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복음 16:19-31 부자와 나사로 비유
❊ 예수님의 비유 강론 22
누가복음 16:19-31
부자와 나사로 비유
부자와 거지 나사로에 대한 본 비유로 인해 많은 사람들은 죽은 이후에 대한 것이나 혹은 천국에 대한 상상을 하였다. 그래서 어떤 성경학자는 이 비유는 죽음 이후에도 각 사람의 신분이 그대로 남아 있으며 또한 사람의 과거 기억이 그대로 남아 있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죽은 후에도 나사로는 여전히 나사로이며 부자 역시 그렇다는 것이다. 또 사람이 죽은 이후에도 인식 능력이 그대로 남아 있다는 것이다. 과연 이 비유를 통해 천국을 우리가 이렇게 정의할 수 있는 것인가?
또한 저 개인적으로는 젊은 시절 이 비유를 읽을 때마다 가지는 의문이 하나 있었다. 그것은 본문 속에서 거지 나사로가 예수님을 믿었다든지 혹은 부자는 믿지 않았다든지 하는 언급이 전혀 없다는 것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죽어서 거지 나사로는 천국으로 가고 부자는 지옥으로 갔다는 것으로 인해 많은 고민이 있었지만 이 문제에 대해 누구 하나 시원한 해석을 주는 사람이 없었다.
그런데 우리가 분명히 알아야 하는 것은 본 비유는 결코 우리들에게 죽음 이후 혹은 천국에 대한 정보를 제공하기 위한 목적으로 예수님께서 이 비유를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이 비유 역시 하나님 나라에 대한 비유이다.
하나님 나라의 비유라고 해서 죽음 이후의 것으로만 생각해서는 안 된다. 예수님은 이 땅에서의 삶과 죽음 이후의 삶을 자유롭게 넘나들면서 하나님의 나라가 지금 여기 이 땅에 어떻게 들어와 있는가를 말씀하시기 위하여 이 비유를 말씀하셨다. 그렇다면 이 비유를 통해 예수님께서 말씀하고자 하신 것이 무엇일까?
비유를 살펴보기 전에 먼저 본문의 문맥을 보면 예수님께서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있는 자리에서 잃은 것에 대한 비유를 세 가지로 말씀하시고 제자들을 향하여 ‘불의한 청지기 비유’를 통해 “불의한 재물로 친구를 사귀라”(9절)라고 말씀하시면서 결론을 “집 하인이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나니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길 것임이니라 너희는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느니라”(13절)라고 하셨다.
이 땅의 불의한 재물로 친구를 사귀고자 할 때에 친구가 되어주시는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를 알아야 하지만 불의한 힘에 사로잡혀 노예가 된 자들은 결코 하나님을 섬길 수 없다고 선언하시자 그것을 곁에서 들은 바리새인들이 비웃었다. 그들이 비웃는 이유는 자신들은 재물과 겸하여 하나님을 제대로 섬기고 있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18절에서 “무릇 자기 아내를 버리고 다른 데 장가 드는 자도 간음함이요 무릇 버림당한 여자에게 장가드는 자도 간음함이니라”라는 말씀이 느닷없이 삽입되어 있는 듯한 느낌을 받는데 예수님의 진의는 재물을 겸하여 하나님을 섬긴다고 생각하는 그것이 곧 간음이라는 뜻이다.
이는 언약의 하나님을 거부하여 우상숭배한 것을 간음이라고 한 구약적 배경을 지닌 말씀이다. 그러므로 바리새인들이 스스로 의롭다고 여기나 사람들 중에 우뚝 솟은 그것이 바로 우상숭배(미움)라고 말씀하셨다(15절).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리새인들은 자기들의 생각과 고집에 사로잡혀 있었다. 실제로 바리새인들은 명예와 재물에 대한 높은 가치를 두고 있었고 많은 재물을 가지게 된 것은 하나님께서 축복하신 것이라고 믿었다. 그들이 이런 생각을 가진 근거는 당연히 율법이었다.
그래서 “율법과 선지자는 요한의 때까지요 그 후부터는 하나님 나라의 복음이 전파되어 사람마다 그리로 침입하느니라 그러나 율법의 한 획이 떨어짐보다 천지가 없어짐이 쉬우리라”(16-17절)라고 말씀하셨다. “율법과 선지자”란 구약 시대를 통칭해서 하는 말이고 그것은 요한의 때까지이다.
이제는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하나님 나라의 복음이 전파되어 사람에게 침입한다고 말씀하셨다. 바리새인들은 율법을 잘 지켜 율법을 정복한다고 생각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오히려 그것은 눈에 보이는 것에 불과한 천지가 없어져야 하나님의 말씀이 온전히 성취되어 드러난다고 말씀하셨다.
