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주제 강론/예수님의 비유

누가복음 14:7-14 높은 자리와 낮은 자리 비유

불편한 진리 2019. 3. 18. 09:28

❊ 예수님의 비유 강론 25

누가복음 14:7-14
높은 자리와 낮은 자리 비유



예수님께서 본 비유를 말씀하시게 된 동기를 보면 “청함을 받은 사람들이 높은 자리 택함을 보시고 그들에게 비유로 말씀하여 이르시되”(7절)라고 밝히고 있다. 초대를 받은 사람들이 서로 높은 자리를 차지하려고 하는 것에 대해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는데 “택함을 보시고”라는 말씀의 ‘택하다’라는 말은 헬라어에서 미완료과거형으로 쓰였고 ‘보시고’라는 말은 현재분사이다. 즉 과거로부터 행위가 현재까지 계속되고 있다는 뜻이다.


유대인들의 식사는 왼쪽으로 비스듬이 기대어 앉는 형식이고 잔치나 만찬에서 자리는 “U”자 형의 낮은 식탁에 구부러진 중앙을 중심으로부터 좌측 그리고 우측의 순서로 상좌가 정해진다. 대부분의 경우 잔치의 주인은 특별히 초대한 손님을 위하여 미리 합당한 자리를 지정해 놓는데 오늘날처럼 명패를 붙여놓지는 않기 때문에 누구를 위한 자리인지는 주인만 알고 있었다. 주인이 생각해 둔 사람이 있었다는 의미에서 그 자리는 지정석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네가 누구에게나 혼인 잔치에 청함을 받았을 때에 높은 자리에 앉지 말라 그렇지 않으면 너보다 더 높은 사람이 청함을 받은 경우에 너와 그를 청한 자가 와서 너더러 이 사람에게 자리를 내주라 하리니 그 때에 네가 부끄러워 끝자리로 가게 되리라 청함을 받았을 때에 차라리 가서 끝자리에 앉으라 그러면 너를 청한 자가 와서 너더러 벗이여 올라 앉으라 하리니 그 때에야 함께 앉은 모든 사람 앞에서 영광이 있으리라”(8-10절)라고 말씀하신다. 예수님의 이 말씀만 딱 떼어놓고 보면 우리에게 높은 자리에 앉지 말고 낮은 자리에 앉기를 힘쓰라고 한 것처럼 보인다.


이 비유에 대한 많은 설교들을 보면 마치 세상에서 어떻게 살아야 내가 대접을 받을 수 있는가 하는 처세술 정도로 해석한다. 예수님의 말씀들은 세상에서 어떻게 살아야 인간관계를 잘 맺어 남에게 대접 받으며 행복하게 살 수 있는가에 대한 교훈이 아니다. 그런 것은 인터넷에 찾기만 해도 ‘자기 처세술 꿀팁’ 혹은 ‘존경을 받는 처세술 10계명’ 등등으로 넘쳐난다. 교회마저도 복음이 아닌 이런 내용들로 설교시간을 채우고 있다면 이미 교회이기를 포기한 것이다. 이 비유는 우리가 이렇게 살기 위하여 노력해야 한다는 것을 말씀하는 것이 아니며, 낮은 자리에 앉은 자에 대한 보상을 말씀하신 것도 아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말씀하고자 하신 것이 무엇일까? 이 비유를 이해하기 위하여 우리는 문맥을 좀 살펴 보도록 하자. 1절에 보면 “안식일에 예수께서 한 바리새인 지도자의 집에 떡 잡수시러 들어가시니 그들이 엿보고 있더라”라고 밝히고 있다. 예수님은 안식일에 바리새인 지도자의 집 만찬에 참여하셨다. 바리새인의 식사에 참여하신 것은 그것 자체로도 그 집에 은혜를 베풀고 계시며 구원의 기회가 주어졌다는 비유적 행위이다. 바리새인의 지도자였으니 아마도 여러 바리새인들이 함께 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그 바리새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의 은혜를 생각하기보다 자신의 종교적 열심을 지켜내는 일환으로써 예수님을 비난하고 꼬투리를 잡아 제거하기 위하여 계속 엿보고 있었다. 2절에 보면 “주의 앞에 수종병 든 한 사람이 있는지라”라고 하였다. 예수님 앞에 수종병이 든 자가 있었다는 것으로 아마도 율법교사들과 바리새인들이 예수님께 어떤 질문을 하였는지 아니면 안식일을 범하도록 유도하고자 하는 마음을 가졌던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예수께서 대답하여”(3절)라고 기록하고 있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그들의 의도를 아시고 답변을 하시는 형식으로 이렇게 질문하신다. “안식일에 병 고쳐 주는 것이 합당하냐 아니하냐”(3절).


