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주제 강론/예수님의 이적

마가복음 11:12-14, 20-26 영원토록 열매를 맺지 못하리라

불편한 진리 2022. 5. 26. 08:17

https://youtu.be/NVz5Ou2nuMw

 

예수님의 이적 15_무화과나무를 저주하심

마가복음 11:12-14, 20-26

영원토록 열매를 맺지 못하리라

 

예수님께서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신 사건을 마태복음 21:18-22에서는 짧게 기록하고 있지만 마가복음에는 이적 후에 예수님의 말씀이 많이 기록되었고 또한 본문이 나누어져 그 사이에 성전에서 있었던 일을 기록하여 이틀 동안의 일로 소개한다. 아마도 마가는 시간적인 순서로 기록하여 무화과나무 저주의 사이에 성전 심판을 더욱 강조하기 위한 것인 반면, 마태는 사건의 연관성으로 인한 계시의 말씀을 전달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하루에 있었던 일처럼 기록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예수님께서 나무에게 저주의 말씀을 하셨다는 것에 대한 해석의 어려움이 있고 또한 믿음으로 산이 들려 바다에 빠뜨리게 할 수 있다는 말씀의 의미, 또 마지막 결론이 기도할 때 믿고 구하는 것은 다 받게 될 것이라는 말씀이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신 것과 무슨 관련이 있는가 하는 것에 대해 이해하지 못하여 왜곡된 해석이 한국교회 안에 말씀의 공해를 일으키고 있는 상황이다. 그래서 무화과나무가 열매를 맺지 못했기 때문에 예수님의 저주를 받았는데 우리도 신앙의 열매를 맺지 못한다면 저주를 받는 인생이 될 것이라고 협박하는 수준의 설교들이 대부분이다.

오늘 본문은 예수님께서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 성으로 입성하신 다음 날이다. 이튿날 그들이 베다니에서 나왔을 때에 예수께서 시장하신지라 멀리서 잎사귀 있는 한 무화과나무를 보시고 혹 그 나무에 무엇이 있을까 하여 가셨더니 가서 보신즉 잎사귀 외에 아무 것도 없더라 이는 무화과의 때가 아님이라 예수께서 나무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이제부터 영원토록 사람이 네게서 열매를 따 먹지 못하리라 하시니 제자들이 이를 듣더라”(12-14)라고 말씀한다.

마가의 본문에는 그들이 아침에 지나갈 때에 무화과나무가 뿌리째 마른 것을 보고 베드로가 생각이 나서 여짜오되 랍비여 보소서 저주하신 무화과나무가 말랐나이다”(20-21)라고 베드로가 무화과나무가 말랐다는 보고를 한 것 정도로 보인다. 그러나 마태의 본문에는 제자들이 보고 이상히 여겨 이르되 무화과나무가 어찌하여(어떻게) 곧 말랐나이까”(21:20)라고 물었다. 제자들의 물음은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표적의 의미보다 나무를 마르게 하신 이적의 능력에 관심이 있었다.

아마도 제자들은 예수님과 같은 그런 능력을 확실하게 소유할 수 있기를 기대하는 마음으로 이러한 질문을 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기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의 마음을 아시고 만일 너희가 믿음이 있고 의심하지 아니하면 이 무화과나무에게 된 이런 일만 할 뿐 아니라 이 산더러 들려 바다에 던져지라 하여도 될 것이요”(21:21)라고 답변하셨던 것이다.

제자들의 관심은 언제나 행함의 문제였다. “어떻게 하면 영생을 얻을까?”라고 묻는 부자 청년과 같이 어떻게 하면 이러한 이적을 행할 수 있는가?”라고 묻는다. 이는 우리 역시 마찬가지이다. 어떻게 하면 종교성을 무성하게 발휘하여 남들에게 떳떳하게 종교생활 잘 하는 것을 보여 줄 수 있을까 하는 것이 우리의 관심사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이적을 통해 믿음에 관한 문제를 말씀하신다. 우리는 이제 무화과나무가 왜 말랐습니까?”라고 물어야 한다. 무화과나무가 왜 말랐는가? 무화과나무에게 왜 저주가 내려져야 했는가?

그렇다면 예수님이 왜 무화과나무를 상대하여 시비를 거시느냐 하는 것이다. 예수님이 너무 시장하셨는데 열매가 없는 것을 알게 되자 홧김에 저주를 하셨는가? 더욱이 이는 무화과의 때가 아님이라”(13)라고 분명히 밝히면서 말이다. 때가 아니기 때문에 열매가 없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것인데 왜 저주를 하셨을까? 본문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 우리는 이스라엘에서 무화과나무가 어떻게 열매를 맺는지 알아야 한다.

