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구약강론/민수기

19.민수기 21:1-35 불뱀

불편한 진리 2015. 2. 10. 17:06

19

민수기 21:1-35

불뱀

 

이스라엘이 에돔 땅을 통과하기를 원했으나 에돔 왕에 의해 거절당하자 에돔 땅을 피해서 진행하여 호르산에 이르렀다(20:22). 여기서 아론이 죽자 이스라엘 백성들은 30일 동안 애곡했다(20:29). 이 상황을 틈타 가나안의 남방에 있는 아랏 왕이 군사를 이끌고 나와 이스라엘을 공격하였는데 몇 사람이 포로로 잡히게 되었다(1). 그래서 이스라엘이 하나님께 서원을 하자 하나님께서 아랏 성읍을 이스라엘에 붙이시매 이스라엘이 아랏을 멸하였다(3).

아마 가나안의 남방 아랏을 물리쳤다면 이제 가나안 땅으로 진입이 된 것이나 다름이 없는 상황이다. 그러나 이스라엘이 바로 진입하지 아니하고 다시 홍해로 내려가는 길로 가고 있었다(4). 아마도 하나님께서 원하시지 않는 길이었기에 하나님의 구름 기둥이 계속해서 가나안 땅으로 인도하지 않았던 것같다. 이스라엘은 이 때문에 몹시 마음이 상하여(4) 하나님과 모세를 원망하게 된다. “백성이 하나님과 모세를 향하여 원망하되 어찌하여 우리를 애굽에서 인도하여 올려서 이 광야에서 죽게 하는고 이 곳에는 식물도 없고 물도 없도다 우리 마음이 이 박한 식물을 싫어하노라 하매”(5).

 

하나님은 왜 이스라엘을 가나안 땅으로 바로 진입하지 못하도록 하셨을까? 에돔에게는 세일을 기업으로 주셨기 때문에 침범하지 못하도록 하실 뿐만 아니라(2:4,5) 아직은 모세가 살아 있기 때문이다. 무슨 말인고 하면, 모세는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하도록 말씀하셨고 또한 이스라엘에게 자신의 언약에 대하여 계시할 것이 있기 때문에 가나안 땅으로 바로 진입하지 못하도록 막으신 것이다. 그래서 아론을 데려가시고 거기서 지체하게 하시며 아랏의 공격을 당하게 하시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가 한 가지 생각해야 할 것은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사정을 보고 일하시는 분이 아니라는 것이다. 하나님은 자기 언약을 따라 일하는 분이시다. 때문에 우리의 삶의 과정에서도 하나님께서 막으신다는 느낌이 들고 뭔가 안되게 하시는 일이 있다면 그것 때문에 원망하거나 불평할 필요가 없다. 불평할 것이 아니라 포기하고 후퇴하면 되는 것이다. 내 생각대로 하려고 하니까 불평과 원망이 나오는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미리 알아서 나아가고 싶은 욕심에 쉽게 사로잡히게 된다.

우리가 성경을 읽는 이유도 어쩌면 이런 이유 중의 하나이다. 그렇다면 그것은 점치는 것과 다를 바가 없지 않는가? 지금도 한국 교회의 대부분은 1231일과 새해 11일을 기해 송구영신예배라는 굿판을 벌여놓고 헌금이라는 복채를 들고 오는 자에게 에 대한 성경 구절을 뽑아 주면서 목사의 안수가 무슨 효험이나 있는 것처럼 남발하고 있는 작태는 무당 푸닥거리나 같은 미신적인 것이다.

 

원망하는 이스라엘에게 하나님은 불뱀을 보내셨다. 이러한 상황은 단순히 이스라엘의 문제가 아니라 모든 인간에 대한 문제로 볼 수 있어야 한다. 우리는 고통의 의미를 생각하기보다는 고통 그 자체를 애당초 싫어한다. 왜냐하면 고통은 내 생명을 위협하기 때문이다. 분명 하나님은 자기 언약을 위해 일하신다. 자기 언약을 위해서라는 말은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서라는 말이다. 그 안에서 우리가 사는 것이 구원이다.