이런 점에서 예수님은 부자와 거지 나사로에 대한 비유를 말씀하신다. 부자의 모습을 누가는 이렇게 보여 주고 있다. “한 부자가 있어 자색 옷과 고운 베옷을 입고 날마다 호화롭게 즐기더라”(19절). 부자에 대한 선입견을 우리는 무조건 좋지 않게 가지고 있는데 사실 본문을 자세히 보면 이 부자는 거지 나사로에게 대단히 긍휼을 베풀어 자신의 상에서 떨어지는 것을 거지에게 용납하고 있었다.
또한 아브라함을 아버지로 여기는 믿음을 가진 자로 죽어서도 형제를 생각하는 가족애가 있는 자였다. 그러나 그 모든 것들이 생명을 누릴 수 있는 근거가 될 수는 없었다.
이제 예수님은 이 비유를 그들의 죽음 이후의 상황으로 연결시키신다. “이에 그 거지가 죽어 천사들에게 받들려 아브라함의 품에 들어가고 부자도 죽어 장사되매”(22절). 앞에서 부자를 먼저 언급한 것과는 달리 죽음 이후에는 거지 나사로를 먼저 언급하여 반대적 상황을 더욱 부각시키고 있다.
이는 물이라도 혀에 적셔주기를 원하는 부자의 말에 대한 아브라함의 답변 속에서도 더욱 강조되고 있다. “아브라함이 이르되 얘 너는 살았을 때에 좋은 것을 받았고 나사로는 고난을 받았으니 이것을 기억하라 이제 그는 여기서 위로를 받고 너는 괴로움을 받느니라”(25절).
본 비유를 통해 예수를 믿느냐 아니냐 하는 것으로 설명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다. 부자로서 얼마나 허랑방탕하며 살았느냐 하는 질책도 아니다. 예수님께서는 비유를 통해 이 땅과 하나님 나라가 정반대의 상황임을 말씀하신다.
사람들이 생각하는 가치와 하나님께서 생각하시는 가치가 적당히 조화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극과 극의 반대라는 것이다. 그러기 때문에 이 땅에서의 삶과 천국으로 임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의 삶은 정반대가 될 수밖에 없다.
부자는 아브라함을 향해 “아버지 아브라함이여”(24,27,30절)라고 부른다. 누가복음 3:8에 보면 세례자 요한이 이렇게 선포하였다. “그러므로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고 속으로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라 말하지 말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이 능히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하시리라.” 이런 맥락에서 볼 때 부자는 아직도 아브라함을 자기 조상으로 생각하고 있고 자신은 아브라함의 후손이기 때문에 당연히 아브라함을 통해 이어지는 언약의 복을 받아야 하는 것이 아니냐고 항변하고 있었다.
이렇게 자기 자신에게 언약의 긍휼이 베풀어지는 것이 당연하고 영생을 스스로 취할 수 있다고 여기는 자가 부자이다. 이런 점에서 비유의 부자는 불의한 것으로 불의한 땅에서 살고자 하는 바리새인들의 모습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다.
부자는 다시 지상의 형제 다섯을 생각하면서 그들에게 나사로를 보내어 회개하도록 만들어 주기를 구한다. 부자는 죽어서 깨달았기 때문에 형제들을 위해 전도를 하기 원했다고 생각해서는 안 될 것이다. 오히려 부자는 나머지 형제들이 부자도 유지하면서 죽어서도 영생을 누리고자 하는 마음으로 율법에 근거하여 아브라함으로 하여금 긍휼을 베풀기를 호소하고 있는 것이다.
이는 형제에 대한 호소를 통해 그 긍휼에 자신이 포함되기를 원하는 마음일 뿐이다. 부자는 끝까지 자기 자신만을 생각하는 자였다. “이르되 그렇지 아니하니이다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만일 죽은 자에게서 그들에게 가는 자가 있으면 회개하리이다”(30절)라고 한 것을 보면 죽은 자가 살아 돌아오는 이적이 나타나면 회개할 것이라는 회개에 대한 잘못된 개념을 가지고 있었다.
아브라함의 답변은 분명했다. “아브라함이 이르되 그들에게 모세와 선지자들이 있으니 그들에게 들을지니라”(29절). 또 31절에서도 “이르되 모세와 선지자들에게 듣지 아니하면 비록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는 자가 있을지라도 권함을 받지 아니하리라 하였다 하시니라”라고 말씀한다.
