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주제 강론/예수님의 이적

마태복음 12:9-21 손을 내밀라

불편한 진리 2022. 6. 29. 14: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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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수님의 이적 18_안식일에 회당의 손 마른 자를 고치심

 

마태복음 12:9-21

손을 내밀라

 

 

안식일에 회당에서 손 마른 자를 고치신 이적을 기록한 복음서는 마태복음 외에도 마가복음 3:1-6, 누가복음 6:6-11에 기록하고 있는데 세 복음서가 다 안식일에 밀밭을 지나다가 제자들이 시장하여 이삭을 잘라 먹었다는 사건과 연결하여 기록하고 있다. 바리새인들은 제자들이 안식일에 하지 못할 일을 하였다고 예수님을 공격하였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다윗이 제사장만 먹는 진설병을 먹은 것과 안식일에 제사장이 성전 안에서 안식일을 범하여도 죄가 되지 않는 것을 언급하면서 자신을 “성전보다 더 큰 이”(6절), “안식일의 주인”(8절)으로 나타내셨다. 그리고 이 이적을 보이셨다.

마태의 본문에는 “거기에서 떠나 그들의 회당에 들어가시니”(9절)라고 하였는데 누가의 본문에서는 “또 다른 안식일”(눅 6:6)이라고 밝힌 것을 보면 같은 날에 있었던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복음서가 두 사건을 한 문맥 속에 두고 있는 것은 예수님에 대한 유대교 지도자들의 반감이 안식일 문제로 인하여 더 분명히 드러나고 있다는 것을 나타내기 위함인 것으로 보인다.

예수님께서 회당에 들어가시니 한쪽 손 마른 자가 등장하고 “사람들이 예수를 고발하려 하여 물어 이르되 안식일에 병 고치는 것이 옳으니이까”(10절)라고 묻는다. 고발하려고 엿보고 주시하는 자들에 대해 마태는 14절에 가서 “바리새인들”이라고 밝히지만 “서기관과 바리새인들”(눅 6:7)이라고 먼저 밝힌다. 누가의 본문에 보면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예수를 고발할 증거를 찾으려 하여 안식일에 병을 고치시는가 엿보니”(눅 6:7)라고 하였고 또한 예수님은 “그들의 생각을 아시고”(눅 6:8) 이적을 행하셨다고 하였다. 이런 점에서 당장 고쳐야 하는 급박한 상황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고치셨다는 것은 안식일, 회당 이런 것들을 통해 나타내고자 하신 뜻이 있음을 암시한다. 그래서 마태는 “그들의 회당”이라고 명시하여 하나님과 상관없는 유대인 그들의 소유인 회당이라는 식으로 표현하였다.

마가의 본문에서는 “예수께서 다시 회당에 들어가시니”(막 3:1)라고 하였는데 1:21 이하에 보면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회당에서 더러운 귀신 들린 사람을 고치신 이적을 나타내신 적이 있다. 회당에서 귀신들린 사람을 고치신 것은 유대인들이 더러운 귀신에 사로잡혀 있는 상태라는 것을 적나라하게 폭로하신 것이다. 예수님은 다시 회당에서 그들의 모습을 드러내고자 하신다.

그들이 “옳으니이까?”(헬, 엑세스티)라고 물은 것은 진리냐 아니냐를 물은 것이 아니라 ‘가능하냐, 합법적이냐, 타당하냐’라고 물은 것이다. 즉 율법에 합당한 것인가에 대한 물음이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너희 중에 어떤 사람이 양 한 마리가 있어 안식일에 구덩이에 빠졌으면 끌어내지 않겠느냐 사람이 양보다 얼마나 더 귀하냐 그러므로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이 옳으니라”(11-12절)라고 말씀하셨다. 예수님의 이 말씀은 서기관이나 바리새인조차도 안식일에 양이나 가축이 구덩이에 빠져 위급할 경우 주저하지 않고 구하여 낼 것이라는 뜻을 전제하고 있다.