“수종병”(개역성경에서는 “고창병”)이란 헬라어로 ‘휘드로피코스’인데 ‘휘도르’(물)와 ‘옵타노마이’(나타나다)의 합성이이다. 사전에 보면 “복부에 물이 차서 심장, 신장, 간장 등을 압박하고 몸이 붓는 병”이라고 되어 있는데 유대인들에게 부정하게 여겨졌다. 이런 자가 바리새인의 만찬에 있었다는 것은 초대받았다기 보기보다는 당시의 관습대로 참관자로 들어온 자임을 추측할 수 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예수님께서 이 병자를 고쳐주시고 이를 통해 바리새인과 율법사들에게 하나님 나라의 잔치에 대하여 가르치기 위하여 의도적으로 그 자리에 두시고 고쳐주셨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너희 중에 누가 그 아들이나 소가 우물에 빠졌으면 안식일에라도 곧 끌어내지 않겠느냐”(5절)라고 물으시자 “그들이 이에 대하여 대답하지 못하니라”(6절)라고 한 것을 보면 바리새인들은 안식일에 일을 하거나 병 고치는 것을 금하면서도 예수님의 논증에는 별다른 반론을 제기하지 못했다(눅 6:1-11, 13:10-17). 율법교사들과 바리새인들이 이렇게 예수님을 책잡고자 노력하고 있을 때에도 예수님은 구원의 은혜가 병들어 소외된 자들에게 베풀어지고 있다는 것을 보여 주신다. 수종병, 즉 물에 잠긴 것과 같은 병자를 거기서 끌어내고 고쳐주신 것은 가축을 우물에서 건져내는 것보다 더 중요한 일이었다.


예수님은 이 이적을 통해 죄의 권세에 매여 병든 이웃에 대해서는 무관심한 채 율법을 준수하는 자신의 풍부한 현실(안식일 만찬)에 안주하면서 안식일 교리로 예수님을 죽이고 싶어하는 인간의 죄성을 적나라하게 폭로하셨다. 결국 하나님 나라의 잔치에 참여된다는 것은 우리 스스로가 어떤 교리에 맞추어 사는 것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은혜로 허락하시는 안식이라는 잔치에 기적적으로 참여시켜 주시는 것으로만 가능함을 나타내셨다.


그러나 율법교사들과 바리새인들은 하나님 나라의 은혜를 생각하기보다 그저 율법으로 자기를 극대화하고 명예롭게 되는 것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예수님께서 그들은 “잔치의 윗자리와 회당의 높은 자리와 시장에서 문안 받는 것과 사람에게 랍비라 칭함을 받는 것을 좋아”(마 23:6-7)하는 자들이라고 하셨다. 또 “긴 옷을 입고 다니는 것을 원하며 시장에서 문안 받는 것과 회당의 높은 자리와 잔치의 윗자리를 좋아하는 서기관들을 삼가라”(눅 20:46, 참고 막 12:38-39)라고도 하셨다.


그래서 예수님은 비유를 통해 높은 자리보다 차라리 끝 자리에 가서 앉으라고 말씀하시며 비유의 결론을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11절)라고 하셨다. 이 말씀 외에도 예수님은 다른 복음서에서 “누구든지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누구든지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마 23:12)라고 하셨고 바리새인과 세리의 비유에서도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하시니라”(눅 18:14)라고 하셨다.


높은 자리를 먼저 선택했던 사람이 공개적으로 부끄러움을 당함과 끝 자리를 선택했던 사람이 공개적으로 영광을 받음이 대조되었다. 하나님 나라가 바로 이와 같다는 의미이다. 천국은 높은 자리와 낮은 자리가 없지만 세상의 원리와 원칙으로 설명하자면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진다 반대현상이 될 것이다. 즉 세상의 원리와 법칙과는 거꾸로 전환되는 것이 천국이다.


