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주제 강론/예수님의 이적

14.요한복음 5:1-18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불편한 진리 2021. 11. 21. 13:30

https://youtu.be/PpkgwW2lG0w

 

 예수님의 이적14_38년 된 병자를 고치심

요한복음 5:1-18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본문 1절에서 “그 후에 유대인의 명절이 되어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올라가시니라”라고 하였는데 “그 후”란 짧은 문맥상으로는 왕의 신하의 아들을 고치신 표적을 나타내신 이후라는 뜻이고, 요한복음 전체적인 맥락에서 보자면 7개의 표적(2:1-11, 4:46-54, 5:1-18, 6:1-15, 6:16-21, 9:1-12, 11:1-44)을 중심으로 메시지를 전달하고 있다는 측면에서 앞의 첫 표적 이후 모든 표적이 연관된 말씀이라는 의미를 지닌다.

“유대인의 명절”이라고 하였는데 요한이 ‘유대인’이라고 표현한 것의 의미는 9:22에서 “그 부모가 이렇게 말한 것은 이미 유대인들이 누구든지 예수를 그리스도로 시인하는 자는 출교하기로 결의하였으므로 그들을 무서워함이러라”라는 말씀을 통해 볼 때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대적하는 존재로 나타내고 있다(10절). 유대인의 명절은 다 안식일과 관련되어 있기에 유대인들이 생각하는 안식일과 명절의 개념을 통해 복음의 본질을 나타내시겠다는 것을 암시한다. “명절”에 대하여 성경학자들 중에서 의견이 분분하지만 어떤 명절인지 구체적으로 나타내고 있지 않기에 정확하게 알 수 없다.

“예루살렘에 있는 양문 곁에 히브리 말로 베데스다라 하는 못이 있는데 거기 행각 다섯이 있고 그 안에 많은 병자, 맹인, 다리 저는 사람, 혈기 마른 사람들이 누워 [물의 움직임을 기다리니 이는 천사가 가끔 못에 내려와 물을 움직이게 하는데 움직인 후에 먼저 들어가는 자는 어떤 병에 걸렸든지 낫게 됨이러라]”(2-4절).

성전 양문 곁에 베데스다라고 하는 연못(pool) 주변에 병든 자들이 많았는데 그 이유는 연못에 천사가 가끔 내려와 물을 동하게 하는데 그때 가장 먼저 들어가는 사람이 낫는다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이것이 사실인지 아닌지 관심을 가질 필요는 없다. 왜냐하면 성경이 그 결과에 관심이 있다는 뜻으로 기록한 것이 아니라 그 전설 때문에 많은 병자들이 모이게 되었다는 것을 말할 뿐이다.

그곳에 많은 병든 자들이 있다고 하면서 본문에서 “맹인, 다리 저는 사람, 혈기 마른 사람들”이라고 밝히며 심지어 “누워” 있다고 하였다. 한 마디로 그 물에 스스로 들어갈 수 있는 자가 없다는 것이다. 더구나 이름이 “베데스다”라고 하였다. ‘벧’(집)과 ‘헤세드’(은혜, 자비, 긍휼, 인애)의 합성어로 ‘은혜의 집’이라는 뜻이다. 은혜와 자비의 집에서 가장 먼저 들어가는 자가 낫는다는 아이러니이다. 즉 은혜와 자비의 집이라고 하지만 누가 먼저 들어가서 고침을 받느냐 하는 경쟁이 이루어지는 곳이었다.

여기서 예수님은 그 많은 병자들 중에서 유독 한 사람만 고쳐 주셨다는 것은 예수님의 의도가 병고침 자체에 있지 않다는 것이고, 또한 병든 자의 요청에 의한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선택에 의한 것임을 보여준다. 본문은 어떤 병인지 말씀하지 않고 그저 “서른여덟 해 된 병자”라고만 밝히고 있다. 예수님께서 38년 된 병자를 선택하신 것은 어떤 뜻일까? 신명기에 이런 말씀으로 힌트를 주고 있다.

 

14 가데스 바네아에서 떠나 세렛 시내를 건너기까지 삼십팔 년 동안이라 이 때에는 그 시대의 모든 군인들이 여호와께서 그들에게 맹세하신 대로 진영 중에서 다 멸망하였나니 15 여호와께서 손으로 그들을 치사 진영 중에서 멸하신 고로 마침내는 다 멸망되었느니라(신 2:14-15)

 