마태는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의 반응을 전혀 언급하지 않지만 마가는 예수님의 물음에 “그들이 잠잠하거늘”(막 3:4)이라고 밝히고 예수님은 “그들의 마음이 완악함을 탄식하사 노”(막 3:5)하셨다고 기록하였다.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아무 것도 하지 않는 것으로 자신들의 완악함을 드러내고 있었다. 우리는 아무 것도 하지 않고 행동하지 않으면 죄를 짓지 않는다고 생각하나 잠잠하게 있는 것으로도 나의 죄가 폭로되고 죄성의 한계가 얼마든지 드러날 수 있다.

여기서 우리가 오해하는 것은 예수님의 말씀을 대부분 문자적으로 받아들이고 해석한다는 점이다. “사람이 양보다 얼마나 더 귀하냐”라고 하신 말씀은 단순히 동물보다 사람이 귀하다는 가르침을 주시기 위해서 이렇게 하신 말씀이 아니며, 또한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이 옳으니라”라는 말씀은 안식일에는 적극적으로 선을 행할 것을 권장하신 말씀이 아니다.

일차적으로는 바리새인들이 “안식일에 병을 고치는 것이 옳은가?”라고 물었기 때문에 율법을 가지고 안식일에 무엇인가 하지 않는다는 것에 중점을 두고 있는 모순을 폭로하고 근본적으로 중요한 것이 무엇인가를 드러내고자 하신 것이다. 사실 예수님의 말씀은 안식일에 사람을 구하는 일이 율법 안에서 허용하고 있다는 가르침 그 이상의 의도가 있다는 것이 비슷한 내용을 기록하고 있는 누가복음의 말씀에서 잘 드러난다.

 

 

14 회당장이 예수께서 안식일에 병 고치시는 것을 분 내어 무리에게 이르되 일할 날이 엿새가 있으니 그 동안에 와서 고침을 받을 것이요 안식일에는 하지 말 것이니라 하거늘 15 주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외식하는 자들아 너희가 각각 안식일에 자기의 소나 나귀를 외양간에서 풀어내어 이끌고 가서 물을 먹이지 아니하느냐 16 그러면 열여덟 해 동안 사탄에게 매인 바 된 이 아브라함의 딸을 안식일에 이 매임에서 푸는 것이 합당하지 아니하냐(눅 13:14-16)

 

 

회당장은 병 고치는 일 자체가 나쁘다고 비난한 것이 아니라 다른 날에 얼마든지 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사탄에게 매인 바 된 이 딸을 안식일에 푸는 것이 합당하다고 선언하셨다. 단순히 안식일에 사람의 병을 고치는 것이 허용되어야 한다는 차원이 아니라 사탄에게 매인 것에서 풀어주는 것이 안식일의 본질에 합당한 것이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그래서 마가와 누가의 본문에서는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과 악을 행하는 것, 생명을 구하는 것과 죽이는 것, 어느 것이 옳으냐”(막 3:4, 눅 6:9)라고 말씀한 것으로 기록하였다. 즉 선을 행한다는 것은 생명을 구하는 것이고, 악을 행한다는 것은 죽이는 것이다. 이 말씀은 8절에서 “인자는 안식일의 주인이니라”라는 말씀의 연장선상에 있다. 그렇다면 생명을 구하는 것, 선을 행하는 것은 안식일의 주인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신다는 뜻이다. 다시 말해서 안식이 하시는 것만 선이라는 의미이다.

결국 안식일에 행하는 선이란 안식일의 주인이신 예수님, 즉 안식이신 분이 행하시는 선이란 자기 백성들을 죄의 권세에서 빼내어 자신의 안식에 합류시키시는 것이라는 말씀이다.이것이 하나님께서 본래 보여 주고자 하신 안식의 참된 뜻이다. 다시 말해서 손 마른 자를 고치신 일이나 귀신 들린 자를 그 얽매임에서 풀어주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안식이다.

