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약강론/로마서

제17강 로마서 3:1-8 유대인의 나음

불편한 진리 2019. 8. 12. 13:37

❖ 로마서 열일곱 번째 강론


로마서 3:1-8

유대인의 나음



바울 사도는 1:17-18에서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믿음으로 나타났지만 믿지 않음에 대해서는 하나님의 진노가 나타났다고 선언하였다. 그리고는 이어서 하나님의 진노를 구체적으로 이야기하면서 인간의 죄를 적나라하게 나열하였다. 인간이 죄인이라는 사실에 대해서는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별반 차이가 없다고 하였다. 오히려 율법과 할례를 가졌다고 하는 유대인들의 죄를 무차별적으로 폭로했다. 


그들이 가지고 있는 율법에 대해서, 할례를 행한 것만으로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다고 자부하며 이미 구원받은 자들이라고 생각하는 그것 자체가 심판의 대상이 된다고 바울 사도는 지적하였다. 율법이 있다는 것으로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생각하는 스스로의 생각은 잘못되었다는 것이다. 오히려 율법을 가지고 율법대로 살지 않았으니 유대인이 받는 할례는 무효라고 주장했다. 그래서 표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 아니고 이면적 유대인이라야 진정한 유대인이라고 하였다. 그들이 이렇게 무할례자로 또한 유명무실한 유대인이 된 것은 마음에 할례를 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렇다면 유대인의 나음이 무엇인가? 바울 사도는 계속해서 복음을 설명하기 위하여 율법에 대해 오해하고 있는 유대인들의 가상적 질문을 가지고 답변해 나간다. 어쩌면 이러한 문제들은 과거에 바울 사도 자신이 가졌던 의문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바울은 예상되는 반대자들의 질문을 스스로 해 나가면서 복음을 설명한다. 


반대자들이 충분히 할 수 있는 질문이란 이런 것이다. “그런즉 유대인의 나음이 무엇이며 할례의 유익이 무엇이냐”(1절). 만약 율법을 가지고 있다고 하면서 그대로 행하지 않았다면 하나님의 심판을 받을 수밖에 없고, 또한 육체적 할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마음의 할례가 중요하다면 유대인이 무엇이 낫다는 것이며 특권이나 유익이란 아무 것도 없는가? 할례는 전혀 받을 필요가 없었는가?

 

이런 물음에 대한 답변을 바울 사도는 한 마디로 “범사에 많으니 우선은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맡았음이니라”(2절)라고 했다. 바울 사도가 이스라엘의 특권 가운데서 우선(첫째)으로 꼽은 것은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맡았다는 것이다. 이는 유대인들의 입장에서 하는 말인데 하나님 편에서 말하자면 하나님께서 유대인들에게 말씀을 맡겼다는 것이다. 말씀을 맡겼다는 것은 단순히 보관을 잘하라는 뜻이 아니다. 그러기 때문에 유대인이 말씀을 잘못 보관했다는 책망으로 하는 것이 아니다.

 

유대인이 특별하였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을 맡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맡았기 때문에 특별한 존재였다. 하나님의 말씀을 받음으로 하나님과 특별한 관계에 있는 것이 언약의 관계이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언약이 이스라엘에게만 주어졌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언약이 이스라엘에게만 주어졌다는 것은 그것으로 특권 의식을 가지고 이방인들을 멸시하라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선택하시고 그들에게 언약을 주신 것은 언약 정신을 역사 속에 나타내 보이시기 원했던 것이다. 그것을 출애굽기에서 한 마디로 이렇게 표현하고 있다.



5세계가 다 내게 속하였나니 너희가 내 말을 잘 듣고 내 언약을 지키면 너희는 모든 민족 중에서 내 소유가 되겠고 6너희가 내게 대하여 제사장 나라가 되며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 너는 이 말을 이스라엘 자손에게 전할지니라(출 19:5-6)



