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약강론/로마서

제40강 로마서 8:12-17 하나님의 아들

불편한 진리 2020. 5. 24. 20:46

로마서 마흔 번째 강론

 

로마서 8:12-17

하나님의 아들

 

 

대부분의 교인들이 구원에 대해서 말하면 자기 구원의 확신으로 기쁨이 있거나 마음이 편안한 것, 주일성수하며 교회에 봉사를 하는 것, 물세례 받은 것, 모태신앙 이런 것들을 증거로 들이댄다. 성경에서 구원이란 그런 것으로 말씀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이런 것들은 교회인(Church man), 종교인들도 얼마든지 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믿음이 없어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주님의 몸된 교회요 성도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의가 된 자들이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상태를 바울 사도는 정죄함이 없다는 선언으로 표현하였다. 현실적으로 여전히 우리는 죄 가운데서 죄의 법을 섬기는 사망의 몸에서 벗어날 수 없는 존재이지만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그리스도의 사람이라고 칭하고 있다. 그리스도의 사람이란 육 혹은 육신이 아니라 의가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영의 존재가 되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성령께서 의가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 머물러 있도록 이끄시기 때문에 육에 속한 자가 아니라 영에 속한 자라고 한다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그리스도의 사람이란 하나님의 영, 즉 그리스도의 영이 있느냐 없느냐 하는 문제이지 우리의 행위가 죄를 짓느냐 아니냐 하는 것에 있지 않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이제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빚진 자로되 육신에게 져서 육신대로 살 것이 아니니라 (왜냐하면)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12-13)라고 선포한다. 성경에서 빚진 것과 죄를 지은 것을 같은 단어로 사용하여 죄인이 하나님께 죄를 짓는 것이 마치 빚을 진 것과 같은 상태라는 말이다. 이런 점에서 바울은 우리가 육신에게 빚을 진 것이 아니기 때문에 육신에 매여서 육신을 따라 살아야 할 이유가 없다고 하였다.

우리 성경에는 번역이 빠져 있는데 13절과 14절 두 구절다 헬라어 가르’(왜냐하면)라는 말로 시작한다. 우리는 육신을 따라 사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육신을 따라 사는 그것이 바로 죽음이기 때문이다라는 말로 이해하면 될 것이다. 그러기에 생명을 주시는 성령께서 몸의 행위들을 죽이시는 그것이 사는 것이다. 이 말씀은 헬라어 성경을 보면 현재시제로 표현되었는데 날마다 성령께서 우리 몸의 행실을 죽이신다는 뜻이다.

 

우리는 이제 그 의를 믿음으로 받아 율법의 모든 요구를 이루었다. 더 이상 율법의 무서운 요구에 따라 죽을 자로 사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성령의 인도함을 받기 때문이다. 그래서 “(왜냐하면)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사람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우리가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짖느니라”(14-15)라고 하였다. 우리 성경에 양자의 영이라고 번역하였는데 양자라는 말은 헬라어로 휘오데시아인데 직역하면 아들 됨의 영이라는 말이다. 그래서 새번역성경에서는 자녀로 삼으시는 영이라고 번역하였다.

개역한글판에서는 아바 아버지라고 하였는데 개정성경에서는 아빠 아버지라고 번역하고 있는데 좋은 번역이라고 할 수 없다. ‘아바아버지!’ 혹은 아버지여라는 말의 아람어이고 호 파테르는 헬라어로 그 아버지라는 말이다. 그러기 때문에 아람어 아바를 굳이 아빠로 번역해야 할 이유는 없다고 본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아람어 아바를 풀어서 헬라어로 아버지를 강조하고 있다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인정한다는 것은 그분이 보내신 성령을 받은 자이다. 그의 행위가 아직 미덥지 못하고 연약하며 보잘 것없는 모습으로 비록 선한 행위는 나오지 않고 죄악만 행한다고 할지라도 그리스도의 영이 거하신다면 그리스도의 사람이다. 오늘 본문에서는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였다. 로마서 서두에서 바울 사도는 하나님의 복음은 아들에 대한 것인데 이 아들은 구약에서 선지자들에게 언약하신 약속의 아들이라고 하였다.