따라서 기독교에서 산다는 의미는 우리 목숨에 대한 문제가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의 쉼, 즉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을 말한다. 주님 안에서의 안식이다. 이것이 성경이 말하는 참된 생명이다. 이 생명이 우리에게 주어지기 위해서는 필연코 해결되어야 하는 문제가 바로 죄 문제이다. 죄 때문에 자신에 대해서 한탄하고 절망해야 하나님을 바라볼 수 있고 그것이 곧 사는 길이 되는 것이다. 때문에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이 원망할 때 불뱀을 보내신 것은 죽음 속에서만 참된 생명이 주어진다는 것을 보여주시기 위함이다. 옛 사람을 죽이고 새 사람으로 살게 하시는 것이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살리는 방법은 어떤 것인가?

 

8,9절을 보면,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불뱀을 만들어 장대 위에 달라 물린 자마다 그것을 보면 살리라 모세가 놋뱀을 만들어 장대 위에 다니 뱀에게 물린 자마다 놋뱀을 쳐다본즉 살더라고 말씀하고 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살리는 방법은 놋뱀을 쳐다보는 것이다.

이스라엘을 살릴 수 있는 방법은 불뱀을 물러가게 하는 것이 우리의 생각이다. 이스라엘도 이렇게 생각하였다. “백성이 모세에게 이르러 가로되 우리가 여호와와 당신을 향하여 원망하므로 범죄하였사오니 여호와께 기도하여 이 뱀들을 우리에게서 떠나게 하소서 모세가 백성을 위하여 기도하매”(7)라고 하였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불뱀을 자기의 원망에 대한 하나님의 징계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자신들의 죄를 뉘우치면 하나님께서 불뱀을 없애줄 것으로 생각했던 것이다.

우리의 기도도 이스라엘과 같은 이런 범주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어려움이 주어지면 그때부터 온갖 감언이설(?)로 하나님을 꼬시기 시작한다. ‘이 어려움이 내게 큰 피해를 주지 않고 지나가도록만 한다면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 뭐든지 할께요. 혹시 필요하신 것이 있으면 언제든지 말씀하세요. 주일성수, 십일조는 기본으로 하겠습니다. 혹시 자녀를 주의 종(목사)으로 바쳐야 하는 것이라면 그대로 하지요.’라고 흥정하고서는 지나고 나면 모든 것을 까맣게 잊어버리고 사는 것이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 수준이다. 결국 자기 자신이 살기 위한 기도밖에 되지 않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방법은 인간들이 생각하는 것과는 전혀 다른 것이었다. 하나님은 불뱀을 그대로 두고 이스라엘을 살리는 방법을 주셨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불뱀을 만들어 장대 위에 달라 물린 자마다 그것을 보면 살리라”(8). 이것이 하나님의 처방이었다. 불뱀이 여전히 이스라엘 중에 있는 상황에서 이스라엘이 놋뱀을 쳐다보는 것이 사는 것이다. 놋뱀을 쳐다본다는 것은 회개하는 것을 말한다. 7절에 의하면 백성들이 모세에게 범죄했다고 말했다. 그렇다면 진정으로 하나님의 말씀대로 행하는 자세인가 아니가 하는 것이 어떻게 드러나는가? 하나님은 그것을 드러내시기 위해 놋뱀이라는 것을 만들어 쳐다보게 하시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살리는 방법이 비록 놋뱀을 쳐다보는 하찮은 것일지라도 그 말씀을 따라 순종하는가 하는 문제이다.

요한복음 3:14,15에서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도 바로 이런 의미에서 말씀하신 것이다.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즉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높이 들릴 때 그것만이 하나님의 구속의 방법이 된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주님을 믿는 자에게 영생이 주어진다는 것이다. 순종하고 회개하면 구원받는다는 말이 아니라 주의 영을 받은 자는 날마다 십자가의 주님을 바라보는 회개가 나오며 주님을 믿게 되는 것이다. 초라하고 구원의 능력이 될 것 같지도 않은 십자가를 바라본다는 것은 인간의 생각에 불합리한 것이다. 때문에 성령께서 우리를 장악할 때에 십자가가 믿어지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회개란 하나님과 흥정하고 협상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바라보던 시선이 십자가의 주님으로 향하는 것이다.

