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약강론/로마서

제63강 로마서 12:1-2 온전하신 뜻

불편한 진리 2022. 2. 6. 14: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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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로마서 예순세 번째 강론

로마서 12:1-2

온전하신 뜻

 

로마서 1:1에서 바울 사도는 자신이 “하나님의 복음”을 위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종과 사도로 부르심을 받았다고 선언했다. 사도란 보내심을 받은 자이고 종이란 주인의 운명과 함께 하는 자라면 보내신 주인의 것을 전하는 운명이라는 뜻이다. 그러므로 로마교회에 보내는 서신을 통해 바울 사도가 드러내고자 하는 것은 처음부터 끝까지 오직 “하나님의 복음”이다. 이런 점에서 로마서 12장 이후의 내용은 흔히 말하듯이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며, 로마서 끝부분에 등장하는 많은 인물들의 언급은 개인적인 삶이나 사적인 친밀감 등으로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죄인을 사로잡고 있는 하나님의 복음의 능력을 구체적으로 나타낸 것이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계시 되었는데 믿음에서부터 믿음까지라고 하였다. 즉 하나님의 의가 예수님의 믿음으로 주어졌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구원의 은혜는 이렇게 나타났다. 우리가 구원을 필요로 하는지 모르고 있을 때,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지도 않았을 때, 하나님이 계신 줄도 모르고 오히려 나 자신이 하나님으로 살고 있을 때, 그래서 우리가 죄인으로 진노와 심판의 자리에 있을 때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로 이 땅에 찾아오셨다. 우리의 동의를 얻거나 간절한 요청이 있어서가 아니라 하나님 자신의 때에 십자가로 찾아오신 것이다.

이런 점에서 믿음이란 우리가 하나님을 붙잡기로 했다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향하여 어떤 열심을 내고 무엇을 내놓기로 했다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긍휼을 베푸심으로 십자가의 예수 그리스도 안에 붙들어 하나 되게 하신 것이다. 그분이 자기 백성으로 만들어 장악하고 계신다. 바울 사도는 로마서 1-11장에서 그것을 집중적으로 설명했다. 이 말씀을 제대로 이해했다면 11:36에서 말씀한 바와 같이 오직 주께 영광을 돌릴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이 시점에 와서 우리가 하나님께 무엇인가 하겠다는 자세가 될 수 없다. 12:1에서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라고 하였는데 ‘영적 예배’가 아니라 ‘말씀의 섬김’이라고 하였다. 즉 바울 사도는 이제까지 설명하고 나타낸 하나님의 복음에 근거해 우리를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하나님 곁에 굳게 세우는 초대를 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말씀의 섬김’이란 하나님이 기뻐하시고 거룩한 산 제물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온전히 성취하신 말씀의 섬김에 근거하여 그 제사에 하나님의 긍휼로 초대된 주님의 몸 된 교회요 성도는 말씀의 섬김 안에 있다는 관점에서 12:1 이하의 말씀을 이어간다. 그래서 “드리라”(헬, 파리스테미)라는 표현은 과거형으로 쓰였다. 즉 ‘곁에 굳게 세워졌다’라는 뜻이다.

지금 살펴보고자 하는 2절도 우리가 스스로 변화를 받아 분별해야 한다는 것이 아니라 이제까지 선포된 하나님의 복음이 인정되고 받아들여진 차원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2절)라고 하였다. 이 말씀은 의미상 “본받지 말고”와 “변화를 받아”라는 말이 대조되어 있고, “이 세대”와 “하나님의 온전하신 뜻”이 서로 대조되어 있다.

“본받지 말고”라는 말은 헬라어로 ‘쉬스케마티조’인데 ‘같은 모양이 되다’라는 뜻이다. 즉 같은 모양이 되지 말라는 것이다. 그리고 “변화를 받아”라는 말은 ‘메타몰포오’로 ‘다른 형상으로 바꾸다, 변하다, 변형하다’라는 뜻이다.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마음을 새롭게 할 수 있는가? 변화가 우리에게 가능한 일인가? 우리의 마음은 악하다고 성경의 선언은 아주 명확하다.

