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구약강론/민수기

20.민수기 22:1-41 발락과 발람

불편한 진리 2015. 2. 10. 17:18

20

민수기 22:1-41 

발락과 발람

 

민수기 22장은 모압 왕인 발락이 이스라엘을 두려워한 가운데 발람이라는 선지자를 시켜서 이스라엘을 저주하고자 하는 내용이다.

21:21 이하에서 보면, 이스라엘이 아모리 왕 시혼에게 아모리 땅을 지나갈 것을 부탁하는 내용이 나온다. 아무리 땅에는 그 어떤 피해도 입히지 않겠다고 약속했는데도 불구하고 아모리 왕 시혼은 도리어 이스라엘을 공격한다. 그러자 이스라엘은 아모리를 쳐서 그 땅을 빼앗고 바산 땅까지 점령한다. 그것을 본 모압 왕 발락에게 두려움이 생길 것은 당연한 것이다. 그 두려움에 대한 발락의 행동은 점술가인 발람을 부르는 것이었다. 그리고 발람에게 이스라엘을 저주해 달라고 부탁한다.

 

6절에 보면, “우리보다 강하니 청컨대 와서 나를 위하여 이 백성을 저주하라 내가 혹 쳐서 이기어 이 땅에서 몰아내리라 그대가 복을 비는 자는 복을 받고 저주하는 자는 저주를 받을 줄을 내가 앎이니라고 한다. 발락은 이스라엘을 저주하면 자신들이 이길 수 있을 줄로 알았던 것이다. 우리의 신으로 이스라엘의 신을 저주하자는 것이다. 이 당시 사람들의 의식에 전쟁은 신들의 싸움으로 이해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것이 바로 두려움에 떠는 인간들의 심성에서 나온 종교이다. 이러한 종교를 가지고 기독교 신앙이라고 우기는 데서부터 교회는 타락의 길로 가게 되는 것이다.

우리가 신을 찾아나가는 형태의 신앙은 기독교 신앙이 아니라 종교적 형태의 한 모습일 뿐이다. 단언코 기독교 신앙이란 내가 하나님을 찾아간 경험이 있거나 내 쪽에서 신을 불러들이는 느낌을 가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편에서 찾아오셨다는 것을 믿는 신앙이다. 이스라엘이 아모리와 바산 이런 족속들을 물리치는 것은 종교 집단은 멸하고 오직 하나님에 의한 신앙으로 남겨진 자만 존재하게 된다는 것이다. 신앙이 들어올 때 인간의 종교는 쫓겨나게 되는 것이다.

 

12절을 보면, “하나님이 발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그들과 함께 가지도 말고 그 백성을 저주하지도 말라 그들은 복을 받은 자니라고 하신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복을 받은 자라고 말씀하신다. 그러기 때문에 저주를 한다고 할지라도 그 저주가 복을 이겨내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런데도 발람은 발락이 제의한 대로 가고 싶은 것이었다. 하나님은 이 무당 발람에게 하나님이 복을 준 자들을 저주하지 말며 그들을 대적하지 말라고 하셨다. 그래서 발람은 발락의 제의를 거절하였다.

이 소식을 들은 발락은 또 다시 더 존귀한 귀족들을 더 많이 보내어서 이스라엘을 저주하도록 청했다. 최고의 대우를 하며 원하는 대로 시행할 것을 약속도 했다(17). 발람에게 있어서 출세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왔다. 발람은 이 절호의 기회를 놓칠 수가 없는 것이었다. 욕심을 버릴 수가 없었던 발람은 하나님이 무슨 말씀을 더 하실 지 알아보겠다고 한다(19). 하나님이 말씀을 더 하실 것을 기대하고 있다. 하나님은 이미 말씀하셨다. “함께 가지도 말고 저주하지도 말라고 하셨다. 그런데 이 말씀하신 것 외에 또 다른 말씀을 더해 주기를 바라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그것은 바로 발람의 욕심 때문이다. 이 중요한 기회는 자기의 욕심을 채울 수 있는 기회가 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 말씀을 대면하는 인간의 죄악된 모습을 잘 볼 수 있는 것이다. 우리의 삶에서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잘 몰라서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는 경우가 많이 있다. 그러나 곰곰이 생각하면서 기도하면 하나님의 뜻을 모르는 경우가 별로 없다. 장래의 진로나 직장이나 결혼이나 사업이나 무엇이든지 간에 주님 앞에서 자신을 살펴보면서 기도하면 방향이 보이고 가닥이 잡히며 현재의 위치에서 내가 어떻게 처신해야 할 것인지를 깨닫게 되는 것이 사실이다.