즉 하나님께서 주신 율법의 말씀 또한 선지자들의 선포가 있기에 그 말씀에 하나되지 못했다면 죽었다 깨어난 자가 아무리 선포한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공허한 메아리에 불과한 것이다. 여기 “권함을 받지 아니하리라”라는 말은 ‘설득당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그것이 바로 불순종이다.
부자와 같은 사고방식을 가진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의 죄악상을 고발하시기 위하여 예수님은 후에 실제 “나사로”라는 친구를 다시 살리심으로 “마리아에게 와서 예수께서 하신 일을 본 많은 유대인이 그를 믿었으나”(요 11:45),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은 “이 날부터 그들이 예수를 죽이려고 모의하니라”(요 11:53)라고 밝히고 있다. 실제 나사로가 살아나도 그들은 표적으로 말씀의 온전한 성취를 보여 주신 십자가를 전혀 생각하지 않고 오히려 예수님을 죽이려고 하였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나사로를 통해 말씀하고자 하신 것이 무엇이었을까? 부자와는 대조적인 나사로의 모습은 이러하였다. “그런데 나사로라 이름하는 한 거지가 헌데 투성이로 그의 대문 앞에 버려진 채 그 부자의 상에서 떨어지는 것으로 배불리려 하매 심지어 개들이 와서 그 헌데를 핥더라”(20-21절).
예수님의 비유 중에서 사람 이름이 언급 된 것은 이 비유가 유일하다. 그러면 왜 예수님께서 이 비유의 등장 인물을 “부자”와 “나사로”로 대조하였을까? “나사로”라는 이름의 히브리 이름은 하나님의 도우심이라는 뜻의 ‘엘아자르’이다(이 이름은 우리 성경에서 ‘엘리에셀’ 혹은 ‘엘르아살’이다). 그런데 그가 “거지”라는 것이다.
우리 성경에 “거지”라고 번역하였는데 헬라어로는 ‘프토코스’, 즉 ‘절대적인 가난에 처한 자’라는 의미이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나사로가 거지라는 것을 통해 ‘하나님의 도움이 없이는 살 수 없는 자’를 상징적으로 나타내고자 하신 것이었다. 또한 “헌데”라고 하였는데 이 말은 욥에게 주어진 ‘종기’(욥 2:7)이고 애굽에 내려진 여섯 번째 재앙의 ‘악성 종기’(출 9:9)와 같은 것이다.
거기를 개가 핥는다는 표현으로 철저하게 버려져 개와 같은 이방인이 된 상태, 사탄의 저주를 받은 죄인의 비참한 모습으로 극대화하고 있다. 결국 죄 가운데 가장 비참한 상태에 있기에 하나님의 돌보아 주시는 은혜가 없다면 살 수 없는 자를 말씀한다. 이런 점에서 ‘거지 나사로’란 표현은 아무 것도 한 것이 없음을 나타내는 말이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이 비유를 통해 궁극적으로 말씀하고자 하신 것이 무엇일까? 그것은 앞의 비유와 연관해서 생각해 보면 잃은 것을 찾으시는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로 이 땅에 오셨고 친히 찾아오심으로 회개를 이루시는 이것이 천국이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잃은 자, 죽은 자에게는 의가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불의한 재물로 사는 자에게 찾아오셔서 친구가 되어주신 것이 바로 십자가 사건이다. 결국 인간의 행위가 천국과 지옥을 구분하는 것이 될 수 없다는 것이며, 인간의 선악 판단이 천국과 지옥의 구분이 될 수 없다는 뜻이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이렇게 선포하였다.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로 말미암음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줄 알므로 우리도 그리스도 예수를 믿나니 이는 우리가 율법의 행위로써가 아니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함이라 율법의 행위로써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느니라(갈 2:16)
우리 성경에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또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라고 번역하였는데 헬라어 성경의 문장 그대로 직역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믿음으로’라는 말이다. “율법의 행위로써가 아니고”라는 말은 우리의 모든 행위가 불의라는 의미이다. 십자가란 예수님의 믿음에 의해 이루어진 하나님의 행위이다.
천국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셨고 십자가로 나를 찾아 오셨기에 내가 그분을 믿게 되었다는 것은 나의 의가 없음이 전제된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렇게 정의할 수 있을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란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되어 그분의 믿음 안에 있다는 말이며, 그분의 믿음 안에 있다는 것은 내 행위가 철저히 끊어졌다는 뜻이다. 결국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란 나의 행위가 끊어진 자를 말한다(http://cafe.daum.net/joosung 20190217 강론/김영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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