이스라엘이 제사장 나라가 된다는 것은 출애굽 때에 유월절 어린양의 희생에 의해 나온 것을 기억하는 나라가 된다는 의미이다. 하나님의 언약 정신을 유월절 어린양의 피 속에 담아놓고 그것을 기억하라는 뜻이었다. 다시 말해서 이스라엘이 자기들의 힘으로 출애굽 할 수 있었던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희생에 의한 구원이라는 것을 아는 나라이다. 사도 바울은 그 언약 정신을 본문에서 “하나님은 미쁘심”(신실하시다)(3절)이며 또한 “하나님은 참(진리)되시다”(4절)라는 것이며, “하나님만이 의로우시다”(5절)라는 것으로 표현하고 있다. 이것을 보여주는 그가 바로 진짜 이스라엘이며 이면적 유대인이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철저하게 실패하였다. 하나님의 언약이 부실했거나 하나님께서 잘못 일하셨기 때문에 그들이 실패한 것이 아니라 그들의 죄가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언약에 대해 실패하도록 몰고 갔다는 것이다. 그러기에 하나님께서 인간을 자기 정욕대로 살도록 그냥 내버려 두신다는 사실이 얼마나 큰 진노요 심판인지 알아야 한다. 이런 점에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민족에게 말씀을 주셨지만 그들의 죄로 말미암아 언약의 실체가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죽일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고 해서 언약의 실패자인 이스라엘이 언약의 당사자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죽인 것이 하나님 잘못인가? “어떤 자들이 믿지 아니하였으면 어찌하리요 그 믿지 아니함이 하나님의 미쁘심을 폐하겠느냐”(3절). 여기에 대하여 바울 사도는 결코 그럴 수 없다고 분명하고 확실하게 단언한다. 인간의 불의가 결코 하나님의 믿음을 변경시키거나 하나님의 목적을 수포로 돌릴 수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바울은 “그러나 우리 불의가 하나님의 의를 드러나게 하면 무슨 말 하리요”(5절)라고 선언한다. 이 말씀은 인간의 불의가 하나님의 의를 드러내는 일에 일조를 한다는 의미가 아니라 인간의 불의에 비추어 하나님의 의는 항상 돋보이게 드러날 수밖에 없다는 뜻이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그럴 수 없느니라 사람은 다 거짓되되 오직 하나님은 참되시다 할지어다 기록된 바 주께서 주의 말씀에 의롭다 함을 얻으시고 판단 받으실 때에 이기려 하심이라 함과 같으니라”(4절)라고 하면서 구약의 시편 51:4 말씀을 인용한다. 



내가 주께만 범죄하여 주의 목전에 악을 행하였사오니 주께서 말씀하실 때에 의로우시다 하고 주께서 심판하실 때에 순전하시다 하리이다(시 51:4)



다윗은 범죄로 말미암아 그의 신실함이 드러나지 못했지만 하나님의 신실하심이 다윗의 죄를 사하심으로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드러내 주고 있다는 것이다(참고 삼하 12:10-13). 그러므로 유대인의 나음이란 말씀을 맡았다는 것인데 그것은 자동적으로 거룩한 의인이 되는 것이 아니라 다만 그 말씀으로 하나님의 원하시는 바를 보다 분명히 아는 데 있었다. 다윗은 자신의 불의로 그 하나님의 긍휼과 은혜를 알게 된 것이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그러한 하나님을 몰랐다. 그러니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이 유대인에게도 내려질 수밖에 없다고 바울은 선언한다. 결국 구약의 모든 역사 속에서 내려주신 계시를 통해 하나님은 자신의 의와 진리를 드러내고자 하신 것임을 알 수 있다.

 

이 문제에 대해 유대인들이 “그러나 우리 불의가 하나님의 의를 드러나게 하면 무슨 말 하리요 [내가 사람의 말하는 대로 말하노니] 진노를 내리시는 하나님이 불의하시냐 결코 그렇지 아니하니라 만일 그러하면 하나님께서 어찌 세상을 심판하시리요 그러나 나의 거짓말로 하나님의 참되심이 더 풍성하여 그의 영광이 되었다면 어찌 내가 죄인처럼 심판을 받으리요”(5-7절)라고 말할 것이라고 바울이 쓰고 있는데 이 말을 풀어서 표현하면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다.