손 마른 자의 손이 어느 손인지 본문에는 나타나 있지 않지만 누가복음에서는 “오른손”이라고 밝히고 있다(눅 6:6). 오른손이란 힘과 능력의 상징이다(참고 출 15:6, 눅 11:20).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자기 힘과 능력으로 율법을 지켜 안식을 이루어내려고 하는 자들이었으나 오른손 마른 자는 이 땅에서 살아가는 힘과 능력을 상실한 사람이다. 그에게 예수님께서 “손을 내밀라”(손을 뻗어라, 손을 펴라)라고 하시고 안식일에 손을 회복시켜주심으로 참된 안식이란 율법에 의해서가 아니라 자기 힘과 능력이 상실된 자에게 주어지는 하나님의 은혜인 것을 나타내셨다. 이는 예수님의 능력의 손을 내밀어 주셔야만 깨끗함을 얻고 구원이 이루어지는 은혜이다(마 8:3, 14:31)

이렇게 본다면 오히려 율법으로 산다고 하지만 안식일에 하지 말아야 할 수십 가지 규례를 만들어 아무것도 하지 않으려고 하는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바로 오른손 마른 자들이었다. 그들은 스스로 율법을 지킬 능력이 있고 그것으로 영생을 쟁취하려고 하지만 실상은 죄의 권세에 매여 율법을 행할 힘과 능력을 잃어버린 자들이었다. 곧 죽은 자들이라는 뜻이다. 여기서 마가는 예수께서 손 마른 사람에게 “한 가운데에 일어서라”(막 3:3)라고 말씀하셨는데 “일어서라”라는 헬라어 ‘에게이로’는 죽은 자를 일으킨다는 뜻이다. 예수님은 손 마른 자를 죽은 자로 보셨고 그 죽음 가운데서 일으키신 것으로 나타낸다. 이것이 모든 인간들의 실제 모습이다.

안식일의 주인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을 비롯한 유대인들의 죄를 폭로하고 친히 안식의 본질을 드러내시니 죄인들의 반응은 자기 죄를 깨닫고 회개하는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인간들이 정해 놓은 세세한 조항들을 적용하여 안식일을 범한 예수님을 본격적으로 죽이려고 논의하였다. 죽은 자가 산 자를 처리하려고 한다. 안식이신 분은 선을 행하여 생명을 주시려고 하나 죽은 죄인들은 생명이신 분을 죽이려고 한다.

율법에서 안식일에 일하는 자를 반드시 죽이라고 하신 말씀은(출 31:14) 죄인들의 노동으로 안식이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었다. 이런 점에서 하나님께서 일하심으로 주어지는 것이 안식인데 그것을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친히 이루시는 것이다(요 5:16-18). 그러므로 바리새인들이 안식일을 범한 예수님을 죽이려고 하는 것은 우발적인 것이 아니라 이미 하나님의 언약 속에 있는 계시의 내용이며 십자가는 그 말씀의 성취이다.

예수님을 죽이려고 하는 바리새인들의 계획을 아시고 예수님은 거기를 피해 가셔서 따르는 자들의 병을 고쳐 주셨다. 이렇게 병을 고치신 이적을 통해 예수님은 인간을 짓누르는 갖가지 병에서 놓임을 받게 하심으로 안식을 맛보게 하셨다. 친히 안식일에 행하는 선이 되신 것이었다. 그런데 여기서 예수님께서는 자기를 나타내지 말라고 당부하셨는데(16절) 왜 그러신 걸까? 마태는 이것이 이사야의 예언을 성취하는 것이라고 기록하였다(17-21절). 이사야 선지자의 선포를 그대로 보자.

