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강 로마서 1:16-17 하나님의 능력
❖ 로마서 여섯 번째 강론
로마서 1:16-17
하나님의 능력
대체로 교인들은 신앙 혹은 신앙생활에 대해 많은 오해를 가지고 있다. 물론 불교를 믿는다든지 아니면 다른 종교를 가지는 것으로 신앙을 이해한다는 것에 대해서는 할 말이 없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하면서 기독교에 대한 신앙이나 혹은 신앙생활에 대한 것도 다른 종교를 가지는 것과 같은 식으로 이해한다. 대개 여러 신들 중에서 예수라는 한 신을 믿고 섬기는 것으로 신앙을 말하고 있고, 그 신을 위해 일주일에 한두 번 정도 신전 같은 곳에 나가서 종교적인 어떤 의식을 행하는 것을 신앙생활로 착각한다.
물론 제가 말씀드리는 것이 외적인 종교 형태를 다 거부한다는 뜻이 아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은 분명 외적인 종교 형태로 드러날 수 있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러나 그런 생활 자체를 신앙이라고 여기고 있다는 것에 대한 오해를 말씀드리는 것이다. 정작 중요한 것은 신앙의 어떤 외적인 형태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중심이 예수 그리스도를 향해 있는가 하는 문제이다. 기독교 신앙이란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이 되는 것이며 그 마음은 곧 십자가를 품고 마음에 새기는 것이어야 한다.
이런 점에서 신앙이란 어디에 관심을 가지고 있느냐 하는 것으로 표현되고 나타난다고 생각된다. 지금 한국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다. 물론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 성경, 복음, 교회’라는 단어들을 쓰고 있기 때문에 무조건 교회이며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말할지 모르지만 궁극적으로 오직 복음이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관심이 있는 것으로 보이지 않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관심이 없는 증거가 무엇인가? 여러 가지로 말할 수 있겠지만 한 마디로 ‘말씀’에 관심이 없다는 것이다. 말씀에 관심이 없다는 것은 자신의 예수, 즉 가짜 예수를 믿고 있다는 뜻이다. 진리의 말씀 안에서 진리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확인해야 하는데 그저 종교적인 행위에만 관심이 있다.
이렇게 말하면 많은 교인들은 저의 말을 반박하면서 이렇게 말할 것이다. “교회에서 성경공부나 제자훈련, 전도훈련 등을 하면서 말씀을 많이 배우고 있고, 또 개인적으로도 열심히 성경을 읽고 있는데 왜 말씀에 관심이 없다고 하느냐?”라고 말이다. 그런데 실제 이런 관심의 초점이 어디에 있는가? 한 마디로 교회를 키워주는 데 있어서 참고서 정도로 필요한 것이 성경으로 생각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에게 관심이 있다고 하나 자기를 위한 예수로만 믿고 있다.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에 대한 관심은 애초부터 눈꼽만큼도 없었다. 어떻게 예수를 이용하고 어떻게 성경을 활용해서 내 자신이나 교회가 확장되느냐에만 관심이 있다.
오늘날 많은 교회들이 이런 식으로 기독교를 오해하고 있는 것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을 수 있지만 그 중의 한 가지 가장 큰 오해는 성경을 ‘내 구원’이라는 관점에서만 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내가 어떻게 구원을 받을 수 있는가 하는 물음을 가지고 성경에 접근한다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자연히 어떻게 하나님의 능력을 끌어 올 수 있는가 하는 것에만 관심 가지게 되는 것이다. 교회를 찾아 그 모임에 발을 들여놓으면서도 그 생각이 결코 바뀌지 않는다.
복음은 우리 인간의 것이 아니기에 “하나님의 복음”(1절)이라고 하였다. 하나님의 약속에 의해 주신 아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이루어진 것이기에 “아들의 복음”(2,9절)이라고 하였다. 또한 약속대로 성취하신 것을 성령께서 자기 언약 백성들에게 나누어 주시는 것이기 때문에 “신령한 은사”(4,11절)라고 하였다. 여기서 바울 사도는 “빚진 자”라고 하였는데 이는 하나님의 언약 속에 이방인들에게 나타내시기로 한 약속에 참여되어 하나님의 은혜를 탕감받은 죄인으로서 이 복음을 로마 교회 성도들과 나누어 함께 진리에 굳게 서기 위해 로마에 가기를 간절히 원하였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서 “왜냐하면”이라고 표현한다(16,17절에 헬라어 성경에는 “가르”(왜냐하면)라는 접속사가 있는데 우리 성경에는 번역이 안 되어 있다). 즉 로마에 가기를 간절히 원한 것은 복음의 진수를 나누기 위함인데 이 복음이 하나님의 능력이고 이 복음에 하나님의 의가 나타났기 때문이라고 밝힌다.
“(왜냐하면)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그리고 헬라인에게로다”(16절). 바울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라고 하였는데 왜 이런 말을 하고 있을까? 그것은 바로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러면 “하나님의 능력”이란 무엇인가? 고린도전서에 보면 바울이 이렇게 말씀한다.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전 1:18)
1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나아가 하나님의 증거를 전할 때에 말과 지혜의 아름다운 것으로 아니하였나니 2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 3내가 너희 가운데 거할 때에 약하고 두려워하고 심히 떨었노라 4내 말과 내 전도함이 설득력 있는 지혜의 말로 하지 아니하고 다만 성령의 나타나심과 능력으로 하여 5너희 믿음이 사람의 지혜에 있지 아니하고 다만 하나님의 능력에 있게 하려 하였노라(고전 2:1-5)
여기서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않기로 했다고 선언한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만이 하나님의 능력이 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결국 하나님의 능력이란 무엇인가? 한 마디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이다. 실로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지만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다. 결코 이 말이 하나님의 능력이 내 것이 되어 내가 마음대로 발휘할 수 있는 능력이라는 의미가 아니다. 복음은 우리의 능력이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이다. 그래서 고린도후서 4:7에 이렇게 선언하였다.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이는 심히 큰 능력은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고후 4:7)
인간은 질그릇이고 그 속에 보배를 가졌다고 말씀한다. 예수 그리스도가 믿어졌다 하더라도 우리 자신이 하나님의 큰 능력을 받아 그 능력을 발휘하는 존재가 아니라 여전히 질그릇으로 존재하는데 다만 그 속에 보배를 넣어 주신 것이 달라졌다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으신 자리 곧 십자가에 내가 주님과 더불어 죽는 모습으로 끌려 들어간 상태가 구원이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능력인 십자가에 날마다 죽는 상태가 되었다는 것이다.
