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주제 강론/예수님의 이적

요한복음 6:1-15 선악의 떡 생명의 떡

불편한 진리 2022. 5. 5. 06: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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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수님의 이적 05_오천 명을 먹이심

요한복음 6:1-15

선악의 떡 생명의 떡

 

 

본문에 대해 흔히 “오병이어의 기적”이라 부르고 어린아이의 작은 헌신이 많은 사람을 먹여 살린 이적으로 곡해되어 우리의 작은 헌신으로 하나님께서 나타내실 기적의 통로가 되자고 한다. 그러나 성경의 이적은 단순히 우리가 추구해야 할 하나님의 능력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설명하고 보여주는 표적이다. 그렇다면 이 이적을 통해서도 이적의 부수적인 부분에 관심을 가질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이 표적을 통해 본질적으로 나타내고자 하신 의도를 따라 이해해야 한다.

사복음서에 다 기록된 유일한 표적으로 마태복음 14:13-21, 마가복음 6:30-44, 누가복음 9:10-17에도 기록되었다. 사복음서가 다 다루고 있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나타내실 중요한 하나님의 뜻을 담고 있다는 의미이며 사실 이 표적이 예수님의 십자가 사역의 분기점이 된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은 이 표적을 통해 이 땅에 오신 목적을 분명히 하셨고 십자가 죽음을 본격적으로 드러내신 표적이었다. 그래서 마태는 세례자 요한의 죽음을 언급한 후(마 14:1-12) 이 이적을 기록하였다.

1-2절에 보면 “그 후에 예수께서 디베랴의 갈릴리 바다 건너편으로 가시매 큰 무리가 따르니 이는 병자들에게 행하시는 표적을 보았음이러라”라고 말씀한다. 예수님께서 병자들을 고치시니 많은 무리가 예수님을 따랐다. 17절에 의하면 제자들이 배를 타고 가버나움으로 간다고 하였다. 그러면 본문에서 갈릴리 바다 건너편으로 가신다는 것은 가버나움 쪽에서 건너가셨다는 뜻이다. 건너가신 그곳을 공관복음서에서는 “빈들”이라고 밝히고 있다(마 14:15, 막 6:35, 눅 9:12). 즉 광야라는 말이다. 누가는 여기를 “벳새다”(눅 9:10)라고 밝히고 있는 것으로 보아서 벳새대 근처의 광야이다. 그뿐 아니라 오늘 본문 3-4절에서는 “예수께서 산에 오르사 제자들과 함께 거기 앉으시니 마침 유대인의 명절인 유월절이 가까운지라”라고 나타내고 있는 것을 보면 예수님께서 의도적으로 이 상황을 만드신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즉 예수님께서 유월절 가까운 때 바다를 건너 광야로 가셨고 또한 광야의 산에 올라 보리떡 다섯 개로 오천 명을 먹이신 이적을 나타내셨다는 것은 구약의 출애굽 사건을 염두에 두셨다는 것을 생각할 수 있다.

무리가 있는 곳은 광야였고 또한 날이 저물어 저녁이 되었으니 사람들이 마을에 들어가 먹을 것을 사 먹게 해 달라고 제자들이 예수님께 요청하자 마태복음 본문에 보면 “갈 것 없다.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마 14:16)라고 하셨는데 오늘 본문에서는 “예수께서 눈을 들어 큰 무리가 자기에게로 오는 것을 보시고 빌립에게 이르시되 우리가 어디서 떡을 사서 이 사람들을 먹이겠느냐 하시니 이렇게 말씀하심은 친히 어떻게 하실지를 아시고 빌립을 시험하고자 하심이라 빌립이 대답하되 각 사람으로 조금씩 받게 할지라도 이백 데나리온의 떡이 부족하리이다”(5-7절)라고 기록하였다.

예수님께서 빌립을 시험하셨다고 하였는데 예수님이 그 무리를 먹이려면 이백 데나리온이나 필요하다는 것을 몰라서 그렇게 시험하셨을까? 예수님이 몰라서 물으신 것이 아니라 이 물음을 통해 죄인의 상태를 폭로하시기 위함이었다. 예수님께서 너희가 주라고 하심으로 제자들에게는 줄 수 있는 것이 없음을 확인시키셨다. 그뿐만 아니라 빌립은 이백 데나리온의 돈이 필요하다고 함으로 세상에서 돈으로 해결하려고 하는 계산적인 방법, 그것은 곧 율법적인 것이고 계명으로 해결하려고 하는 마음에 불과한 것이었다.

왜냐하면 제자들에게는 줄 것이 없는 상태였는데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는 명령은 그들에게 율법이요 계명이었다. 즉 제자들은 가진 것이 없었기 때문에 무리들에게 먹을 것을 줄 수 없었다. 없는데 할 수 있는가? 그것이 바로 율법을 행하려고 하는 우리의 죄성이다. 그것은 결코 인간이 할 수 없는 것이었다. 그래서 우리 죄인의 상태는 항상 ‘없음’이다. 예수님은 우리 죄인이 할 수 없음의 상태를 뛰어넘어 표적으로 자신을 나타내신다.

