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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서 8:28 합력하여 이루는 선

불편한 진리 2019. 1. 7. 11:55

■ 20190106

로마서 8:28
합력하여 이루는 선


우리 인간은 죄인이다. 우리가 죄인이라는 의미는 하나님의 말씀에 벗어나 있다, 합당하지 않다는 뜻이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말씀과는 다른 힘에 사로잡혀 있다는 의미이다. 이런 점에서 모든 인간은 구원의 가능성이 완전히 차단된 상태에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죄의 욕망을 가지고 영생을 탐한다.

그래서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셨을 때에 율법사는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눅 10:25)라고 물었고 부자 청년은 “내가 무슨 선한 일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마 19:16/막 10:17/눅 18:18)라고 물었다. 인간은 자기에게 선한 것이 나올 수 있다고 믿고 있고 그 행위로 영생이 가능하다고 자기 최면에 빠져 있다.


실로 모든 사람들의 관심사는 자기 구원에 있음을 예수님께서 명백하게 이렇게 폭로하셨다.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연구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언하는 것이니라”(요 5:39). 결국 인간은 죄의 탐욕으로 성경을 대하기 때문에 성경이 증거하는 예수 그리스도를 보지 못한다.

 성경이 영생에 대하여 말하지 않는다는 뜻이 아니라 오직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를 지신 것으로 죄 문제가 해결되어 영생이 주어질 수 있다는 의미이다. 그러므로 성경은 나의 구원에 대하여 증거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한다.


로마서 8장은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1절)라고 시작하여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39절)라는 말씀으로 마친다.

결코 정죄함이 없다는 것으로 시작하여 하나님의 사랑에 끊을 수 없다는 말씀으로 이어지는데 그 가운데 “피조물이 고대하는 바는 하나님의 아들이 나타나는 것”(19절)이라고 하면서 ‘몸의 구속’에 대해서 말씀한다. 그런데 이 몸의 구속을 성령께서 하시기 때문에 성도는 기다리는 것 외에는 달리 할 수 있는 것이 없다고 선언한다(23절).


예수 그리스도께서 왕권을 가지고 다시 오시는 그 사건을 믿음으로 기다리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믿음이란 소망이다. 그래서 이것을 24절에서 “소망으로 구원을 얻었으매”라고 표현한다.
그리고 26절에서 “이와 같이”라고 하였는데 ‘이와 같은 방식으로’, ‘이런 식으로’라는 뜻이다.


26절을 읽어보면,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는 마땅히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라고 말씀한다. 즉 소망이 우리의 몸의 구속을 기다리도록 하는 것과 같은 방식으로 성령께서 우리 몸의 구속을 이루기 위하여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것으로 말씀한다.


물론 여기서 “말할 수 없는 탄식”이란 진리를 알게 하시기 위한 탄식이고 신음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마땅히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하는 존재이기 때문에 성령께서 친히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간구하신다는 것이다. 이 간구는 곧 하나님 우편에 계신 예수 그리스도의 간구이다(34절).

 
그러므로 성령께서 도우신다는 것은 우리가 하는 일의 주위에 서성거리면서 부수적인 어려움을 제거하며, 협력자가 되어서 우리로 하여금 구원에 이르도록 하신다는 것이 아니다. 마땅히 빌 바도 알지 못하고 주님의 뜻과는 도리어 전혀 다른 방향으로 가고 있는 우리를 대신해서 성령께서 친히 간구하신다는 뜻이다.

그러니 우리가 구원의 주도권을 쥐고 있고 그것을 성령께서 돕는 조력자의 역할을 한다는 정도가 아니라 몸의 구속을 이루도록 주님의 백성들을 장악하고 강력하게 주도하시는 분은 성령님이시라는 의미이다.


본문을 이렇게 이해 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그 다음 27절에 “마음을 살피시는 이가 성령의 생각을 아시나니 이는 성령이 하나님의 뜻대로 성도를 위하여 간구하심이니라”라고 말씀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뜻을 잘 아는 자는 이 땅에 없다. 그러나 성령님은 하나님의 영이시기 때문에 하나님의 뜻을 가장 잘 아시기 때문에 대신해서 간구하신다.

