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구약강론/민수기

10.민수기 11:1-35 여호와께서 내리신 불

불편한 진리 2015. 2. 5. 19: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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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수기 11:1-35

여호와께서 내리신 불

 

10장까지에서는 시내산에서 이스라엘이 혈통적인 이스라엘에서 가나안을 정복하기 위한 여호와의 군대로서 전환되어 전열을 가다듬는 작업이 있었다. 여호와의 군대는 하나님께서 항상 함께 하심을 믿고 그분의 말씀에 따라 움직여져야 하는 존재이다. 이스라엘이 관심 가져야 하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 성취되는 것이어야 한다. 다시 말해서 이스라엘의 존재 의의는 하나님의 언약이 성취되는 일에 있다.

그러한 군대로서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갈 수밖에 없다. 그런데 문제는 하나님께서 인도하신 곳으로 따라 갔음에도 불구하고 계속된 3일 길은 광야의 연속이었다. 비록 광야로 행진한다고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인도하시는 대로 따라가야 하는 것이 이스라엘이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이내 원망과 불평을 늘어놓는다. 1절 이하에서 이렇게 말씀하고 있다. “백성이 여호와의 들으시기에 악한 말로 원망하매 여호와께서 들으시고 진노하사 여호와의 불로 그들 중에 붙어서 진 끝을 사르게 하시매 백성이 모세에게 부르짖으므로 모세가 여호와께 기도하니 불이 꺼졌더라 그 곳 이름을 다베라라 칭하였으니 이는 여호와의 불이 그들 중에 붙은 연고였더라”(1-3).

여기서 하나님을 향한 이스라엘의 믿음이 어떻게 나타나는지를 보여주고 있다. 사실 민수기는 여기서부터 계속해서 원망과 불평의 연속으로 되어 있다. 어떻게 실패하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내용이라고 할 수 있다.

하나님께서 불을 내려 진 외곽을 살아 버리셨다. 일종의 경고를 하신 것이었다. 모세의 기도에 의해 불은 꺼지자 원망은 잠시 누그러졌다가 다시 폭발하고 있다. 실로 그들이 원망과 불평을 거두어들인 것은 잠깐이었다. 또 다시 원망과 불평이 터져 나오고 있다.

이스라엘 중에 섞여 사는 무리의 탐욕이 발동한 것이다(4). 여기서 섞여 사는 무리란 출애굽기 12:38에서 표현하고 있는 중다한 잡족으로 이방인들이다. 그런데 문제는 이스라엘 자손들이 여기에 동조하고 있고 동일한 원망과 불평으로 일관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스라엘 자손도 다시 울며 가로되 누가 우리에게 고기를 주어 먹게 할꼬”(4)라고 불평이 노골화되고 있다.

이방인들과는 다른 언약의 백성으로서 사는 모습이 다르게 나타난 것이 아니라 이방인과 같은 모습으로 하나님을 원망하는 있는 것이다. 탐욕이란 이스라엘 백성에게서는 없는 것이 아니었다. 자극을 받으니 다시 본성을 드러내게 되는 것이다. 누구나 잠깐동안 절제하고 잠깐동안 사랑을 베풀며 무엇인가를 한다는 것은 쉽다. 일시적으로 예수님의 삶을 흉내를 낼 수는 있을 것이다.

그러나 오랫동안 지속적으로 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잠깐동안 예수 믿는 흉내를 낸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지만 일생을 주님께 드린바 되어 주를 따른다는 것은 인간적으로 불가능한 일이다. 그러기에 주님께서 우리를 불러 주시지 않으면 안되는 것이다. 때문에 하나님이 하고자 하시는 일에 불만이 생기는 것이 탐욕이고 그 탐욕이 죄라고 하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러므로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 곧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이니 탐심은 우상 숭배니라”(3:5).

이스라엘은 하나님께서 매일 내려주시는 만나에 대하여 싫증을 느낀 것이다. 건강을 유지하기 위해 고기도 먹어야 된다고 불평하고 있다. 늘 새로운 것을 찾는 인간의 탐욕이 그대로 드러나고 있다. 이스라엘의 탐욕이 애굽에서 겪었던 시절을 생각나게 하듯이 언제나 인간의 탐욕은 과거에 좋았던 시절을 동경하게 되어 있다. “우리가 애굽에 있을 때에는 값없이 생선과 외와 수박과 부추와 파와 마늘들을 먹은 것이 생각나거늘 이제는 우리 정력이 쇠약하되 이 만나 외에는 보이는 것이 아무 것도 없도다 하니”(5,6).