더 나아가서 예수님은 제자들의 없음의 상태를 어린아이의 것으로 더 분명하게 보여주신다. “제자 중 하나 곧 시몬 베드로의 형제 안드레가 예수께 여짜오되 여기 한 아이가 있어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고 있나이다 그러나 그것이 이 많은 사람에게 얼마나 되겠사옵나이까”(8-9절)라고 하였다. 결국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가 어린아이의 것이라는 것은 그것조차도 줄 수 없는 제자들의 모습 속에서 인간이 율법적으로 행하여 생명을 차지하려고 하는 그것이 죄라는 뜻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이 사람들로 앉게 하라 하시니 그 곳에 잔디가 많은지라 사람들이 앉으니 수가 오천 명쯤 되더라 예수께서 떡을 가져 축사하신 후에 앉아 있는 자들에게 나눠 주시고 물고기도 그렇게 그들의 원대로 주시니라 그들이 배부른 후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남은 조각을 거두고 버리는 것이 없게 하라 하시므로 이에 거두니 보리떡 다섯 개로 먹고 남은 조각이 열두 바구니에 찼더라”(10-13절). 본문에서는 “떡을 가져 축사하신 후에 앉아 있는 자들에게 나눠 주시고”라고 간략하게 서술하고 있지만 이 부분에 대하여 복음서 기록자들은 모두 동일하게 “하늘을 우러러 축사하시고 떡을 떼어”(마 14:19, 막 6:41, 눅 9:16)라고 표현하여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기 전 유월절 마지막 식사(마 26:26)를 암시하고 있다(요한복음에는 유월절 만찬을 기록하지 않고 이 표적으로 대체하고 있다는 점에서 공관복음서에서 ‘축사’를 ‘율로게오’를 쓴 반면 요한은 ‘유카리스테오’로 썼다).

오늘 본문에서 이 이적을 나타내신 시점이 “유월절이 가까운지라”(4절)라고 밝혔다. 유월절 마지막 식사의 떡과 포도주는 곧 자신을 십자가에 내어 주셔서 새 언약을 성취하실 것을 말씀하신 것이었다. 이런 점에서 이 이적은 십자가에서 대속의 죽음으로 자신을 생명의 떡으로 주실 것을 미리 보여주신 표적이었다. 그 생명의 떡이 곧 말씀이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바다를 건너 광야로 가셔서 이 표적을 나타내신 것은 다분히 의도적이셨다는 것이다. 즉 과거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나와 바다를 건너 광야에서 만나를 먹이신 출애굽 때의 사건을 다시 재현하신 것이었다. 그러면 광야에서 오천 명을 먹이신 것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만나를 내리신 것과 같은 것인데 신명기에서 이렇게 말씀한 것을 볼 수 있다.

 

 

2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 사십 년 동안에 네게 광야 길을 걷게 하신 것을 기억하라 이는 너를 낮추시며 너를 시험하사 네 마음이 어떠한지 그 명령을 지키는지 지키지 않는지 알려 하심이라 3너를 낮추시며 너를 주리게 하시며 또 너도 알지 못하며 네 조상들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네게 먹이신 것은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줄을 네가 알게 하려 하심이니라(신 8:2-3)

 

 

마태복음 4장에 보면 마귀가 예수님께 돌을 떡이 되게 하라고 시험하였을 때 예수님께서 신명기의 이 말씀으로 물리치셨다. 마귀는 생존의 문제로 예수님을 시험했다. 그러나 예수님은 마귀의 시험을 생존의 문제로 받아들이신 것이 아니라 생명의 문제로 드러내셨다. 떡을 만들어 먹는 것은 생존의 문제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사람이 사는 것은 생존에 대한 문제가 아니라 생명의 문제로 말씀하셨다. 떡을 먹는 것으로 생존하고 있다는 것이 살아 있는 것이 아니라 생명에 속해 있어야 진짜 살아 있다는 것을 나타내신 것이었다.

한 율법 교사가 예수님께 찾아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을 수 있느냐고 묻자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율법에 무엇이라고 기록되었으며 네가 어떻게 읽느냐라고 하셨다. 그러자 율법교사는 마음을 다하며 목숨을 다하며 힘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한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고 대답하였다. 그때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대답이 옳도다 이를 행하라 그러면 살리라”(눅 10:28)라고 하셨다. 율법 즉 말씀대로 행하는 것만이 사는 길이다. 여기서 산다는 것은 단순히 생존을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라 생명을 말씀하신 것이다. 그렇다면 율법을 온전히 행하여 살 수 있는 자가 누군가? 이 땅에는 아무도 없다. 인간은 생명 나무를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로 취할 수밖에 없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늘에서 생명으로 이 땅에 오신 것이었다.