 

그런데 놋뱀을 누가 바라보는가? 뱀에게 물린 자이다. 뱀에게 물리지 않으면 놋뱀을 바라볼 이유가 없다. 자신은 죽어가는 것이 아니라 살아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결국 하나님은 죽여놓고 살리는 방법을 취하시는 것이다. 원망이 나오도록 하시고, 그 죄 속에서 죽게 하시고, 자신의 죽음을 알게 하셔서 생명 되시는 분을 바라보게 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구원의 일이다. 이러한 하나님의 언약을 제대로 알지 못하고 우리가 살아서 예수를 믿으려고 할 때에 인간의 죄성으로 말미암아 우리에게서 나오는 것이라고는 우상을 숭배하는 것일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열왕기하 18:4에서 잘 보여주고 있다. “여러 산당을 제하며 주상을 깨뜨리며 아세라 목상을 찍으며 모세가 만들었던 놋뱀을 이스라엘 자손이 이 때까지 향하여 분향하므로 그것을 부수고 느후스단이라 일컬었더라.” 놋뱀이라는 형상이 있어서 그것이 달리 우상이 된다는 것이 아니라 죄로 말미암아 욕심에 미혹되어 사는 것 자체가 우상숭배임을 알아야 한다.

그래서 사실 많은 사람들이 그리스도를 믿으면 산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막연히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 우상숭배임을 모르고 있는 것이다. 자신은 살아 있고 예수를 믿고 있다고 생각한다. 죽어있다는 것을 모르기 때문에 한국 교회 안에서 우상을 섬기고 있는 것이다. 그러기 때문에 신자란 죽은 상태에서 새 생명을 받았고 주님의 은혜 때문에 살고 있음을 아는 자이다.

 

21:10 이하에서는 이스라엘이 넓은 지역에 싸움을 계속하면서 가나안으로 행군하고 있지만 그것에 대해서 아주 간단하게 기록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10-13절까지는 오봇에서 이예아바림, 세렛을 거치고 아르논까지 온다는 것을 이야기하고 있다. 우리는 여기에 등장하는 지명들을 오늘날 지도에서 모조리 다 찾아낼 수는 없다. 그렇다고 해서 자유주의자들이 말하는 것처럼 이 기록이 엉터리라고 말해서는 안된다. 고고학적으로 지명을 찾아 증명할 수 있느냐 없느냐 하는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의 일하심을 보여주기 위한 증거로 기록하고 있다는 사실에 우리는 초점을 맞추어야 하는 것이다. 즉 여정을 아주 간단하게 언급하고 있지만 그 지명을 구체적으로 기록함으로 아주 일사천리로 그 과정들을 거쳐간 것으로 말씀하여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과 함께 함으로 하나님의 인도에 의해 잘 진행되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14,15절에서 이러므로 여호와의 전쟁기에 일렀으되 수바의 와헙과 아르논 골짜기와 모든 골짜기의 비탈은 아르논 고을을 향하여 기울어지고 모압의 경계에 닿았도다 하였더라고 여호와의 전쟁기에 기록된 내용을 잠시 소개하고 있다. 이 말씀을 자세히 보면, 모압 경계까지 오는데는 여호와 하나님의 인도로 오게 되어졌는데 여기까지 올 때에 마치 산과 골짜기들조차도 이스라엘을 아르논까지 안내하듯이 그렇게 왔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그래서 이 노래는 정말 쉽게 하나님의 인도로 아무 어려움 없이 왔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그 다음에 나오는 것이 우물의 노래이다. “그 때에 이스라엘이 노래하여 가로되 우물 물아 솟아나라 너희는 그것을 노래하라 이 우물은 족장들이 팠고 백성의 귀인들이 홀과 지팡이로 판 것이로다 하였더라”(17,18). 광야의 노정에서 하나님께서 물을 주신 것으로 인해 찬양하고 있다. 이렇게 하여 맛다나에서 나할리엘, 바못을 거쳐 비로소 광야가 내려다 보이는 사해북방 오른쪽 비스가 산에 이르게 되었다. 여기까지 오면서 이스라엘은 피 한방울도 흘리지 않고 왔다는 것이다. 이렇게 에돔과 모압의 경계를 따라 둘러오는 이것이 하나님의 인도 방법이었다.

