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주제 강론/예수님의 이적

제8강 누가복음 5:1-11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불편한 진리 2020. 9. 6. 16:01

 

 

➲ 예수님의 이적_많은 물고기를 잡게 하신 이적

 

누가복음 5:1-11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베드로가 많은 물고기를 잡았다는 이 이적은 대부분의 교인들이 흥분하기에 충분하다. 베드로는 밤새도록 물고기를 한 마리도 잡지 못하여 기분이 좋지 못한 상태에서도 예수님께 배를 빌려드렸고 뿐만 아니라 물고기를 잡는 일에는 문외한 목수이신 예수님이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고 한 말씀에 대해 어떤 반론도 제기하지 않고 자기 경험을 버렸으며 또한 이미 씻은 그물을 주저하지 않고 말씀에 의지하여 다시 그물을 내리는 순종을 한 대가로 많은 물고기를 잡는 복을 받았다고 한다. 이와같이 우리도 개인적인 생각을 버리고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하기만 하면 베드로와 같은 기적을 보는 축복을 누릴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성경이 말씀하고자 하는 것은 인간이 어떤 축복을 받느냐 하는 문제가 중요한 것이 아니다. 본문을 끝까지 보면 베드로가 잡은 많은 물고기를 팔아서 부자가 되고 잘 먹고 잘 살았더라고 결론 내리는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을 버려 두고 예수님을 따랐다고 말씀한다. 다시 말해서 방금 잡은 물고기조차도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순종해서 축복 받겠다는데 성경을 이렇게 이해하든 저렇게 이해하든 무슨 상관이냐고 물으며 자신에게 은혜가 되면 된다는 식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 14:6)라고 하셨고 또한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마 7:21)라고 말씀하셨다. 우리가 찾고 얻어서 누리고자 하는 생명은 예수님의 생명과는 다른 것이다. 그러니 성경을 읽고 자신에게 은혜만 된다고 생각할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의 뜻과 합당한 것이며 예수님께서 나타내신 십자가의 길과 진리, 생명과 같은 것인지를 말씀으로 늘 확인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누가복음 4:43에 보면 예수님께서 “내가 다른 동네들에서도 하나님의 나라 복음을 전하여야 하리니 나는 이 일을 위해 보내심을 받았노라”라고 말씀하셨다. 예수께서 행하고 계신 일이 단순히 귀신들린 자들에게서 귀신을 쫓아내시고 질병으로 고통받는 자들을 치료하시는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는 뜻이다. 예수님이 행하신 모든 일이 “하나님의 나라 복음”에 대한 것이라는 말씀이다. 그것을 한 마디로 표현하자면 ‘십자가’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이 십자가의 죽음을 통해 자기 백성들에게 생명을 주시는 일이다. 그것이 ‘하나님 나라의 복음’이다.

 

본문의 말씀이 이렇게 시작한다. “무리가 몰려와서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새 예수는 게네사렛 호숫가에 서서 호숫가에 배 두 척이 있는 것을 보시니 어부들은 배에서 나와서 그물을 씻는지라”(1-2절). 우리 성경에는 번역되지 않은 첫 마디가 헬라어로 ‘에게네토 데’라는 말인데 이는 문자적으로 ‘그리고 어떤 사건이 일어났다’는 의미로 앞단락과 구별이 되는 어떤 새로운 사건이 전개될 때 쓰이는 헬라어의 관용적 표현이다. 4:38에 보면 시몬(베드로)의 장모를 열병에서 고치신 이적을 기록하고 있고 그후 많은 병자들을 고치시며 귀신을 쫓아내신 이적을 기록하였다. 그리고 새로운 사건으로 5:1 이하의 본문을 소개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공동번역은 ‘하루는’이라고 번역하였다.

 

“게네사렛 호숫가”라고 하였는데 ‘게네사렛 호수’를 구약에서는 ‘긴네렛’(민 34:11, 신 3:17)이라 하였으며 그 모양이 ‘비파’처럼 생겼기 때문에 긴네렛을 게네사렛이라 불렀다. 복음서의 여러 곳에서는 ‘갈릴리 호수’ 또는 ‘갈릴리 바다’ 혹은 로마식 이름으로 ‘디베랴 바다’라고 부르는데 복음서의 기록자들이 나타내고자 하는 메시지에 따라 ‘호수’ 혹은 ‘바다’로 불린다. 남북의 길이는 약 20km이고 동서의 폭은 약 12km로 해수면보다 200m나 낮은 위치에 있었다.