무화과나무는 꽃이 피지 않고 잎과 열매가 동시에 열리며 유월절이 있는 4월부터 10월까지 모두 다섯 번 정도의 열매를 맺는데 헬라어로는 하나의 단어로 표현되지만 히브리어는 구분되어 처음 맺히는 열매를 파게라 하고 이후에 순차적으로 열리는 것을 테에나라고 한다. 파게는 열매가 작고 맛이 들지 않은 상태라서 상품성이 떨어지기 때문에 따주어야 맛있는 테에나가 열린다. 그래서 보통은 가난한 자들이 파게를 따 가도록 방치한다.

이런 근거에 의해서 본문을 다시 말하자면 예수님께서 멀리서 잎사귀가 있는 무화과나무를 보시고 열매(파게)가 있을까 하여 가셨더니 잎사귀 밖에 아무 것도 찾지 못하셨다. 이때는 유월절 즈음이라 아직 본격적으로 열리는 열매(테에나)의 때가 아니기 때문이었다라는 의미의 말씀이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신 것은 단순히 무화과나무에게 괜한 트집을 잡으며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열매가 없는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시는 것으로 제자들에게 무엇인가를 보여주고자 말씀하셨다는 것이다. 그래서 제자들이 이를 듣더라”(14)라고 하였다. 무화과나무는 구약에서 이스라엘을 상징하는 나무로 표현되었다.

 

옛적에 내가 이스라엘을 만나기를 광야에서 포도를 만남 같이 하였으며 너희 조상들을 보기를 무화과나무에서 처음 맺힌 첫 열매(파게)를 봄 같이 하였거늘 그들이 바알브올에 가서 부끄러운 우상에게 몸을 드림으로 저희가 사랑하는 우상 같이 가증하여졌도다(호 9:10)

 

여호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광야에서 포도를 만남 같이 무화과나무에 처음 맺힌 열매를 보는 것과 같이 여겼지만 이스라엘은 바알브올에게 가서 자기 몸을 드려 우상과 같이 가증하게 되었다고 말씀하신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언약의 나라로 세우셨으나 그들은 하나님의 언약을 무시하고 우상을 좇음으로 언약의 완전한 후손이신 메시아를 보여주는 일에 실패했다. 그들이 바로 열매 맺지 못한 무화과나무와 같은 이스라엘의 모습이었다(미가 선지서 7:1-6에서도 이에 대해 구체적으로 지적하며 선포한다). 그래서 무화과나무 아래 있는 상태를 하나님의 언약 안에 있는 안식의 상태를 나타내며(왕상 4:25, 4:4, 3:10), 무화과나무가 마른다는 것은 하나님의 언약에 실패한 이스라엘에 대한 심판을 나타낸다(1:12).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내가 그들을 진멸하리니 포도나무에 포도가 없을 것이며 무화과나무(테에나)에 무화과(테에나)가 없을 것이며 그 잎사귀가 마를 것이라 내가 그들에게 준 것이 없어지리라 하셨나니(렘 8:13)

 

예수님께서는 무화과나무에 열매가 있는지 없는지 몰라서 가까이 가서 보시고 없으니 저주를 하신 것이 아니다. 열매가 없는 것을 아셨기 때문에 가셨다. 그리고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심으로 열두 제자들을 세워놓고 이스라엘에게 내리시는 저주가 어떤 것인지를 보여주셨다. 언약에 실패한 이스라엘의 모습이 바로 열매가 없어 저주로 말라버린 무화과나무의 모습이다.

그러나 그것으로 끝나버린 것이라면 이스라엘과 함께 모든 인간들은 죄인으로 저주 아래에서 벗어날 수 없는 상태에 있을 수밖에 없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죄악 가운데 있는 그 이스라엘의 모습과 자신을 동일시하심으로 스스로 죄인과 같이 되셔서 십자가의 저주를 홀로 담당하시기 위하여 이 땅에 오셨다. 예수님은 실로 열매 없는 상태, 저주 아래 있는 죄인의 상태를 아셨기 때문에 친히 십자가를 지시기 위하여 이 땅에 오신 것이었다.

이런 점에서 이제부터 영원토록 사람이 네게서 열매를 따 먹지 못하리라”(14), 마태의 본문에는 이제부터 영원토록 네가 열매를 맺지 못하리라”(21:19)라고 하신 말씀에서 나무는 이미 말라서 죽어버렸는데 영원토록이라는 말이 무슨 의미가 있는가? 그냥 말라버리라고만 저주를 하셔도 될텐데 예수님께서 굳이 이렇게 말씀하셔야 할 필요가 있을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말씀하셨다는 것은 단순히 나무에게 하신 말씀이 아니라 제자들을 비롯한 이스라엘을 향해 영원토록이라는 의미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는 어떻게 적용되는가를 드러내고자 하심이다. 즉 무화과나무가 영원토록 저주를 받는다고 할지라도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대신 저주를 받으신다면 그 영원토록은 영원토록이 될 수 없다는 뜻이다.