 

 

1 내가 붙드는 나의 종, 내 마음에 기뻐하는 자 곧 내가 택한 사람을 보라 내가 나의 영을 그에게 주었은즉 그가 이방에 정의를 베풀리라 2 그는 외치지 아니하며 목소리를 높이지 아니하며 그 소리를 거리에 들리게 하지 아니하며 3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며 꺼져가는 등불을 끄지 아니하고 진실로 정의를 시행할 것이며 4 그는 쇠하지 아니하며 낙담하지 아니하고 세상에 정의를 세우기에 이르리니 섬들이 그 교훈을 앙망하리라(사 42:1-4)

 

 

우리가 이 말씀에서 가장 많이 기억하는 부분이 하나님께서는 상한 갈대를 꺾지 않으시며 꺼져가는 등불을 끄지 않으신다는 것이다. 대표 기도하시는 분들이 이 말씀을 많이 인용하기 때문에 우리의 귀에 익숙한 말씀이다. 그런데 우리는 이 말씀을 대부분 상한 갈대를 귀하게 여겨 꺾지 않으시고 꺼져가는 등불의 심지를 끄지 않으시고 보호하시는 은혜로우신 하나님으로 이해한다. 그러나 우리가 이 말씀의 전후 문맥을 잘 살펴보면 은혜로운 하나님으로만 이해하는 것이 맞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면 이사야 선지자가 외친 이 말씀은 어떤 의미이며 마태가 어떤 의미에서 이 말씀이 성취되었다고 선포하였는가?

우선 마태가 이사야의 예언을 어떤 내용에 인용하여 성취되었다고 말씀하고 있는가를 살펴보아야 한다. 즉 마태는 예수님께서 바리새인들에게서 떠나 자신을 나타내지 말라고 하신 말씀과 연관하여 이 말씀을 인용하였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께서 자기를 나타내지 말라고 하신 것은 한 마디로 하나님의 말씀을 이루기 위해서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사야 선지자가 선포한 말씀의 의미는 무엇인가?

이사야 선지자는 메시아가 이 땅에 어떤 모습으로 오실 것인가를 예언하고 있는데 한 마디로 세상이 알지 못하고 전혀 기대하지 않는 방식으로 이 땅에 오신다는 것이었다. 하나님께서 택한 종은 하나님의 마음에 기뻐하여 사랑하는 자라고 하였다. 그에게 하나님께서 영을 주셔서 그가 하나님의 심판을 알게 하실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다. 상한 갈대는 그대로 둬도 이미 상한 상태이기 때문에 꺾이게 되고 꺼져가는 등불의 심지는 그대로 둬도 불이 꺼지게 되어 있다는 뜻이다. 즉 심판의 상태 그대로 두신다는 말씀이다. 이것이 이스라엘의 상태였다. 이스라엘뿐만 아니라 죄의 권세에 매인 이 땅의 모든 죄인들을 심판 아래 이렇게 두신다. 이러한 이유로 하나님의 택한 종은 다투지도 않고 외치지도 않기 때문에 아무도 거리에서 그의 음성을 알지 못한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언제까지 이렇게 두신다는 것인가? 심판을 이방에 알게 하실 때까지이고 공의가 온전히 드러날 때까지이다. 이사야서에서 ‘섬’이란 작은 섬으로 시골을 의미하는 말로 이방과 같은 개념으로 표현되었다. 마태는 예수님께서 요한에게 물세례를 받으심으로 하나님의 택한 종이라는 사실이 증거되었다고 선언하였다(마 3:16-17). 그러므로 십자가의 심판을 통해 온전히 승리하심을 드러낼 때까지 이렇게 공개적이지만 조용히 은밀하게 예수님 자신만 의가 되신다는 사실을 증거하신다. 결국 안식일은 예수 그리스도이시고 그분이 행하신 십자가만 선이다. 예수께서 믿음으로 행하신 그 선으로만 죽은 자를 살리는 것이 된다(20220629 강론/주성교회 김영대 목사).

 

 

 

이적18.마1209-21 손을 내밀라(20220629).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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