 

우리는 이 이적을 이해할 때 후에 베드로가 어떤 사람이 되었는가를 알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베드로를 특별한 존재로 부르시기 위해 오셨고 많은 물고기를 잡게 하는 이적을 통해 베드로를 굴복시키고 제자로 부르셨다고 생각한다. 우리가 이 문제를 조금만 상식적으로 생각해 보면 예수님은 굳이 이런 이적을 행하시지 않더라도 말씀만으로도 베드로를 제자로 부르실 수 있는 분이다. 그러므로 이적 자체나 베드로에게 초점을 두고 생각할 것이 아니라 이 일에 예수님께서 주도적으로 어떻게 행하시는가를 보아야 한다.

 

예수께서 호숫가에 가셨을 때 어부들이 배에서 나와 그물을 씻고 있는 것을 보셨고 그 중에 시몬의 배에 오르셔서 육지에서 조금 띄게 하시고 무리들에게 말씀을 선포하셨다. 말씀을 마치시고는 시몬에게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4절)라고 하셨다. 시몬 베드로가 배를 빌려드린 것이거나 그의 허락을 받고 배에 오르신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배의 주인처럼 주도하고 계신 것을 볼 수 있다. 이런 면에서 베드로의 관점에서 본문을 이해할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주님으로서 베드로를 말씀으로 어떻게 이끌고 계신가를 보아야 한다.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라는 예수님의 말씀에 베드로의 반응을 5절에서 “시몬이 대답하여 이르되 선생님 우리들이 밤이 새도록 수고하였으되 잡은 것이 없지마는 말씀에 의지하여 내가 그물을 내리리이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여기서 “선생님”(헬, 에피스타테스)이라고 번역된 말은 ‘주인’, ‘감독’, ‘지도자’라는 뜻이다. 이 말씀을 가지고 베드로가 예수님의 말씀을 무조건 믿고 따랐기 때문에 많은 물고기를 잡을 수 있었다고 생각하면 곤란하다. 이제까지 주님께서 말씀을 전하시며 베드로와 직간접적으로 말씀의 관계를 가지셨다.

 

복음서를 시간적인 순서로 배열하자면 베드로의 장모를 고치신 이적이 베드로를 부르신 이후의 사건으로 볼 수 있지만 누가는 베드로의 장모를 고치신 이적을 베드로를 부르신 사건 앞에 배열하였고 뿐만 아니라 요한복음 1장에 보면 세례자 요한이 자기 제자 중의 두 사람 한 사람인 안드레가 예수님을 따르면서 형제 시몬에게 메시아를 소개하니 예수님께서 “네가 요한의 아들 시몬이니 장차 게바라 하리라”(요 1:42)라고 말씀하신 적이 있다. 그러니 베드로가 여기서 처음 예수님을 만났고 단번에 예수님이 메시아인 것을 알아보고 말씀에 순종한 것이 아니라 이미 말씀이신 예수 그리스도와의 관계 안에 있었던 것이다.

 

이런 점에서 베드로가 말씀에 의지하여 그물을 내린다고 표현한 것은 예수님을 처음 만났음에도 불구하고 자기 믿음을 나타내어 순종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베드로를 부르시기 위하여 말씀의 관계 안에 거하도록 하셨기 때문에 가능한 결과이다. 예수님께서 베드로를 말씀의 관계 안에 끌어들이셨기 때문에 베드로는 말씀대로 따를 수밖에 없었다는 뜻이다. 다시 말해서 베드로가 말씀이신 예수님과의 관계 안에 있다는 것을 많은 물고기를 잡는 것을 통해 확인시켜주신 것이었다.

 

“그렇게 하니 고기를 잡은 것이 심히 많아 그물이 찢어지는지라 이에 다른 배에 있는 동무들에게 손짓하여 와서 도와 달라 하니 그들이 와서 두 배에 채우매 잠기게 되었더라”(6-7절). 결과는 엄청난 것이었다. 그러나 성경이 밝히고 있는 것은 그들이 많은 물고기를 잡았다는 것에 있지 않다. 이 말씀은 단지 인간이 나타낼 수 없는 엄청난 결과가 나타난 것에 대한 사실을 나타내고 있을 뿐이다. 성경의 관심사는 그 다음 베드로의 반응이다. “시몬 베드로가 이를 보고 예수의 무릎 아래에 엎드려 이르되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니 이는 자기 및 자기와 함께 있는 모든 사람이 고기 잡힌 것으로 말미암아 놀라고 세베대의 아들로서 시몬의 동업자인 야고보와 요한도 놀랐음이라”(8-10a).

