 드러내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오늘날 신학적 관점에서는 앞의 본문들을 언약으로 보지 못했기 때문에 3:15절을 ‘원시 복음’ 혹은 ‘원 복음’이라는 표현으로 하나님께서 뱀을 저주하신 말씀 속에 특별히 언약을 주셨다고 해석하는데 굳이 3:15에 한정시켜 그렇게 보아야 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문자에 매여 성경 전체적인 관점에서 이해되지 못하고 만화 같은 상상으로 본문을 설명하려고 하는 경향이 있다. 예컨대 뱀이 본래는 발이 있었는데 저주를 받아 배로 다니게 되었다는 식의 설명이다. 그리고 과학자들은 이 말씀을 문자적으로 맞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연구를 하였는데 이렇게 설명하는 것을 보았다.
“뱀의 입천장 앞쪽에 있는 화학물질 감지기관인 야콥슨기관(Jacobson’s organ)을 설명하면서 이러한 주장에 대해 응답한다. 야콥슨기관은 뱀이 냄새를 맡는 것을 도와준다. 뱀의 갈라진 혀는 뱀의 주변을 감지하기 위해서 빠르게 내밀어지면서, 간혹 땅을 핥고, 먼지 입자들을 채취해서 입속으로 가져온다. 뱀은 혀를 끌어당겨, 갈라진 혀의 끝을 야콥슨기관의 두 구멍 안으로 삽입한다. 그곳에서 입자들은 분석되어지고 확인되어진다. 뱀의 뇌는 그 냄새를 읽을 수 있고, 혀를 통해 맛을 볼 수 있다. 따라서 그러한 방법으로 뱀은 정말로 흙을 먹는 것이다.”
이런 증명이 성경을 예수 그리스도로 이해하는 일에 무슨 의미가 있는가? 그저 문자적으로 과학적 사실을 증명하면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것인가? 성경은 과학적으로 증명한다고 해서 이해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또한 문자 속에는 예수 그리스도가 없다. 그렇다면 우리는 성경이 언약적 관점에서 무슨 의미로 전하고 있는가를 생각해야 할 것이다.
8절에서 “아담과 그의 아내가 여호와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동산 나무 사이에 숨은지라”라는 말씀이 단순히 아담과 하와가 나무 사이에 숨은 것이 아니라 선악의 지식 나무 한가운데 있었다는 뜻이다. 이런 점에서 하나님께서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9절)라는 물음은 아담과 하와가 어떤 상태에 있는가를 물으신 것이었다. 즉 선악의 나무와 하나 된 상태를 확인하라는 의미의 말씀이었다.
그런데 10절에 보면 아담이 “내가 벗었으므로 두려워하여 숨었나이다”라고 답변한다. 하나님은 인간을 벌거벗은 상태의 몸으로 창조하셨다. 벌거벗음 자체가 문제가 될 수 없는데 선악의 나무를 취한 인간은 스스로 벌거벗은 것이 문제가 된다고 생각하고 하나님 앞에 두려운 상태가 되었다는 것이다. 사실 부끄러워하고 두려워해야 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먹지 말라고 하신 말씀을 어긴 행위여야 하고 죽는다는 것에 대해 두려워해야 한다.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신다. “누가 너의 벗었음을 네게 알렸느냐 내가 네게 먹지 말라 명한 그 나무 열매를 네가 먹었느냐?”(11절). 누구도 아담에게 벗었다는 사실을 알려주지 않았다. 그러나 우리가 여기서 한 가지 합리적인 생각으로 연결될 수 있는 것은 선악의 지식 나무를 취한 것이 벗었음을 알게 한 것이라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누군가 알려준 것이 아니라 아담 스스로 알게 된 것이다. 단순히 벗었다는 것을 의식한 것이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벗겨 놓으신 상태를 스스로 하나님 앞에 잘못된 것으로 받아들이고 두려워한 것이다.