그런데 성령께서 어떤 기준을 가지고 간구하시는가? 성령께서는 성도를 위하여 간구하시되 우리의 뜻대로 우리의 요구대로 간구하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대로 간구하신다고 말씀하였다. “마음을 살피시는 이”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그러면 마음을 살피시는 하나님께 성령께서 간구하시되 결과를 어떻게 이루시는가 하는 것에 바울 사도는 우리의 관심을 돌리고 있다. 그리고 오늘 우리가 살펴보고자 하는 28절을 말씀한다.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우리는 이 구절을 너무 쉽게 자기 중심적으로 인용한다. 우리 자신을 합리화하는 근거 구절로 삼는다. 우리가 무엇인가 잘못을 해도 주님께서 알아서 나에게 유익되도록 모든 것을 잘 마무리해 주신다는 의미로 이 구절을 이해한다.


그러나 이 말씀은 결코 그런 의미의 말씀이 아니다. 성경의 어떤 구절도 우리 개인의 신상과 삶을 합리화시켜주는 말씀은 없다. 오히려 예수 그리스도와 대조하여 우리의 죄성을 공격하고 있는 것이 성경 말씀이다. 그런 점에서 이 구절은 우리 자신을 합리화하거나 우리 삶의 세상적 유익을 위해 일하는 분으로 말해주고 있는 것이 아니다.

여기서 우리가 오해하고 있는 것은 “선”이라는 말이다.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고 했을 때에 그 선이란 무엇인가? 창세기 50장에 요셉이 형들에게 대하여 자신에게 이루어진 일련의 일에 대한 결과를 말하는 이런 대목이 있다.


19요셉이 그들에게 이르되 두려워하지 마소서 내가 하나님을 대신하리이까 20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 오늘과 같이 많은 백성의 생명을 구원하게 하시려 하셨나니(창 50:19-20)


창세기는 10개의 ‘톨레도트’(족보, 역사)로 하나님의 언약을 설명하는 책인데 창세기 37:2에 “야곱의 족보는 이러하니라”라고 하여 마지막 ‘톨레도트’를 나타내고 있다. 그렇다면 요셉에 관한 기록이 요셉의 개인에 대한 일이 아니라 야곱에게 주신 하나님의 언약이 성취되고 있다는 의미이다.

요셉은 형들이 자신을 애굽에 노예로 팔아버린 일이 과거 할아버지 아브라함에게 주신 언약 안에 있는 일이며(창 15:13-14), 그것은 곧 이스라엘을 애굽에 이주시키기 위하여 아버지 야곱에게 주신 하나님의 언약을 위한 일이라는 사실을 깨달았기에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요셉의 형제들은 요셉이 미워 애굽에 팔아버렸지만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자신의 언약을 이루는 일로 바꾸셨다는 뜻이다.


언약의 성취, 그것이 바로 선이다. 그렇다면 결국 언약의 실체는 새 언약을 온전히 성취하신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이런 점에서 오늘 본문에서도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의 완성을 의미하는 것이다.

선이란, 한마디로 말하자면 ‘십자가의 은혜로 이루신 구원’이고 그것은 곧 ‘몸의 구속’이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즉 하나님의 부르심을 입은 자는 성령께서 하나도 놓치지 않으시고 반드시 몸의 구속을 이루는 것이 성령께서 하시는 일이며 그것은 곧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일이다.


39나를 보내신 이의 뜻은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이것이니라 40내 아버지의 뜻은 아들을 보고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는 이것이니 마지막 날에 내가 이를 다시 살리리라 하시니라(요 6:39-40)


이런 점에서 보자면 본문에서 말씀하고 있는 “모든 것”이란 우리의 죄성까지도 포함하는 것이다. 우리 죄의 본성까지도 사용하셔서 하나님 자신의 계획대로 몸의 구속을 반드시 이루어내시는 것이 성령의 역할이다. 그것은 인간에 의한 어떤 난관, 어떤 방해공작이 있다고 할지라도 반드시 하나님의 부르심을 입은 자의 몸의 구속을 이루어내신다는 것이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29-30절에서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을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라고 기록하고 있다.