 

여호와께서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가득함과 그의 마음으로 생각하는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창 6:5)

 

또한 그들이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매 하나님께서 그들을 그 상실한 마음대로 내버려 두사 합당하지 못한 일을 하게 하셨으니(롬 1:28)

 

얀네와 얌브레가 모세를 대적한 것 같이 그들도 진리를 대적하니 이 사람들은 그 마음이 부패한 자요 믿음에 관하여는 버림받은 자들이라(딤후 3:8)

 

선악의 나무를 취한 인간의 마음은 항상 악할 뿐이다. 하나님을 두기 싫어하는 부패한 상태에 있는데 그것이 바로 믿음에 관해서는 버림받은 상태라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인간은 스스로 마음을 새롭게 할 수 없는 존재이다. 본문에서 “마음을 새롭게 함”이란 헬라어로 ‘아나카이노시스’라는 말인데 ‘아나’(위에)와 ‘카이노스’(새롭게 하다)의 합성어로 위로 새롭게 된 상태, 즉 질적으로 전혀 다른 하늘의 것으로 새롭게 달라진 상태를 뜻한다. 우리가 스스로 하늘의 것으로 달라지게 되는 것은 불가능하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하늘의 것으로 바뀌어져야 한다.

 

5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6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7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8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빌 2:5-8)

 

우리가 예수님의 마음을 품을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 아니라 하늘로부터 주어지는 것이다. 그래서 골로새서에서 새 사람을 입었다고 선포한다.

 

9 너희가 서로 거짓말을 하지 말라 옛 사람과 그 행위를 벗어 버리고 10 새 사람을 입었으니 이는 자기를 창조하신 이의 형상을 따라 지식에까지 새롭게 하심을 입은 자니라(골 3:9-10)

 

그리고 본문에서 ‘~하지 말고 ~하라’라고 말씀하는데 여기서 우리가 다시 분명하게 정리하고 넘어가야 할 것은 ‘하지 말라’와 ‘하라’는 말씀의 의도를 알아야 한다. 주님은 우리에게 단순히 이 세대, 즉 이 악한 세상을 본받지 말라고 당부하시는 것이 아니다. 죄인은 이 악한 세상에서 스스로 벗어날 수 있는 존재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명령형으로 말씀하는 의도는 무엇인가?

사실 ‘변화를 받으라’라고 명령형으로 되어 있지만 수동태로 나타내고 있다. 그 의미는 내가 스스로 변화되어야 하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이루신다는 말씀이다. 성도는 이 세대와 같은 모양을 내는 자가 아니라 다른 형상으로 바뀌어진 존재라는 뜻이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긍휼을 흉내 내고 진리인 것처럼 모양을 내는 것이 이 악한 세대이지만 성도는 하늘의 것으로 마음이 바뀌어 하나님의 형상이 된 존재라는 의미이다.

우리가 잘 아는 출애굽기 20장에 보면 소위 말하는 십계명, 즉 열 말씀이 기록되어 있는데 두 부분으로 나누어진다. 8개의 ‘하지 말라’라는 것과 2개의 ‘하라’라는 명령이다. 하지 말라고 한 것은 출애굽 한 이스라엘 백성들의 경험과 연관된 것이다. 애굽의 경험이라는 전제 하에서 생각해 보면 ‘하지 말라’는 말씀은 애굽에서 행하던 것들이라는 의미이다. 그러한 것들을 하지 말라고 한다고 해서 하지 않을 능력이 이스라엘에게 있었는가? 결코 없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건져 내신 후 광야에서 언약을 맺으면서 이 말씀을 주셨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그들로 하여금 애굽에서 경험했던 것들을 하지 않는 존재로 만드시겠다는 약속이다. 무엇으로 그렇게 하신다는 것인가? 그 의도가 바로 ‘안식’과 ‘부모 공경’을 통해 ‘하라’는 말씀 속에 있다. 즉 하나님을 부모로 여기고 그 부모의 말씀 안에 있다면 안식으로 상징되는 가나안 땅으로 인도하는 약속을 성취하시겠다는 뜻이다.