신명기 2:7에 보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가 하는 모든 일에 네게 복을 주시고 네가 이 큰 광야에 두루 다님을 알고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 사십 년 동안을 너와 함께 하셨으므로 네게 부족함이 없었느니라”라고 하였다. 그리고 14절에서 하나님께서 치심으로 38년 동안 멸망을 당하였다고 하였다. 40년이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푼 시간이라면 38년은 어떤 기간인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유월절을 주신 달을 첫 해 첫 달로 하라고 하셨다(출 12:1-2). 그리고 출애굽하여 3개월 만에 시내 산에서 도착하였을 때(출 19:1) 언약의 말씀을 율법으로 주셨다. 출애굽 한 둘째 해 2월 20일에 다시 시내 산에서 출발하여 가데스바네아(바란 광야)로 가서(민 10:11-12,26) 가나안 땅을 정탐한 후 38년을 광야 여기저기를 다니면서 멸망을 당한다. 그렇다면 이 38년은 율법을 받은 이후이다. 다시 말해서 율법을 행할 수 없다는 이스라엘의 죄악상이 철저하게 다 폭로되는 기간이다. 이런 점에서 38년 된 병자를 통해 보여주시는 것은 율법으로 해결할 수 없고 인간의 능력으로는 어찌할 수 없는 한계에 봉착된 죽은 상태라는 뜻이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의문스러운 것은 예수님께서 병자에게 “네가 낫고자 하느냐?”라고 물으셨는데 38년 동안이나 누워있었다면 낫기를 원하는 것이 당연한 것 아닌가? 6절을 보면 “예수께서 그 누운 것을 보시고 병이 벌써 오래된 줄 아시고” 말씀하셨다고 되어 있다. 보시고 아셨다면 굳이 이런 물음은 의미 없는 것 아닌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께서 이렇게 물으셨다면 의도가 따로 있다는 것이다. 즉 38년 된 병자가 가진 생각을 끄집어내시기 위해서이다. 즉 병자의 답변을 통해 유대인의 한계, 죄인의 한계를 폭로하시기 위함이었다.

그의 대답은 이런 것이었다. “주여 물이 움직일 때에 나를 못에 넣어 주는 사람이 없어 내가 가는 동안에 다른 사람이 먼저 내려가나이다”(7절). 이 말은 무슨 뜻인가? 누군가가 물에 넣어 주기만 하면 낫는데 넣어 주는 사람이 없다는 것이다. 이 병자가 원하는 것은 물이 움직일 때 넣어 달라는 것이었다. 예수님께서 지금 자기 곁에 그리스도로 찾아 오셨지만 알아보지 못하고 그저 물에 먼저 들어가야 낫는다는 자기 믿음에 갇혀 있었다. 이것이 죄인들의 한계이다.

병에서 고침 받기를 원하지만 자신이 생각하고 믿는 방법을 그대로 고수하고 있다. 병고침에 대한 자기 나름대로의 해결책을 예수님께 이야기한다. 오늘날 대부분의 교인들이 교회에 나와서 이런 예수로 믿는다. 내 문제를 내 방식대로 해결해 주기를 원하는 것이다. 말씀에 귀 기울이기보다 자기 믿음의 행위를 나타내 보이려고 한다. 이것이 인간의 종교성이다. 이런 점에서 오늘날 교회들은 ‘베데스다’라는 간판은 걸었지만 상급으로 온갖 경쟁이 난무하도록 교리를 만들었다. 심지어 은혜도 내가 더 받아야겠다는 사고방식에 젖어 있다. 인간의 모든 종교성은 죄인의 행위에 불과하다. 그러나 천국은 우리가 마음대로 들어갈 수 있는 곳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권을 가지고 넣어 주시는 하나님 왕국이다.

은혜와 자비가 없이 경쟁으로 자신만 고침 받고자 하는 이곳에 예수님께서 오셔서 은혜를 베푸셨다. 은혜를 베푸신 방식은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8절)라는 말씀이었다. 병자가 38년 동안 누워있었다는 것은 인간이 어떤 율법도 행할 수 없다는 것을 보여준다. 일어나 걸어갈 수 없는 자에게 ‘일어나 걸어가라!’라는 명령은 잔인한 것이다. 할 수 있는 능력이 전혀 없는 상태이기 때문이다. 흔히 우리는 다 지키지는 못하더라도 십계명을 비롯한 하나님의 말씀을 지킬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성경은 인간은 죄인으로 죽은 존재라고 선언한다. 죽은 존재에게 예수님의 명령이 주어지자 “그 사람이 곧 나아서 자리를 들고 걸어가니라”(9절)라고 하였다. 38년이나 누워있던 자가 걸을 수 있는 능력은 어디서 나온 것인가? 병자에게서 나온 능력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에 의한 것이다. 요한복음의 서두에서 이렇게 밝혔다.

 

1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2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3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4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5 빛이 어둠에 비치되 어둠이 깨닫지 못하더라(요 1:1-5)

 

이 말씀을 통해서 보자면 병자에게 ‘일어나 걸어가라!’라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은 태초에 말씀으로 천지를 창조하신 그 말씀이라는 뜻이다. 병자에게 그 어떤 믿음의 근거도 없다. 말씀이 찾아가셨고 말씀이 말씀 되게 드러내셨다. 그 말씀 안에 생명이 있다고 하였다. 그렇다면 그 어떤 것에도 생명이 없다는 것이고 이 땅의 그 어떤 것도 생명이 될 수 없다는 뜻이다. 죽은 자에게 생명이 주어졌기에 일어나 걸을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런데 예수님은 왜 그냥 ‘일어나 걸어가라’라고 하시지 않고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라고 말씀하셨는가? 9절에서 “이 날은 안식일이니”라고 밝히고 있다. 아니나 다를까 “유대인들이 병 나은 사람에게 이르되 안식일인데 네가 자리를 들고 가는 것이 옳지 아니하니라”(10절)라고 하였다. 38년이나 누워있었으니 그렇게 목숨이 위급한 상황도 아닌데 왜 하필 안식일에 고치셔서 유대인들로 하여금 시비거리의 빌미를 제공하시는 것일까?