이것을 미래형으로 ‘영화롭게 할 것이라’고 하지 않고 과거완료형으로 기록하고 있는 이유가 무엇인가? 이는 우리가 하는 일이 아니라 성령께서 하시는 일이기 때문에 이미 다 이루어진 것이라는 뜻이다. 즉 묵시적 관점에서 이미 다 완성된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하게 강조되고 있는 것은 우리 개개인의 구원에 대한 말씀이 아니라 교회를 염두에 두고 하는 말씀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왜냐하면 바울 사도는 이제까지 성령께서 구원을 어떻게 이루시는가 하는 것에 초점을 맞추어 설명했다. 그래서 28절에서도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이라고 하였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내 의지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가 아니라 하나님을 사랑하게 된 자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자기 의지와 상관없이 부르심을 입은 자들이기 때문이다. 그러기 때문에 여기서 갑자기 개인의 구원에 대하여 설명한다고 볼 수는 없다. 그러므로 미리 정하시고, 부르시고, 의롭다 하시고, 영화롭게 하시는 이것이 어떤 한 사람의 구원을 염두에 두고 하는 말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이미 이루어진 교회를 두고 말씀하는 것이며 그것이 곧 예수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몸의 구속’이다. 에베소서 2:10에서 더 정확한 표현을 볼 수 있다.


우리는 그가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이 일은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사 우리로 그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심이니라(엡 2:10)


여기서 “우리”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들이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음을 받은 자가 구원받은 자요 그들이 바로 교회라는 뜻이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이어서 에베소서 3:9-11에서 이렇게 선언하였다.


9영원부터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 속에 감추어졌던 비밀의 경륜이 어떠한 것을 드러내게 하려 하심이라 10이는 이제 교회로 말미암아 하늘에 있는 통치자들과 권세들에게 하나님의 각종 지혜를 알게 하려 하심이니 11곧 영원부터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예정하신 뜻대로 하신 것이라(엡 3:9-11)


영원 전부터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예정하신 뜻이 교회를 통해서 하늘의 악한 세력들에게 하나님의 각종 지혜를 알게 하려는 것임을 말하고 있다. 이런 점에서 미리 정하시고 정하신 자들을 부르시고 부르신 자들을 의롭다고 하시며 또한 영화롭게 하신다는 선언은 결코 개인 구원의 차원에서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교회라는 차원에서 이야기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십자가라는 언약 성취로 말미암아 예수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이미 교회를 완성하셨다. 결국 몸의 구속이란 우리 개개인을 주님께서 다시 살리신다고 말씀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몸된 교회, 즉 예수 그리스도께 붙은 자들을 반드시 다시 살리신다는 의미이다(고전 15:20-23).


때문에 교회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들, 정확하게 표현하자면 하나님을 사랑하게 된 자들이며 그분의 뜻에 의해 부르심은 입은 자들이다. 이것을 누가복음 15장의 비유에서 나타내고 있는 바로 말하자면 잃은 양, 잃은 드라크마가 찾아짐을 당한 것이며 잃은 아들이 죽었다 살아남으로 얻어진 것이며 그들이 곧 하나님 아버지의 기쁨에 동참되어진 자들이다.

예수님이 나를 위해 죽으셨다는 것을 ‘내가’ 믿는다는 것이 구원이 아니고 영생이 아니다. 오히려 나의 믿음 없음을 확인하는 자리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믿음이 내 안에, 내가 그 믿음 안에 있음을 확인하는 자리가 된다.


성경이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시는 것은 그 증거 안에 우리의 구원이 포함되었다는 뜻이고, 그 구원은 예수 그리스도의 몸의 구원이다. 다시 말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몸으로 붙어 있는 지체를 교회라고 하고 그 교회를 구원하신다는 뜻이다. 다만 내가 그 주님의 몸에 포함된 것인가 하는 것은 날마다 말씀으로 확인할 뿐이다.

그러므로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라는 말씀은 “너가 아무리 해도 안돼! 너가 하는 열심있는 신앙생활도 안돼!”라는 의미이다. 구원, 영생, 천국은 우리가 이루어낼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는 말씀이며, 그것은 곧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 이루신다는 뜻이다(http://cafe.daum.net/joosung 강론/김영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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