그러면서 이어서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신다. “또 자기를 청한 자에게 이르시되 네가 점심이나 저녁이나 베풀거든 벗이나 형제나 친척이나 부한 이웃을 청하지 말라 두렵건대 그 사람들이 너를 도로 청하여 네게 갚음이 될까 하노라 잔치를 베풀거든 차라리 가난한 자들과 몸 불편한 자들과 저는 자들과 맹인들을 청하라 그리하면 그들이 갚을 것이 없으므로 네게 복이 되리니 이는 의인들의 부활시에 네가 갚음을 받겠음이라 하시더라”(12-14절). 예수님의 이 말씀을 한 마디로 하자면 가난한 자들과 함께 하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여기서 가난한 자란 어떤 의미인가?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 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하고(눅 4:18)


20예수께서 눈을 들어 제자들을 보시고 이르시되 너희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하나님의 나라가 너희 것임이요 21지금 주린 자는 복이 있나니 너희가 배부름을 얻을 것임이요 지금 우는 자는 복이 있나니 너희가 웃을 것임이요 22인자로 말미암아 사람들이 너희를 미워하며 멀리하고 욕하고 너희 이름을 악하다 하여 버릴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도다(눅 6:20-22)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가 가서 보고 들은 것을 요한에게 알리되 맹인이 보며 못 걷는 사람이 걸으며 나병환자가 깨끗함을 받으며 귀먹은 사람이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하라(눅 7:22)


뿐만 아니라 이 비유와 연결된 문맥 속에 있는 다음 비유 속에서도 “가난한 자들과 몸 불편한 자들과 맹인과 저는 자들”(눅 14:21)이라고 표현하였다. 이 모든 본문에서 몸이 불편하며 앞을 보지 못하는 자들, 주린 자, 나병환자나 귀 먹은 자들, 심지어 죽은 자들과 같은 존재로 표현하고 있다는 것은 누가의 입장에서 가난한 자란 단순히 세상에서 물질적으로 가난함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죄로 말미암아 부족하고 결핍되어 없음의 상태에 있는 자들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죄의 권세에 매인 자들을 해방시켜 자유하게 하는 것이 구원의 은혜임을 나타내고 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 나라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낮은 자리, 자기를 낮춘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가? 빌립보서에 보면 바울 사도가 우리에게 이렇게 답을 주고 있다.


6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7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8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빌 2:6-8)


낮아진다는 것은 단순히 겸손하게 산다는 의미가 아니라 십자가에 죽는 것이다. 그러면 우리가 스스로 자기를 낮추고 살 수 있는가? 다시 말해서 스스로 십자가에 죽을 수 있느냐 하는 것이다. 결코 그럴 수 없다. 죄 가운데 있는 우리들에게는 불가능한 일이다. 이런 점에서 예수님께서 이 비유를 통해 말씀하신 것은 우리에게 겸손하게 살라는 말씀을 하신 것이 아니라 십자가가 아니면 천국은 우리가 감히 생각도 할 수 없는 것이라는 의미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만이 나에게 낮아짐의 은혜를 베푸신 근거가 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반대로 이 말씀에 비추어 높은 자리, 높아진다는 것은 어떤 의미인가? 한 마디로 십자가가를 거부하는 사고방식이나 정신이다. 십자가 없이 주어지는 이적, 체험, 세상의 모든 영광으로 예수님을 시험했던 바로 그것이다(마 4:1-11). 비록 성경에서 차용한 용어라 할지라도 세상에서 십자가 없는 말씀, 안식, 생명, 사랑, 구원, 은혜는 천국과 전혀 상관이 없는 것들에 불과하다.

그러므로 하나님 나라, 요한계시록에서 보여 주는 묵시의 세계에서 이기는 자, 왕노릇 하는 자는 세상에서 망하는 자이고 목 베임을 당하며 죽임을 당하는 자이기에 성도는 세상에서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낮아진 자, 십자가에 죽임을 당한 자로 살아갈 수밖에 없는 것이며 그것이 바로 십자가가 믿어진 우리의 정체성이다(http://cafe.daum.net/joosung 20190317 강론/김영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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