당시 미쉬나에 있는 안식일 금지항목 중에서 맨 마지막 39번째에 “율법은 안식일에 개인영역에서 공공영역으로 혹은 그 반대 방향으로 물건을 옮기기, 운반하기, 던지기, 밀기 등을 금지한다. 공공영역의 한 장소에서 대략 2미터 이상 물건을 운반할 수 없다”라고 되어 있다. 그래서 유대인들이 “너에게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한 사람이 누구냐?”(12절)라고 묻는다. 율법의 형식에 매여 행위만 붙들고 있는 유대인들은 38년 동안이나 질병의 고통에서 놓임 받은 일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었고 그저 율법으로 정죄하고자 하는 일에 혈안이 되었다.

고침을 받은 자는 “그가 누구인지 알지 못하니”(13절)라고 하였다. 한 마디로 병고침을 받은 자나 유대인들이나 다 예수님이 어떤 분인지 알지 못하고 있었다. 요한 사도는 요한복음 안에서 계속적으로 인간이 예수님을 알지 못한다고 선언하였다(1:10,26,31,33, 2:9, 3:10, 4:22,32, 7:28, 8:14,19,55, 9:21,25,30, 10:6, 12:35, 13:7, 14:5,9, 17:25, 20:9,14, 21:4 등). 그래서 서두에서 이렇게 선포하면서 요한복음을 전개하고 있다.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아버지 품 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셨느니라(요 1:18)

 

자리를 피하셨다가 성전에서 다시 그를 만나셨다. 그리고 이렇게 말씀하신다. “보라 네가 나았으니 더 심한 것이 생기지 않게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14절). 이 사람이 죄를 지었기 때문에 병들었다는 의미가 아니라 죄 아래 있는 인간의 비참한 상태가 어떤 것이며, 반대로 죄의 권세에서 놓인 상태가 어떤 것인가를 말씀하신 것이다. 즉 고침 받기 이전의 상태가 바로 인간이 죄의 권세 아래에 있는 그러한 비참한 죽음의 상태이고, 안식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 안에 있는 상태가 바로 고침 받은 생명의 상태라는 것이다. 예수님은 유대인들의 안식일 규례를 아셨기에 의도적으로 안식일에 그를 고치심으로 자신이 진짜 안식이 되신다는 사실을 분명히 나타내고자 하셨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안식이 되신다는 사실은 “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17절)라고 하신 말씀에서 더욱 분명하게 드러난다. 안식일의 주인으로(마 12:8) 율법의 제재를 받지 않는 분이라는 뜻이다. ‘안식’이란 히브리어로 ‘샤바트’인데 ‘쉬다, 중지하다, 끝내다’’라는 뜻이다. 율법 안에서 우리의 입장에서는 쉼이고 그침이지만 하나님께서 일하신다는 의미이다. 즉 하나님의 일하심으로 자기 백성들에게 안식을 주신다는 의미이다.

안식일에 일하는 자는 죽이라는 율법(출 31:14-15) 때문에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박해하고 죽이고자 하였고(18절) 실제로 십자가에 못박아 죽였다. 그렇다면 그 율법은 하나님께서 친히 이 땅에 오셔서 안식일에 일하는 것으로 죽임을 당하실 것을 나타내신 언약의 말씀이었다. 진정한 안식은 우리의 행위나 일을 그치게 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 즉 하나님의 일하심에 의해 주어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구약의 율법에서 안식일을 가지고 ‘안식이 무엇이냐?’가 아니라 ‘안식이 누구인가?’로 보아야 한다. 그 안식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시고 곧 하나님이시다. 그래서 “유대인들이 이로 말미암아 더욱 예수를 죽이고자 하니 이는 안식일을 범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자기의 친 아버지라 하여 자기를 하나님과 동등으로 삼으심이러라”(18절)라고 하였다. 베데스다와 같은 경쟁의 세상에 있는 우리에게 진짜 은혜로 다가오신 것이 십자가이다.

우리는 교회 생활하면서 은혜도 모르면서 은혜를 말했었다. 방법도 모르고 실력도 없으면서 무조건 믿고자 했었다. 믿음이라고 하였지만 실상은 우리의 행위였던 것이다. 내 행위가 아닌 하나님의 행위인 그 십자가가 은혜로 주어진 것이 참된 안식이다(20211121 강론/주성교회 김영대 목사).✞

 

이적14.요0501-18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20211121).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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