“만일 나의 신실하지 못함이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돋보이게 하며, 나의 불의가 하나님의 의를 더욱 제대로 드러내는 것이 되었다면 우리가 잘못한 것이 무엇인가? 하나님은 내 죄 때문에 오히려 하나님의 의를 드러내는 유익을 얻은 것이 사실 아닌가? 그렇다면 그것 때문에 나에게 심판을 가하실 수 있는가? 만약 심판을 하신다면 그 하나님은 불공평하신 하나님이시다. 결국 나의 불의가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었으니 결과는 선한 것이기 때문에 나를 심판하는 것은 부당하다”라고 자기 정당성을 이야기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바울은 “또는 그러면 선을 이루기 위하여 악을 행하자 하지 않겠느냐 어떤 이들이 이렇게 비방하여 우리가 이런 말을 한다고 하니 그들은 정죄 받는 것이 마땅하니라”(8절)라고 밝힌다. 지금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하는 자들 중에서도 공공연히 이렇게 말하면서 바울 사도가 이렇게 가르치고 있다고 주장한다는 것이다. 그런 자들에게 하나님의 정죄, 심판이 임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라고 복음에 근거해서 바울은 선포한다. 한 마디로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도구로 쓰임 받은 것에 불과하다. 하나님의 도구로 쓰임 받는 것이라는 사실 때문에 유대인들이 말하는 것처럼 ‘우리가 마음대로 살아도 우리의 불의를 가지고 하나님은 자기의 의를 드러내시기 때문에 우리는 마음껏 죄를 범하자!’라고 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는 하나님의 언약을 알지 못한 이스라엘과 같이 아직까지 하나님의 의와 진리를 알지 못한 사람이다. 


어쩌면 우리도 이러한 오해의 복음 속에 있지 않는가? 율법에서 자유한 자가 되었고, 성령의 지배를 받는 자가 성도라고 하니까 우리 마음대로 살아도 괜찮다는 식으로 생각하고 있지는 않는가? 내가 내 마음대로 말해도 성령께서 우리의 불의와 잘못함을 사용하셔서 복음을 듣고 이해하려는 자에게 제대로 잘 알아듣게 일하신다고 너무 쉽게 생각하는 것은 아닌가? 부부관계에서도 우리 인간은 한 몸의 관계를 유지할 수 없는 존재라고 하니까 자기 성깔대로 서로 싸워야 된다고 생각하고 있지는 않는가? 아내 있는 자는 없는 자 같이 없는 자는 있는 자 같이 살라고 하니까 아내에게 혹은 남편에게 너 그렇게 한번 살아보라는 식으로 내팽개치고 자기를 합리화하지는 않는가? 


지금 제가 말하는 것은 어떤 기준을 가지고 매사에 성실하게 최선을 다해서 잘 하자는 식으로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렇다고 내 마음대로 살자는 것도 아니다. 또한 우리가 그렇게 할 수 있다는 것도 아니다. 우리는 그렇게 할 수 없다. 그러나 성령께서는 그렇게 하실 수 있다. 우리는 언약에 실패하면서 살 수밖에 없지만 주님께서 이루신 십자가에 우리 육체의 정욕을 함께 못 박음으로 우리로 하여금 욕심대로 살지 않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실 것이다. 말씀으로 끌고 가신다는 뜻이다. 


복음에 하나님의 의가 믿음으로 나타났다는 것은 우리의 의, 우리의 믿음을 일체 거부하는 것이 복음이라는 의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교회의 가장 큰 문제는 자신의 죄의 실상을 제대로 보지 못하고 자기의 무능을 깨닫지 못한 상태로 적당히 죄된 것을 가르치면서 우리가 무엇인가 할 수 있는 것처럼 가르치는 이것은 심각한 병이다. 많은 교인들이 ‘교회병’에 걸렸는데 그것은 곧 ‘지옥병’이다. 이것은 어떤 약으로도 치유할 수 없는 불치병이다. 우리가 어떻게 하면 고칠 수 있는가 하는 차원이 아니다. 이 땅에서 우리가 행한 모든 것이 지옥병이며 그것이 해가 된다는 것을 아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믿음에 의해 하늘의 의가 주어져야만 알 수 있는 일이다. 



7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8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9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부터 난 의라(빌 3:7-9)


하나님은 자기 의를 드러내시기 위하여 우리의 불의도 사용하실 수 있는 능력의 하나님이시다. 그분이 바로 아들을 십자가 죽음에 내어 놓으신 언약의 하나님이시다. 그 하나님 앞에 율법이 있어도 실패할 수밖에 없고, 아니 율법보다 더 한 것을 주어도 실패는 우리 죄인들의 전유물이라고 고백할 수밖에 없는 사람이 성도이다. 그러면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만 마음에 날마다 새겨진다면 하나님의 은혜가 임했다는 증거라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http://cafe.daum.net/joosung 20190811 강론/김영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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