결국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신 이적은 언약이 주어졌음에도 불구하고 열매 맺을 수 없는 이스라엘을 보여줌과 동시에 예수님 자신이 참 이스라엘로 이 땅에 오셔서 친히 받으실 십자가의 저주를 보여주신 표적이다. 그것으로 인해 자신과 같은 이스라엘, 즉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언약 백성들을 만드셔서 그들에게 주실 구원의 은혜를 나타내신 것이었다.

그러므로 우리 자신이 본래 어떤 존재이며 어떤 모습이었는지를 가장 분명히 알 수 있는 것은 십자가 안에서만 가능하다. 우리의 종교성으로 행하는 주일성수, 십일조, 전도, 기도, 찬양, 구제, 교회 봉사, 제자훈련, 아웃리치 등등 이런 모든 행위가 열매 없는 모습에 불과하다. 예수님께서 받으신 십자가의 저주 안에 열매 없는 무화과나무와 같은 나의 모습이 있음을 발견하고 예수 그리스도와 더불어 죽고 살아서 하나 된 것을 날마다 발견하는 자가 성도이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여 이르시되 하나님을 믿으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이 산더러 들리어 바다에 던져지라 하며 그 말하는 것이 이루어질 줄 믿고 마음에 의심하지 아니하면 그대로 되리라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그대로 되리라”(22-24). 우리는 흔히 이 구절을 가지고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그대로 되리라라는 24절만 따로 떼어서 우리가 이해하고 싶은 대로 한다. 그래서 무조건 예수님만 믿고 기도하면 원하는 것을 다 이룬다는 것이다. 만약 기도하였지만 그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면 그것은 우리의 믿음이 부족한 문제로 치부한다. 이 말씀이 정말 그런 의미의 말씀인가? 이것이 우리가 문맥을 무시하고 우리 편한 대로 해석한 결과이다.

성경에서 일반적으로 이란 세력이나 권세를 나타내는 단어로 쓰인다(참고 욥 9:5, 41:15, 40:4, 51:25 ). 또한 시온산으로 표현되어 성전이나 하나님의 임재와 관련되어 사용된다(참고 사 10:32, 18:7, 삼하 5:7, 왕하 19:31, 76:2 ). 그렇다면 여기 본문에서 산은 문맥상 예루살렘 성전이 있는 산으로 본다면 예수님의 이 선언은 성전의 운명과 관련된 말씀이다(이런 점에서 마가는 성전의 심판을 더 분명히 보여주기 위해 이 표적 사이에 넣고 있다).

산이 바다에 던져진다면 바다는 이방이나 죄악의 권세 아래 있는 세상을 의미한다(참고 사 11:11, 23:11, 27;1, 60:5, 13:1 ). 그러므로 예수님의 이 선언은 제물의 장사가 성행하고 돈 바꾸는 자들이 자리 차지하는 성전은 이미 죄의 권세에 매인 이방인들의 세상과 같은 상태가 되었다는 성전에 대한 심판을 말씀하신 것이다.

그러면 이러한 심판을 무엇에 근거해서 선언할 수 있다는 것인가? 그것은 바로 믿음에 의한 것이다. 그 믿음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즉 십자가를 지신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기존의 성전에 심판이 가해진다. 이런 점에서 믿음의 기도를 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일하심이 하나님의 뜻대로 된다는 것을 인정한다는 의미이다. 그렇다면 성전의 심판에 대한 하나님의 용서는 오직 십자가를 통한 용서이다. 그러기 때문에 기도하는 자는 용서함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 주어지는 용서를 확인할 수 있어야 한다는 의미이다.

그래서 서서 기도할 때에 아무에게나 혐의가 있거든 용서하라 그리하여야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 허물을 사하여 주시리라 하시니라”(25)라고 말씀한 것이다. 또한 어떤 사본에는 26절에 만일 너희가 용서하지 아니하면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도 너희 허물을 사하지 아니하시리라라는 말씀이 있다고 하였는데 이 말씀도 마찬가지이다. 우리가 다른 사람을 용서해야 하나님께서 용서하신다는 의미가 아니라 이 땅의 용서는 하늘의 용서와 연결되어 있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의 종교성을 가지고 기도하던 성전은 강도의 소굴이 될 수밖에 없지만 진짜 성전이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는 믿음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구하시기 때문에 그것은 이미 다 받은 것이 된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기도라는 성전이시고 그분에 의해 우리가 하나님의 성전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것이 바로 우리가 영원토록 맺는 열매이신 예수 그리스도이시다(2:7)(20220525 강론/주성교회 김영대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