이것이 선악의 나무를 취한 모든 인간들의 속성이다. 스스로 율법을 정하여 하나님 앞에 서려고 한다. 하나님의 기준이 어떤가에 대한 관심은 없고 그저 자기 선악 체계에 빠져 선하고 악한 것을 스스로 정한다는 것이다. 이 때문에 아담과 여자는 상대를 타인으로 삼고 끝없이 자기 잘못을 전가하고 자신은 거기서 벗어나려 한다. 이것이 자존심이고 그 자존심은 우리의 죄성이다. 그래서 우리는 영생을 취하려고 끝없이 타인을 거부하며 자기 자존심을 앞세워 하나님께 나아가려고 하나 그것은 영생을 도둑질하는 행위에 불과하다.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물으신 것은 이것이었다. 스스로 자신의 실상을 확인해 보라는 것이다. 그러나 아담은 선악의 나무라는 율법 한가운데서 자기 중심으로 선악 체계를 다진다. 스스로 자신의 실상을 이제 확인할 수 있는 위치에 있는 상태가 아닌 것이 드러난다. 그래서 한 몸의 관계 안에 있는 자를 타인으로 치부하고 죄를 전가하는 죄성을 그대로 드러낸다. “하나님이 주셔서 나와 함께 있게 하신 여자 그가 그 나무 열매를 내게 주므로 내가 먹었나이다”(12절)라는 것이 아담의 답변이었다.
이제 하나님께서 또 물으신다. “여호와 하나님이 여자에게 이르시되 네가 어찌하여 이렇게 하였느냐?”(13절a). 그러자 여자는 “뱀이 나를 꾀므로 내가 먹었나이다”(13b)라는 답변을 한다. 하나님께서 몰라서 이렇게 물으신 것이 아니라 죄의 근원을 밝히시고 그에 대한 심판을 선언하시는 차원에서 이렇게 물으신 것이다.
“여호와 하나님이 뱀에게 이르시되 네가 이렇게 하였으니 네가 모든 가축과 들의 모든 짐승보다 더욱 저주를 받아 배로 다니고 살아 있는 동안 흙을 먹을지니라”(14절)라고 하였는데 “가축”이란 집에서 기르는 동물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생물, 살아 있는 모든 것들’이라는 말이다. 우리 성경의 이 말씀은 마치 모든 동물이 저주를 받았는데 뱀이 더더욱 큰 저주를 받은 것처럼 이해되는 번역인데 사실은 그런 뜻이 아니다. “모든 짐승보다 더욱 저주를 받아”라는 말씀을 직역하면 ‘모든 육축과 모든 짐승들로부터 구별된 저주를 받으리라’라는 말이다.
“배로 다니고 살아 있는 동안 흙을 먹을지니라”라는 말씀은 고대 근동 지방에서 전쟁에 승리하면 승리한 자가 패배한 자의 엎드려 놓고 그 위에 올라서서 승리를 표현하였었다. 그렇다면 이 말씀은 뱀이 본래 발이 있었는데 저주를 받아서 이제 발이 없어졌다는 것을 말씀한 것이 아니라 패배자의 모습을 상징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배를 땅에 대고 흙을 먹는 것 같은 상태가 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상태를 표현함으로 성경이 궁극적으로 말씀하고 한 것이 무엇인가? 그것은 이미 1:30에서 풀을 먹을 것으로 주신 땅에 기는 모든 존재를 말씀하신 것에서 그 의미를 발견할 수 있다. 씨 가진 것을 먹지 못하고 풀을 먹는 동물, 짐승의 상태를 나타낸 것이라고 본다면 배를 땅에 대고 땅만을 바라보면서 땅이 전부인 것으로 여기고 사는 육의 상태를 표현한 말씀이다. 이때 땅, 흙이란 하늘과 대비된 땅이고 흙이다.
47 첫 사람은 땅에서 났으니 흙에 속한 자이거니와 둘째 사람은 하늘에서 나셨느니라 48 무릇 흙에 속한 자들은 저 흙에 속한 자와 같고 무릇 하늘에 속한 자들은 저 하늘에 속한 이와 같으니 49 우리가 흙에 속한 자의 형상을 입은 것 같이 또한 하늘에 속한 이의 형상을 입으리라(고전 15:47-49)
첫 사람 아담이 흙으로 지어졌다는 것은 흙에 속한 존재, 땅에 속한 존재라는 것을 보여줌과 동시에 하늘의 신령한 형상을 입게 될 것을 암시하는 상태였다. 이런 점에서 아담은 선악의 나무를 취함으로 뱀이 전한 메시지를 받아 뱀이 말한 선악의 나무와 하나 되는 것을 통해 육에 속한 존재라는 것을 더욱 분명하게 보여주는 존재였다. 그래서 요한계시록에서 창세기의 이 말씀을 배경으로 땅에 내어쫓긴 존재로 옛 뱀이라고 말씀한다.
