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피조물
새로운 피조물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고후 5:17)
이 말씀은 교인이라면 누구나 다 외우고 있는 말씀 중의 하나다. 그런데 많이 암송하고 많이 사용되고 있는 것에 비하면 이 말씀을 많이 오해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이 말씀을 통해 많은 교인들은 예수님의 죽음을 단순히 나를 위해 죽으신 것으로만 생각한다는 것이다. 물론 예수님의 죽음을 나를 위한 죽음으로 받아들이고 신앙생활을 한다는 것은 중요한 문제일 수 있다. 그러나 예수님의 죽음을 나 한 개인을 위한 죽음으로만 받아들인다면 성경에서 말씀하는 십자가의 의미는 많이 감소될 수밖에 없다. 예수님의 죽음에 대한 의미를 우리 생각으로 함부로 축소시켜서는 안 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님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드러난 결과, 그 효과를 말씀을 통해 깊이 묵상해야 할 필요가 있다.
고린도후서 5장 17절에서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 또는 “새 것”이라고 한다. 그래서 “이전 것”과 “새 것”을 대조하고 있다. 그러면 이전 것은 무엇이고 새 것이란 무엇인가? 앞에서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이라고 말씀했다. 때문에 새 것이라는 의미는 그리스도 안에 있을 때를 말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그리스도 안에 있지 않으면 새 것이라고 말할 수 없는 것이다. 그것이 이전 것이다. 그러면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상태는 어떤 상태인가?
고린도후서 5장 14절에 보면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시는도다 우리가 생각건대 한 사람이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었은즉 모든 사람이 죽은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다. 즉 그리스도의 사랑을 입은 자는 그리스도께서 죽으신 죽음의 효과로 말미암아 자신이 죽은 것과 같은 것이라는 뜻이다. 그래서 그리스도를 알게 된 자(고후 5:16)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요 새로운 피조물이라는 것이다. 여기서 새로운 피조물이라는 말은 새로운 창조물을 말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리스도 안에 있기 전, 이전 것의 상태는 어떤 상태였는가?
하나님에 의해 만물이 지음을 받았을 때에 사람은 모든 것의 대표로 하나님을 대신하여 피조물을 다스리며 살았다. 그러나 사람이 하나님을 거부하고 사탄의 말을 추종하였을 때에 사람뿐만 아니라 모든 피조물이 죄에 빠지게 되었다. 이 사실을 창세기 3장 17절에서 “땅은 너(아담)로 인하여 저주를 받고”라고 했다. 아담 한 사람의 불순종으로 말미암아 모든 피조물이 죄의 권세 아래 놓이게 되었다. 그렇다면 사람을 비롯한 모든 피조물의 회복 또한 한 사람의 대표자에 의해서 회복되어져야 할 것이다(롬 5:15-19).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그것은 죄에 대한 대가를 치러야 한다는 것이다. 대가를 치른다는 것은 마귀에게 값을 치른다는 의미가 있다기보다 하나님의 공의라는 성품에 맞지 않는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여 선악과를 먹게 되면 정녕 죽으리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에 죄로 말미암아 생겨난 죽음의 대가를 치러야 하게 되었다. 이 길만이 죄를 속하고 만물을 회복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다.
이런 점에서 예수님께서 피흘리심으로 죽음에 대한 대가를 치르신 것이다. 십자가에서 피흘리신 것만이 대속을 이룰 수 있는 것이 된다. “육체의 생명은 피에 있음이라 내가 이 피를 너희에게 주어 단에 뿌려 너희의 생명을 위하여 속하게 하였나니 생명이 피에 있으므로 피가 죄를 속하느니라”(레 17:11). 따라서 그리스도의 피는 단순히 한 사람을 구원하는 정도가 아니라 만물의 회복이다. 새로운 세계를 가져오신 사건이 십자가이다.
예수님은 어린 양으로 십자가에서 희생당하셨다. 구약 시대의 모든 제사 제물의 피를 대신(성취)하는 죽음의 피를 흘리신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죽음으로 흘리신 피의 효과는 모든 피조물을 새롭게 하는 효과를 내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그리스도 안”이란 의미는 ‘어린 양되신 그리스도의 피가 뿌려진 자’를 말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전 것이란 죄의 권세 아래 놓여 있는 상태를 말하는 것이다. 반대로 새 것이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죄의 권세에서 빼내어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흘리신 피가 뿌려진 상태를 말하는 것이다. 이러한 자가 새로운 피조물이다. 이는 단순히 내가 구원받았다는 차원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피가 발린 모든 것은 새로운 피조물이 되는 것이다. 이는 분명 만물의 회귀나 환원이 아닌 회복이다.
출애굽기 12장에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 할 당시 하나님께서는 출애굽 하는 그 달이 첫 달이 되게 하라고 하셨다(출 12:2).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제 새로운 시작을 하게 된 것이다. 이제 그들은 애굽에 예속된 자로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더불어 하나님의 시간에 맞추어 사는 자들이 된 것이다.
그들이 광야에 이르렀을 때에 하나님은 그 의미를 더욱 분명히 보여 주셨다. 하나님의 지시대로 성막을 만들 때였다. 성막을 만드는 재료들은 전부 어디서 가져온 것인가? 애굽에서 가져온 것이었다. 애굽에서 가져온 재료로 어떻게 성막을 만들 수 있는가? 어떻게 하나님의 성품에 용납이 될 수 있었는가? 한 마디로 양의 피를 발랐기 때문이다. “율법을 좇아 거의 모든 물건이 피로써 정결케 되나니 피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느니라”(히 9:22).
양의 피를 바른 것만 하나님께 드려질 수 있는 것으로 되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애초에 하나님께서 지으신 것이다. 죄악된 것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처음 상태의 것으로 되돌려질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그리스도의 피를 바르는 것뿐이다. 하나님은 그리스도의 피가 발라진 것을 새 것으로 인정하고 받으시는 것이다.
따라서 그리스도의 피가 발린 자는 하나님과 화목된 새로운 세계에 사는 자이다(고후 5:18). 이제 “우리는 그의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엡 2:10)요,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엡 4:24)이다.
새 것이란 단순히 예수를 믿게 되었기에 더러운 상태에서 죄를 짓지 않는 새로운 사람으로 바뀌어졌다는 의미가 아니다. 예수님을 믿는다고 해서 더 이상 죄를 짓지 않는다는 말이 아니다. 죄가 어떤 것인지를 아는 자로 바뀐 것이다. 죄의 권세 아래 있는 이전 것은 지나간 것으로 아는 자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성도는 이제 더 이상 세상의 풍속을 좇지 않는다(엡 2:1-2). 세상이 그리스도의 피를 무효화시킬 수 없기 때문이다.
나는 참으로 그리스도의 피가 뿌려진 자인가? 그렇다면 세상에 조율된 자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 의해 조율된 자로 살아가야 할 것이다. 죄를 짓지 않기 위해서 애쓰는 것이 아니라 자연히 죄가 싫어지는 모습이 성도의 모습이다. 십자가의 길에 놓여진 운명이기 때문이다. 이런 자를 성경은 새로운 피조물이라고 선언하고 있다(20081125/김영대/예수사회 59호 http://blog.daum.net/reveal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