인간은 자기에게 어떤 능력이 있다고 느끼는 순간에는 외부의 어떤 신도 믿지 않는다. 물론 인간은 태생적으로 자기 자신을 믿는 존재이지만 자신의 능력을 발견하면 발견할수록 더 더욱 자기 자신만 믿는 자가 된다. 그것을 우리는 신앙이라는 이름으로 자신을 더욱 공고히 하고 싶어서 예수라도 믿어서 신의 능력을 내 것으로 만들고자 한다. 그래서 대부분의 교인들은 열심히 기도를 한다든지 매일 Q.T.를 한다든지 아니면 전도를 열심히 하고 심지어는 목사를 잘 섬기는 것으로 자신의 신앙을 나타내려고 한다. 이 모든 것들은 신앙을 내 쪽에서 어떤 종교적 행위를 하는 것으로 인식하기 때문에 나타나는 필연적인 현상이다.
그러기 때문에 바울 사도는 빚진 자로서 로마에 복음을 나타내기를 간절히 원하지만 그것이 단순히 죄인의 모습으로 로마 교회에 나아가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라고 하였다. 마가복음 8:38에 보면 “누구든지 이 음란하고 죄 많은 세대에서 나와 내 말을 부끄러워하면 인자도 아버지의 영광으로 거룩한 천사들과 함께 올 때에 그 사람을 부끄러워하리라”라고 하였는데 “나와 내 말”이란 예수님과 예수님의 말씀인데 당시 사람들은 예수님이 나타내신 복음도 세상 것과 같은 것으로 생각하였기에 부끄러운 것으로 여겼다.
그러면 인간이 왜 부끄러움의 상태가 되었는가? 창세기 2:25에 보면 “아담과 그의 아내 두 사람이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니라”라고 하였는데 선악과를 먹은 이후에는 “이에 그들의 눈이 밝아져 자기들이 벗은 줄을 알고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 치마로 삼았더라”(창 3:7)라고 하였고 아담은 “이르되 내가 동산에서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내가 벗었으므로 두려워하여 숨었나이다”(창 3:10)라고 하였다. 즉 선악과를 먹기 이전에는 부끄러움이 없었으나 선악과를 먹은 이후에는 부끄러워 하는 상태가 되었고 그 부끄러움은 곧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것이 되었다. 다시 말해서 죄 가운데 있는 상태가 부끄럽고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상태이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가죽옷을 지어 입히셨는데(창 3:21) 이는 곧 하나님의 덮어줌의 은혜를 입었다는 뜻이다.
이런 점에서 바울 사도는 이제 복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능력 안에 있는 상태가 되었기 때문에 부끄러워 하지 않는다고 선언하였다.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그리고 헬라인에게로다”라고 하였는데 여기서 유대인 헬라인으로 표현한 것은 유대인과 이방인의 구분을 표현한 말로 유대인이 먼저 구원을 얻는다는 말이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이 주어지는 것은 누구에게든지 차별이 없다는 뜻이다.
이 말을 다른 말로 하면 이제 복음만 자랑하겠다는 뜻이다. 왜 바울에게 있어서 복음만이 자랑거리가 되는가? 그것은 바로 복음이 하나님의 능력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께서 언약대로 그의 아들을 십자가 죽음에 내어 주시고 예수 그리스도라는 보배를 질그릇과 같은 자기 백성들에게 담아 주신 것이 하나님의 능력이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자신의 약함 가운데서 하나님의 능력이 드러나는 것을 자랑한다고 고린도후서에서 이와 같이 선포하였다.
나에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그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고후 12:9)
그러기 때문에 주님의 십자가 능력 안에만 머물도록 하시기 위해 우리를 무능력하게 만드시는 것이 하나님의 능력이다. 따라서 우리가 말할 수 있는 믿음이란 무엇인가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아니라 자신의 무능을 철저히 주님 앞에 고백하는 상태여야 한다. 그것이 말씀 안에 거하는 상태이며 그 말씀에 의해 발생되는 현상을 히브리서 기록자가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12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활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판단하나니 13지으신 것이 하나도 그 앞에 나타나지 않음이 없고 우리의 결산을 받으실 이의 눈 앞에 만물이 벌거벗은 것 같이 드러나느니라(히 4:12-13)
말씀이 우리를 찔러 쪼개고 해체하여 하나님 앞에 완전히 벌거벗은 상태로 드러나게 한다. 그럴지라도 우리는 복음이라는 하나님의 능력 안에 있는 상태이기에 그것이 결코 부끄러운 상태가 될 수 없는 것이다. 아니 그래야만 덮어 주시는 은혜를 누릴 수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하나님의 사랑을 입어 부름을 받은 자를 성도라고 한다(http://cafe.daum.net/joosung 20190512 강론/김영대).✞
롬06.0116-17 하나님의 능력(20190512).pdf