그런데 이 아들은 어떤 아들인가? 다윗의 후손으로 오셔서 십자가에서 죽고 부활하심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선포되신 예수 그리스도라고 하였다. 요한복음에 보면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1:14)라고 하였는데 여기서 독생자의 영광이란 한 마디로 십자가이다. 십자가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와 진리가 충만한 것이다. 그리고 18절에서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아버지 품 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셨느니라라고 하였다. 하나님의 영광과 은혜와 진리를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으로 온전히 드러내셨다.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은 십자가를 통해 가장 잘 드러났다는 뜻이다.

 

실로 인간은 하나님을 하나님답게 드러내지를 못할 뿐만 아니라 드러낼 수도 없었다. 하나님의 영광을 온전히 드러내시고 하나님의 진리를 완전하게 드러낼 자가 죄인 중에는 없었다. 왜냐하면 아담이 선악의 나무를 취할 때에 우리 모두가 그 나무를 취하였고 그로 인해 다 자기를 위해서 사는 존재가 되었기 때문이다. 자기 자신을 위해 사는 존재가 하나님을 드러낸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래서 예수님은 자신의 아바 아버지라고 선언하셨다(14:36).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선택하여 그들로 하여금 자신의 아들이라고 말씀하셨다.

 

 

너는 바로에게 이르기를 여호와의 말씀에 이스라엘은 내 아들 내 장자라 내가 네게 이르기를 내 아들을 놓아서 나를 섬기게 하라 하여도 네가 놓기를 거절하니 내가 네 아들 네 장자를 죽이리라 하셨다 하라 하시니라(4:22-23).

 

이스라엘은 하나님에 의해 유월절 어린 양의 희생으로 애굽에서 빠져나와 건짐을 받을 수 있었다. 그러나 가나안으로 가는 광야에서 하나님의 언약에 합당한 아들이 아니었고 하나님의 아들 노릇을 제대로 하지 못했다는 것이 여실히 증명되고 말았다. 유월절 어린 양의 희생 정신은커녕 우리가 아는 대로 이스라엘은 광야 여행 중에 하나님을 향해 원망하고 불평하는 반역의 연속이었다. 하나님의 아들노릇하기보다 도리어 하나님의 원수였다는 것이 분명하게 드러난 것이 광야의 과정이었다.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받고 약속의 땅을 기업으로 받아 누렸지만 그것은 하나님의 은혜를 드러내고 증거해 주는 역할을 하는 언약의 중보자가 있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약속의 땅에 들어갈 수 없는 존재였는데 하나님께서 자신의 언약을 온전히 성취하는 신실한 중보자를 통해 약속의 땅을 주시고 이스라엘이 그것을 받아 누리게 하셨다. 결국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아들로 표현하신 것은 이스라엘을 통해 궁극적인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주시기 위함이었다.

 

하나님의 구원이 이루어진다는 것은 최종적인 언약의 사람, 약속의 아들이 희생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사실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언약의 성취자로 이 땅에서 오셔서 십자가를 지심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온전히 드러내셨다. 요한복음의 표현대로 하자면 하나님의 은혜와 진리를 십자가 안에 충만하게 드러내신 것이고 로마서의 표현대로 하자면 하나님의 의를 믿음으로 나타내신 것이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다는 것은 진짜 아들이신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에 우리가 성령에 의해 끌려들어간다는 것이고 그렇게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죽은 자가 바로 하나님의 아들이다. 그가 비로소 성령에 의해 아바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바울 사도는 갈라디아서에서 휘오데시스라는 말을 이렇게 쓰고 있다.

 

 