 

 

24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25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죽은 자들이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듣는 자는 살아나리라 26 아버지께서 자기 속에 생명이 있음 같이 아들에게도 생명을 주어 그 속에 있게 하셨고 27 또 인자됨으로 말미암아 심판하는 권한을 주셨느니라 28 이를 놀랍게 여기지 말라 무덤 속에 있는 자가 다 그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29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요 5:24-29)

 

 

예수님께서 이 표적을 통해 자신을 메시아로 나타내셨다는 것은 생명의 떡으로 자신을 십자가에 내어 줄 것을 미리 보여주신 것이었다. 그래서 요한은 이 표적에 대해 진전된 설명으로 32절 이하에서 이렇게 선언하고 있다.

 

 

32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모세가 너희에게 하늘로부터 떡을 준 것이 아니라 내 아버지께서 너희에게 하늘로부터 참 떡을 주시나니 33 하나님의 떡은 하늘에서 내려 세상에 생명을 주는 것이니라(요 6:32-33)

 

 

공관복음서에는 “떡”이라고 표현하였지만 요한복음에서는 “보리떡”(9절)이라고 분명하게 밝히고 있다. 한 마디로 보잘 것 없는 것이라는 뜻이다. 예수님께서 어린아이로 오셔서 보잘것없는 떡으로 먹이셨다는 것은 자신을 생명의 떡으로 내어주심을 보여주신다. 또한 이 이적을 경험한 사람들이 “예수께서 행하신 이 표적을 보고 말하되 이는 참으로 세상에 오실 그 선지자라 하더라”(14절)라고 나타낸 반응은 열왕기하 4장에서 엘리사 선지자가 나타낸 이적을 떠올렸으며 이런 점에서 예수님은 분명 엘리야와 엘리사 같은 선지자로서 메시아라는 고백이었다.

 

 

42 한 사람이 바알 살리사에서부터 와서 처음 만든 떡 곧 보리떡 이십 개와 또 자루에 담은 채소를 하나님의 사람에게 드린지라 그가 이르되 무리에게 주어 먹게 하라 43 그 사환이 이르되 내가 어찌 이것을 백 명에게 주겠나이까 하나 엘리사는 또 이르되 무리에게 주어 먹게 하라 여호와의 말씀이 그들이 먹고 남으리라 하셨느니라 44 그가 그들 앞에 주었더니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대로 먹고 남았더라(왕하 4:42-44)

 

 

그리고 15절에 보면 “그러므로 예수께서 그들이 와서 자기를 억지로 붙들어 임금으로 삼으려는 줄 아시고 다시 혼자 산으로 떠나 가시니라”라고 기록하고 있는데 사람들은 이런 이적을 경험한 것으로 예수님의 이적을 단순한 기적으로 받아들이고 이런 기적을 행할 수 있는 선지자라면 자신들을 로마의 압제에서 벗어나게 할 메시아로 생각하고 예수님을 왕으로 삼고자 하였다.

 

 

26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적을 본 까닭이 아니요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이로다 27 썩을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하라 이 양식은 인자가 너희에게 주리니 인자는 아버지 하나님께서 인치신 자니라 28 그들이 묻되 우리가 어떻게 하여야 하나님의 일을 하오리이까 29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하나님께서 보내신 이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니라 하시니(요 6:26-29)

 

 

오늘날도 예수님을 그저 자기 배고픔을 채워주는 메시아로 이해한다면 우리는 선악의 지식 나무를 취하는 죄인일 수밖에 없다. 그것이 바로 죄 아래서 죄의 권세에 매인 모습일 수밖에 없다. 비록 출애굽하여 광야의 이스라엘이 하늘의 만나를 먹고도 망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그저 만나라는 떡을 자기가 살고자 하는 율법으로 받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만나를 말씀으로 받은 자는 하나님의 언약에 참여된 자로 영원한 생명을 누리는 자이다. 자기 지식으로 만나를 말씀으로 받았다는 것이 아니라 이것이 하나님의 은혜라는 뜻이다.

마찬가지로 오늘날도 예수님을 선악과로 받아들이는 자는 아무리 예수님의 표적을 많이 경험한다고 할지라도 그것은 썩는 양식에 불과하다. 그러나 예수님을 생명의 떡으로 받아들여지고 그 떡을 먹는 자는 생명을 누리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생명의 떡이요 말씀이신 예수님께서 다 행하셨다. 믿음을 선물로 주시고 믿음으로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 되게 하셨다. 그 말씀대로 행하심이 자기 백성들을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살게 하신 것이다. 이것을 생명이라 한다. 나는 예수 그리스도를 선악의 떡으로 먹는가 아니면 생명의 떡으로 먹는가?(20220504 강론/주성교회 김영대 목사).

 

이적05.요0601-15 선악의 떡 생명의 떡(20220504).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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