7 하늘에 전쟁이 있으니 미가엘과 그의 사자들이 용과 더불어 싸울새 용과 그의 사자들도 싸우나 8 이기지 못하여 다시 하늘에서 그들이 있을 곳을 얻지 못한지라 9 큰 용이 내쫓기니 옛 뱀 곧 마귀라고도 하고 사탄이라고도 하며 온 천하를 꾀는 자라 그가 땅으로 내쫓기니 그의 사자들도 그와 함께 내쫓기니라(계 12:7-9)
“(그리고)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네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15절). 히브리어 성경에는 우리 성경에 번역되지 않은 ‘그리고’라는 말이 접속사가 있는데 앞의 14절 말씀을 이어 다시 반복하여 말씀한다는 의미이다. ‘뱀과 여자’, ‘뱀의 후손과 여자의 후손’의 관계가 “원수”가 되게 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다. 즉 뱀의 말을 듣고 선악의 지식 나무와 하나가 된 여자와 뱀, 즉 뱀의 배후 실체 편에 서게 된 여자 사이에 적대적인 관계로 만드셔서 다시 하나님 자신의 편으로 당기시겠다는 말씀이다.
사람이 부모를 떠나 그의 아내와 합하는 한 육체 됨의 의미가 그리스도와 교회의 비밀(엡 5:32)이라고 하였다. 그렇다면 여기서 여자도 단순히 여자로만 볼 것이 아니라 교회로 이해해야 한다. 즉 뱀과 여자의 관계는 사탄과 교회와의 관계를 나타내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 뱀은 여자의 후손을 발꿈치를 상하게 한다면 여자를 통한 후손(씨)을 통해 뱀의 머리를 상하게 하시는 타격을 한다는 말씀이다. 발을 땅에 대고 사는 발꿈치를 상하게 하심으로 새로운 머리, 교회의 머리로 오실 예수 그리스도를 말씀한 것이다.
내가 너희 모두를 가리켜 말하는 것이 아니니라 나는 내가 택한 자들이 누구인지 앎이라 그러나 내 떡을 먹는 자가 내게 발꿈치를 들었다 한 성경을 응하게 하려는 것이니라(요 13:18)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을 통해 세상에 발을 붙이고 사는 발꿈치가 들려진다는 것은 십자가로 하늘의 것을 나타내신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이것이 말씀이 드러내고자 하는 것이다.
다윗이 성령에 감동되어 친히 말하되 주께서 내 주께 이르시되 내가 네 원수를 네 발 아래에 둘 때까지 내 우편에 앉았으라 하셨도다 하였느니라(막 12:36)
다윗 언약을 통해 아들을 보내심으로 원수를 발 아래 두는 완전한 승리 그것이 하나님의 우편, 즉 권능과 영광의 자리에 있는 상태로 말씀한 것이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온전히 성취된 것으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이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의 머리로 통일되는 것이다.
7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속량 곧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8 이는 그가 모든 지혜와 총명을 우리에게 넘치게 하사 9 그 뜻의 비밀을 우리에게 알리신 것이요 그의 기뻐하심을 따라 그리스도 안에서 때가 찬 경륜을 위하여 예정하신 것이니 10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 다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되게 하려 하심이라(엡 1:7-10)
22 또 만물을 그의 발 아래에 복종하게 하시고 그를 만물 위에 교회의 머리로 삼으셨느니라 23 교회는 그의 몸이니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하게 하시는 이의 충만함이니라(엡 1:22-23)
“통일”이란 헬라어로 ‘아나케팔라이오마이’인데 이 단어를 풀어서 말하자면 한마디로 ‘위의 머리로 하나 된다’라는 의미이다. 그것이 통일이다. 그래서 만물 위에 교회의 머리로 삼으신 예수 그리스도를 말씀한 것이다. 그러므로 교회란 예수 그리스도의 머리로 한 그의 몸 된 자들이다.
“또 여자에게 이르시되 내가 네게 임신하는 고통을 크게 더하리니 네가 수고하고 자식을 낳을 것이며 너는 남편을 원하고 남편은 너를 다스릴 것이니라”(16절). 이제 여자는 고난 고통 가운데서 후손을 보게 될 것이다. “원하고”라는 말은 ‘테슈카’인데 ‘갈망, 열망’이라는 뜻이다. 여자인 교회는 남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간절히 원하며 열망하고 남자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다스리게 된다. 이것이 하나님의 언약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로 뱀의 머리를 타격하심으로 진짜 머리가 되셔서 자신의 몸 된 교회를 다스리시는 언약이 온전히 성취되었다. 그러므로 교회란 나의 머리가 잘려 예수 그리스도라는 머리로 교체된 자들이다(계 20:4-5)(20221023 강론/주성교회 김영대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