 

“이를 보고”라고 표현한 말은 단순히 나타난 현상만 본 것이 아니라 ‘경험으로 알게 된 것’을 의미하는 말이다. 베드로는 물고기를 많이 잡은 것으로 인하여 그물 안의 물고기를 본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가를 보게 되었다. 다시 말해서 단순히 인간 예수님이 아닌 하나님으로 인식하게 되었고 하나님 앞에 자신이 어떤 존재인가를 보게 된 것이었다. 그래서 “예수의 무릎 아래에 엎드려 이르되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라고 고백하였다. 베드로가 이런 고백을 한 것은 예수님을 하나님으로 보고 경험하였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10절에 보면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예수께서 시몬에게 이르시되 무서워하지 말라 이제 후로는 네가 사람을 취하리라”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무서워하지 말라”라는 말은 하나님께 대한 두려움과 공포를 표현한 말이다(참고/마 10:28, 17:6, 막 5:33 등). 이사야 선지자가 하나님을 경험하였을 때를 이렇게 나타내고 있다.

 

1 웃시야 왕이 죽던 해에 내가 본즉 주께서 높이 들린 보좌에 앉으셨는데 그의 옷자락은 성전에 가득하였고 2 스랍들이 모시고 섰는데 각기 여섯 날개가 있어 그 둘로는 자기의 얼굴을 가리었고 그 둘로는 자기의 발을 가리었고 그 둘로는 날며 3 서로 불러 이르되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만군의 여호와여 그의 영광이 온 땅에 충만하도다 하더라 4 이같이 화답하는 자의 소리로 말미암아 문지방의 터가 요동하며 성전에 연기가 충만한지라 5 그 때에 내가 말하되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나는 입술이 부정한 백성 중에 거주하면서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뵈었음이로다 하였더라(사 6:1-5)

 

이사야 선지자가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 앞에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라고 고백하듯이 베드로가 예수님의 권세와 능력을 체험한 순간 자신의 죄인됨을 깊이 의식하게 된 것은 자기 의사와는 상관없이 한 동안 듣게 된 예수님의 말씀, 하나님의 나라에 대하여 가르치시는 말씀에 의한 것이었다. 4:43에서 밝히고 있듯이 예수님이 전하신 것은 “하나님의 나라 복음”이었기 때문이다. 그 하나님 나라의 복음이란 앞으로 대속의 죽음으로 나타내실 ‘십자가’인 것이다. 그래서 이 이적도 표적이다.

 

결국 예수님께서는 밤새도록 물고기 한 마리도 잡지 못한 베드로에게 도움이 되도록 하시기 위함이 아니었으며 또한 베드로와 야고보, 요한을 굴복시키기 위해 이적을 베푸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의 복음에 합류시키기 위해 이적을 베푸셨고 그 이적을 통해 자신의 십자가를 보여주셨던 것이었다. 그러므로 단순히 베드로, 야고보, 요한 이 세 사람을 굴복시켜 제자로 삼고자 한 목적이었다기 보다는 하나님 나라의 복음에 참여되고 십자가의 길을 가는 것은 예수님의 찾아오심에 의해 이루어지며 그것은 말씀 안에 있는 상태여야함을 보여주신 것이었다. 우리의 죄인됨은 말씀이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가장 분명하게 폭로되기 때문이다.

 

“네가 사람을 취하리라”라는 말씀에서 ‘취하다’(헬, 조그레오)로 번역된 말은 ‘사로잡다’, ‘산채로 잡다’는 뜻이다. 살아 있는 사람으로 잡는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께서 하늘에서 사람으로 오셨다는 것은 이 땅에는 사람이 없었다는 뜻이다. 이런 점에서 십자가의 길을 가신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되는 것만이 죽은 자가 산 사람이 된다는 의미이며 예수 그리스도와 더불어 십자가에 죽었다가 살아난 사람만이 산 자로 사로잡을 수 있는 자이다.

 

세상의 모든 인간들은 다 죄인이며 죄인들의 종교성은 그저 예수님을 통해 이 땅에서는 물질의 복을 누리고 죽어서도 천국 가는 복을 누리고자 하는 것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그러기 때문에 말은 하나님을 위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섬긴다고 하지만 자기 종교 행위에 대한 대가를 챙기려는 꼼수가 우리의 신앙생활이다. “그들이 배들을 육지에 대고 모든 것을 버려 두고 예수를 따르니라”(10절)라는 말씀으로 이 표적을 결론내고 있다. 이 말씀은 우리의 것을 다 버리고 주를 따르자는 말이 아니다. 말씀이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게 된 자는 십자가 외에는 그 어떤 것도 날마다 버리는 것으로 받아들일 뿐이다. 심지어 조금 전에 예수님께서 잡게 하신 많은 물고기조차도 버려지는 것이다.

 

13 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쳐다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이르되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였느니라 14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에 저 바리새인이 아니고 이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고 그의 집으로 내려갔느니라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하시니라(눅 18:13-14)

 

말씀이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만 비로소 “나는 죄인이로소이다”라는 고백이 나올 수밖에 없고 그런 죄인을 의롭다고 하시는 하나님의 방법이 십자가이다(2020906/주성교회 강론/김영대).✞

 

이적08.눅0501-11 나는 죄인이로소이다(20200906).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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