그렇다고 하나님이 이렇게 하라 저렇게 하라고 하시는 것은 아니지만 하나님을 아는 것으로 인해서 하나님 닮은 자로서 자신이 나아갈 길을 깨닫게 되고 또한 우리 안에 계신 성령께서 우리를 하나님의 뜻대로 인도하시는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의 욕심으로 인해 이러한 하나님의 뜻에 이의를 달고 다른 핑계를 제시하는 것이다. 인간적인 욕심 때문에 단순한 진리에 다른 무엇을 더 원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하나님의 말씀에 더 할 것을 기대하는 것은 모두가 인간의 욕심으로부터 나오는 것임을 알아야 한다. 발람은 돈에 욕심이 났던 것이 분명하다. 32절에 여호와의 사자가 보라 네 길이 내 앞에 패역하므로 내가 너를 막으려고 나왔더니라고 했는데 이 패역을 유다서 11절에는 삯을 위하여 발람이 어그러진 길로 몰려갔으며라고 했다. 이것은 발람이 돈에 눈이 어두워져서 하나님이 이미 말씀하신 것을 고쳐서 다시 말씀해 주실 것을 기대했다는 뜻이다.

이런 맥락에서 보면 18절에서 발락이 그 집에 은, 금을 가득히 채워서 내게 줄지라도 내가 능히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을 어기어 덜하거나 더하지 못하겠노라.”고 한 것도 하나님을 두려워해서라기 보다는 은근히 하나님을 빙자해서 많은 은금을 요구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발람의 길이 패역했다고 말씀하시는 것이다(32). 여호와를 빙자하여 얼마나 많은 돈을 요구하고 있는가? 이래서 유다서는 하나님을 이용하여 자기의 재물을 축적하는 거짓 선지자의 전형으로 발람을 묘사하고 있는 것이다.

 

발람은 자기 욕심에 깊이 빠져 있기 때문에 그의 나귀가 여호와의 사자를 본 것을 전혀 알지 못하고 있는 것이었다. 하도 욕심에 눈이 어두워져서 깨닫지 못하니 나귀의 입을 열어 말을 하게 하시는 것이다 여호와께서 나귀 입을 여시니 발람에게 이르되 내가 네게 무엇을 하였기에 나를 이같이 세 번을 때리느뇨 발람이 나귀에게 말하되 네가 나를 거역하는 연고니 내 손에 칼이 있었더면 곧 너를 죽였으리라 나귀가 발람에게 이르되 나는 네가 오늘까지 네 일생에 타는 나귀가 아니냐 내가 언제든지 네게 이같이 하는 행습이 있더냐 가로되 없었느니라”(28-30).

 

나귀가 말을 한다는 인간이 얼마나 미련하고 자기 욕심에 빠져서 사리분별을 못하고 있는 존재인가를 고발하고 있는 것이다. 나귀가 무슨 말을 했다는 것 자체로 이미 발람은 알아차렸어야 되는 문제였다. 여호와께서 발람의 눈을 열 때에 비로소 천사가 손에 칼을 빼어 들고 길에 선 것을 보게 된다.

네가 어찌하여 네 나귀를 이같이 세 번 때렸느냐?”(32)는 천사의 책망은 너는 나귀 보다 못하냐? 나귀도 하나님이 막으시는 것을 알아보는데 너는 사람이 되어 나귀보다 깨닫는 것이 더디냐?”는 의미이다. 인간이 짐승보다 못하다는 것이다. 이것이 자기 욕심에 빠진 인간의 모습이다. 이런 인간이 하나님을 부를 수 있고, 십자가를 말할 수 있다는 사실은 눈을 열어주신 하나님의 은혜 때문임을 알아야 한다. 종교란 자기 스스로 눈을 열려고 하는 것이지만 기독교 신앙이란 열려진 눈으로 주님의 십자가를 바라보는 것이다(1999.1.10./김영대 http://blog.daum.net/reveal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