4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율법 아래에 나게 하신 것은 5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을 속량하시고 우리로 아들의 명분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6 너희가 아들()이므로 하나님이 그 아들의 영을 우리 마음 가운데 보내사 아빠 아버지라 부르게 하셨느니라(4:4-6)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이 된 것에 대해서 갈라디아서 3:26에서 너희가 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으니라고 하였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되었다는 것은 우리가 믿었으니까 아들이 될 수 있었지 우리가 믿지 않았으면 아들이 될 수 없었다는 말이 아니다. 그렇게 말할 때에 그 믿음이란 우리의 행위이기 때문이다. 이것을 에베소서에서는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1:5)라고 하였다. 갈라디아서의 믿음으로 말미암아라는 자리에 에베소서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라고 썼다. 따라서 갈라디아서에서 말씀하는 믿음이란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하나님께서 창세 전에 예정하사 이루신 구원이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아들들이 되게 하시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예수 그리스도 안으로 부르시고 그의 아들이 되게 하신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기쁘신 뜻에 기인한다. 그것은 우리 쪽에 어떤 이유나 조건이 결코 있을 수 없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서 성령이 친히 우리의 영과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언하시나니”(16)라고 말씀하였다. 우리가 자의적으로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를 수 있는 자들이 아니다. 그러기에 성령께서 오셔서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르게 하시고 또한 우리 안에서 늘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을 증거하실 수밖에 없다. 구원에 대해서는 우리에게 조건이나 이유를 찾을 수 없기 때문에 성령께서 증거해 주시지 않으면 도무지 믿지 않는 존재라는 뜻이다. 그렇지 않다면 하나님을 원수로 생각하고 늘 거부하며 반항하는 주특기를 발휘할 수밖에 없는 존재가 바로 우리들이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우리가 십자가의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인정하게 되었다는 것은 성령께서 오셔서 내 안에서 증거해 주신 결과이다.

 

어떻게 증거하는가? 본문 17절에서 이렇게 말씀한다. 자녀이면 또한 상속자 곧 하나님의 상속자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상속자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할 것이니라.” 성령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로 끌고 가셨다면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들을 날마다 십자가로 끌고 가시는 것은 성령께서 하시는 당연한 일이다. 바울 사도가 8:9에서는 그리스도의 사람이라고 표현했다가 오늘 본문에서는 왜 하나님의 아들로 표현하는지 그 이유를 여기서 밝히고 있다. 생명을 주시는 성령에 의해 하나님의 구원을 누린다는 것을 하나님의 아들로 표현한 것은 상속자의 개념이다. 본문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한 상속자라고 하였다. 그러면 주의 성령께서 우리를 어디로 끌고 가시는지 그것은 너무도 자명한 사실이다. 악마가 제안한 십자가 없는 세상의 영광을 그리스도께서 거부하셨다면 우리 역시 예수 그리스도와 같이 십자가 없는 세상의 영광을 거부하는 삶이어야 한다. 아니 성령께서 우리를 그렇게 이끌고 가실 것이다.

 

우리는 미래에 죽어서 가는 천국만 원하지 지금 주님과 함께 받는 고난에 대해서는 너무도 무관심하다. 그러기 때문에 늘 불평과 불만, 원망을 하나님께 쏟아놓을 뿐이다. 요한복음에서 예수님의 영광이 십자가였듯이 오늘날 우리들에게도 동일하게 날마다 주님과 더불어 받는 고난, 말씀으로 인해 세상에서 버림받고 밀침을 당하며 쫓겨남을 당하는 것이 영광인줄 알아야 한다. 고난과 영광을 분리해서 보지 말고 하나로 받아들여야 한다. 고난 뒤에 영광이라고 생각하지 않고 지금 세상에서 당하는 고난이 곧 주님과 더불어 누리는 영광으로 인정하는 자가 성도이다. 왜냐하면 날마다 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를 지는 모습으로 사는 아들 됨의 영을 받았기 때문이다.

 

 

29 그리스도를 위하여 너희에게 은혜를 주신 것은 다만 그를 믿을 뿐 아니라 또한 그를 위하여 고난도 받게 하려 하심이라 30 너희에게도 그와 같은 싸움이 있으니 너희가 내 안에서 본 바요 이제도 내 안에서 듣는 바니라(1:29-30)

 

이 말씀을 쉬운성경에서는 이렇게 번역하였다. “29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에게 그리스도를 믿는 특권뿐만 아니라, 그리스도를 위해 고난받는 특권도 주셨습니다. 이 두 가지 모두 하나님께는 영광이 되는 것입니다. 30 내가 여러분과 함께 있을 때, 여러분은 내가 고난당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또한 지금 내가 겪고 있는 고난에 대해서도 들었을 것입니다. 여러분 역시 이와 같은 고난을 겪고 있는 것입니다”(1:29-30)(http://cafe.daum.net/joosung 20200524 강론/김영대).

 

 

롬40.0812-17 하나님의 아들(20200524).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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