27-29절의 노래는 아모리 왕 시혼이 모압을 정복해서 땅을 빼앗는 광경을 어떤 시인이 노래한 것을 기록해 놓았다. 아모리인은 아주 강한 족속이었는데 이것을 성경에 기록함으로 하나님이 이스라엘로 하여금 이렇게 승리하게 함으로 승리의 노래를 불렀던 아모리와 시혼도 이스라엘에 의해 정복 당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이야기를 하기 위해서 이방 왕의 승리의 노래를 기록해 놓은 것이다.

 

그리고 33절부터는 바산 왕 옥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다. 신명기 3:4을 보면, 옥의 나라에 친 성읍은 60성읍이라고 한다. 특히 바산 왕 옥은 거인 족속으로써 마지막에 남아 있는 그런 사람이었다는 점으로 보아서 굉장한 전쟁이었음을 알 수 있다(3:11). 그럼에도 불구하고 민수기 본문에서는 이에 그와 그 아들들과 그 백성을 다 쳐서 한 사람도 남기지 아니하고 그 땅을 점령하였더라”(35)고 말씀하고 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니 그렇게 장대한 자들이었고 많은 성읍이며 강한 족속이라 할지라도 그들을 물리치는 것은 너무나 간단하고 쉬운 것이었다는 의미이다. 가지 않으려고 원망하고 불평하며 따라갔지만 사실 가보니 하나님이 다 하시고 따라가는 이스라엘에게는 너무 쉬운 것이었다는 것을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십자가란 주님께서 홀로 친히 싸우신 현장이다. 우리가 싸워야 하는 자리가 아니라 주님과 함께 주죽는 것으로 승리를 얻는 자리이다. 따라서 십자가의 길이란 주님께서 주신 승리의 길이다. 그러나 좁은 길임에 틀림이 없고 찾는 자들이 많지 않은 것이 사실이다(7:14). 그렇지만 분명한 것은 그 길을 가는 자들에게 있어서는 힘들고 어렵게 느껴지는 것이 아니라 쉽고 힘들지 않는 길이다. 주님이 이 길을 가셨고 주님과 함께 가는 길이라면 세상의 넓고 편한 길과 비교할 수 없는 영광된 길이다(8:18).

지금 광야를 떠돌고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은 세상적으로 보면, 참으로 비참한 인생이라고 할 수 있다. 이스라엘은 그야말로 떠도는 나그네 인생이다. 농사를 지을 수도 없다. 그렇다고 하늘에서 많은 양식이 내려오는 것도 아니다. 겨우 하루 분의 양식만 주어졌다. 한마디로 이스라엘은 그날그날 하늘의 것을 얻어서 먹고사는 거지이다. 내일의 것이 없고 오늘 주어진 것으로 만족하고 감사하며 살아가야 할 사람들이다. 예수님은 마태복음 6:31,32에서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고 하셨다.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는 것은 오늘의 것으로 감사하고 사는 것이 아니라 내일의 것을 스스로 정해놓고 그것을 확보하기 위해서 살아가는 모습을 말한다. 즉 이방인들은 내일의 것을 확보하기 위해서 오늘을 살아가는데, 언제나 내일의 것은 오늘 것보다 더 좋은 것이기를 기대하는 습성을 말해주는 것이다. 성도란 이런 습성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는 말씀이다. 내일은 우리의 소관이 아니고 하나님의 소관이기 때문이다.

 

내일, 미래에 대한 꿈이 없는 자 있는가? 아무도 없다. 미래에 대한 꿈이 오늘을 지탱시켜주는 역할을 하고 있는 우리네 인생이다. 내일에는 더 나은 삶을 살 수 있을 것이라는 막연한 희망 때문에 오늘의 어려움을 이기고 사는 것이다. 그래서 미래에 대한 환상은 오늘에 대한 감사를 잃어버리게 한다. 오늘에 대한 감사를 잃어버린다면 결국 그 사람은 기쁨과 행복이 없는 오늘을 살게 될 것이고, 그 삶은 죽을 때까지 계속될 것이다. 하나님께 감사하지 않는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알지 못하는 자들의 특성이기 때문이다(1:21). 그러나 성도란 환상에 지나지 않는 미래에 매여 살지 않는 자이다. 성도에게 천국이란 미래에 대한 기대로 희망적인 것이 아니라 오늘 믿음으로 받아 천국으로 사는 삶 자체이다(1999.1.3./김영대 http://blog.daum.net/reveal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