애굽적 심성이 늘 이스라엘을 괴롭히고 유혹한다. 그들의 애굽적 심성은 세상의 힘으로 자신들을 유지시키고자 하는 정신이다. 즉 세상적 힘으로서의 건강 유지는 음식에 달려있다고 보는 것이다. 이스라엘의 관심은 하나님의 약속에 있는 것이 아니었다. 이미 1절에서 악한 말로 원망했다는 말에서 드러나고 있다. 무엇이 악한가? 단순히 하나님을 대항했다는 것이 악하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이루고자 하시는 언약과는 반대로 나아가는 사안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언약과 대치되는 것을 말한다.

그것이 그들의 원망과 불평으로 증명되고 있는 셈이다. 이스라엘은 약속에 대한 관심이 없기 때문에 약속의 땅에 대한 관심도 없는 것이 사실이다. 그들의 관심은 전에 행했던 것에 관심을 끊지 못하고 있었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관심은 애굽과 같은 세상이지 약속의 나라가 아니다. 그러기 때문에 늘 세상에 집착하고 있는 것이다. 세상에 집착하면서 세상것이 부족하면 불평과 원망이 튀어나오는 것이 세상에 집착하고 있다는 증거이다.

11절에 보면, 마침내 모세에게서도 불평이 나오고 있다. “여호와께 여짜오되 주께서 어찌하여 종을 괴롭게 하시나이까 어찌하여 나로 주의 목전에 은혜를 입게 아니하시고 이 모든 백성을 내게 맡기사 나로 그 짐을 지게 하시나이까?” 급기야는 하나님 앞에 이렇게 말한다. “주께서 내게 이같이 행하실진대 구하옵나니 내게 은혜를 베푸사 즉시 나를 죽여 나로 나의 곤고함을 보지 않게 하옵소서”(15).

모세는 자신이 맡은 짐이 너무 무겁다고 생각했다. 즉 지금 이 순간에 모세는 하나님의 은혜를 이스라엘에게 평안과 건강을 유지하게 되는 것뿐만 아니라 자기의 무거운 짐을 나누어지게 해 달라는 것으로 구하고 있다. 이스라엘의 원망 속에 모세의 원망도 들어 있었다. 이를 통해 모세는 모세대로 하나님 편이 이스라엘 중에 없음을 깨달아야 했다. 과연 하나님 편에 서 있는 자가 누구인가를 하나님께서는 이 사건을 통해 보여주시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모세도 하나님 편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결국 모세도 온전한 중보자가 아니라는 말이다. 즉 모세도 이스라엘을 대속하는 메시야가 아니었다는 것이다.

오늘날 목사들의 목회는 교인들을 자기 편으로 만드는 일에 불과하다. 목사들이 가지는 착각이 교인들은 믿음이 없고 자기만 하나님 편이라는 것이다. 그것이 아니라 얼마나 안믿는 존재였으면 목사라도 시켜서 하나님에 대해서 먼저 그리고 많이 배우게 하셨는가 하는 것을 생각할 줄 아는 자가 목사다. 나도 예수님의 피가 아니라면 하나님의 편이 아니었다는 사실을 절감하면서

하나님은 장로 70인을 모아 하나님의 신이 임하게 하신다. 여호와의 신이란 신약에서 성령을 말한다. 여기 70인은 이스라엘에서 대표로 뽑혀 나온 원로들이다. 그렇다면 70인은 이스라엘을 대표하는 것이다. 이들에게 하나님께서 성령이 임하게 하신 것은 이스라엘 전체를 하나님의 선지자로 삼으시겠다는 뜻이다.

모세가 그에게 이르되 네가 나를 위하여 시기하느냐 여호와께서 그 신을 그 모든 백성에게 주사 다 선지자 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29). 이스라엘은 고기를 먹고 싶어서 모세와 하나님을 향해 원망하고 불평했지만 하나님은 그들을 이스라엘로 세우신 것은 모두에게 하나님의 신을 주셔서 하나님 선지자로 삼기를 원하시는 것이다.

선지자란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하는 자이다. 성령이 임하는 자는 하나님의 선지자의 모습으로서 하나님의 계시의 말씀만 하는 것이다. 그러기 때문에 25절에 보면, 하나님의 신이 임한 때만 예언을 했다고 되어 있다. 따라서 하나님의 말씀에 붙잡혀서 하나님의 뜻대로 말하며 하나님의 말씀대로 사는 자가 선지자이다.

결국 하나님이 원하시는 이스라엘이란 하나님을 향해 원망하고 불평하는 존재가 아니라 하나님의 언약을 드러내고 유월절 어린양의 피의 정신으로 사는 자여야 함을 이를 통해 드러내신 것이다. 때문에 자기의 탐욕으로 하나님을 대항하는 자들에 대하여 진노를 내리심으로 이스라엘에서 잘라내셨다(33). 먹는 문제로 하나님께 불평을 늘어놓는 자들은 하나님의 언약에 합당하지 않기 때문이다.(1998.10.18./김영대 http://blog.daum.net/reveal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