결국 ‘하지 말라’와 ‘하라’는 말씀은 이스라엘이 그렇게 순종하면서 살아야 한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친히 보내실 메시야, 즉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안에서 이루실 언약의 말씀으로 주신 것이기에 단순히 계명으로 생각할 문제가 아니라 ‘열 말씀’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이런점에서 ‘열 말씀’이란 온전한 진리를 담아서 주신 생명의 말씀이라는 뜻이다. 결국 새 언약으로 성취되면 돌판이 아닌 마음에 말씀을 새기도록 성령께서 하신다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오늘 본문의 말씀도 우리에게 무엇을 행하라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의해 주님의 것으로 하나님의 영광 안에 부르심을 입었다면 이미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을 향해 방향이 잡힌 존재가 되었다는 의미이다. 1절에서 보는 바와 같이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에 초대된 자는 자신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하나님 곁에 세움을 입은 자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라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몸”을 드린다는 것은 예수님께서 자신의 몸을 십자가에 드리신 것에 근거한 말씀이다.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을 생각해 볼 때 단순히 몸만 드린다는 의미가 아니다. 예수님은 십자가 상에서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마 27:46)라고 선언하셨다. 예수님은 스스로 하나님의 저주와 심판 안에 들어가심으로 모든 것이 끊어지고 소멸되는 상태가 되셨던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 몸을 하나님께 드린다는 의미는 단순히 몸으로 봉사하는 차원으로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곁에 굳게 세워짐을 입었다는 것인데 이는 마치 전쟁의 장수가 부하들을 옆에 세우고 전쟁에 나가는 것과 같은 형태를 연상하게 해 준다. 그렇다면 악의 세력을 멸하는 전쟁에서 하나님 곁 십자가에 산 제물로 세우시는 이 말씀의 섬김에 우리가 부르심을 입었다는 뜻이다.

바로 이러한 의미로 2절에서 이 악한 세대와 같은 모양을 내지 말고 하나님의 형상으로 바뀐 존재로서 하나님의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라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결국 이 말씀은 우리더러 분별하면서 살라는 것이 아니라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자기 백성의 모습이라고 선언하고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긍휼에 의해 십자가에 세워진 산 제물의 모습은 하나님의 온전하신 뜻에 의해 분별되어 있는 상태임을 알라는 말씀이다.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라는 말씀에서 “분별”은 헬라어로 ‘도키마조’로 ‘시험하다, 증명하다, 확증하다’라는 뜻이 있는데 시험이란 어떤 것을 증명하는 것이다. “뜻”이란 하나님의 원하심이다. 그러면 무엇을 증명하는가? 마음이 하늘의 것으로 바뀌면 그 결과가 하나님은 선하시다는 것을 증명하고, 하나님께서 기뻐하시고 온전한 원하심이 어떤 것인가를 확증하게 된다는 것이다.

여기서 “무엇인지”라는 말은 헬라어에서 중성으로 표현되었는데 사물이나 인격을 나타낼 수 있다. 인격으로 표현된다면 ‘누구’이다. 마음이 하늘의 것으로 바뀌어 하나님만 선하시다는 것과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원하심이 누구에게 있는가? 예수 그리스도를 향해 있다는 것을 드러내고 증명하게 된다는 뜻이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갈라디아서에서 이렇게 선언하였다.

 

4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곧 우리 아버지의 뜻을 따라 이 악한 세대에서 우리를 건지시려고 우리 죄를 대속하기 위하여 자기 몸을 주셨으니 5 영광이 그에게 세세토록 있을지어다 아멘(갈 1:4-5)

 

살아 남으려고 하는 것이 이 악한 세대이다. 성도란 자신의 삶을 먼저 챙기는 이 세대의 모양대로 사는 자가 아니라 십자가 은혜로 하늘의 형상으로 바뀌어진 존재로 이 세대에 대하여 죽은 자이다.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갈 6:14)

 

(20220206 강론/주성교회 김영대 목사).

 

롬63.1201-02 온전하신 뜻(20220206).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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