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구약강론/민수기

06.민수기 7:1-89 성막 봉헌 예물

불편한 진리 2015. 2. 3. 20: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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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수기 7:1-89

성막 봉헌 예물

 

출애굽기 40:17에 보면, “제 이년 정월 곧 그 달 초일일에 성막을 세우니라고 되어 있다. 그리고 레위기 8장에는 제사장들이 취임하는 기록이 나오며 모세가 기름을 가지고 성막의 각종 기구들에 발라 거룩하게 했다는 기록이 있다. 이 날에 족장들이 하나님께 봉헌 예물을 드렸다고 볼 수 있는데 이 일에 대한 기록을 본 장에서 하고 있는 것이다.

본문을 레위기나 출애굽기에 연결해서 기록하지 않고 이렇게 따로 떼어서 민수기 7장에서 말씀하는 의미가 무엇일까? 그것은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해 말씀하실 의도가 민수기와 연결되는 의미에서 주어지기 때문이다. 즉 이스라엘을 군대로 계수하고 거룩을 유지하는 차원에서 단순히 모세나 아니면 제사장의 헌신으로가 아니라 나실인으로서의 이스라엘로서 백성 전체의 헌신이 요구되는 것이다.

헌신이란 단순히 윤리적, 도덕적으로 잘 살겠다는 결심 정도가 아니라 모세 언약 안에서 그 언약의 정신으로 가나안 땅을 정복하겠다는 뜻에서 예물을 봉헌하는 의식으로 치루어지고 있다. 이렇게 하여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을 정복하는 이 일이 단순히 세상을 힘으로 정복해서 힘의 우위를 가지고 군림하는 일이 아니라 언약 정신을 드러내는 일인 것을 보여주고 있다. 이것이 이스라엘의 모습이다.

모세가 장막 세우기를 필하고 그것에 기름을 발라 거룩히 구별하고 또 그 모든 기구와 단과 그 모든 기구에 기름을 발라 거룩히 구별한 날에”(1) 이스라엘 족장들이 예물을 드리게 된다. 그 예물은 덮개 있는 수레 여섯과 소 열 둘이다. 그리고 열 이틀 동안 각 지파의 대표들이 봉헌 예물을 드린다. 수레와 소는 레위인에게 주어져서 레위인이 회막 봉사에 쓰여지도록 말씀하셨다. 족장들이 드린 수레와 소는 레위인이 장막의 기구들을 나를 때 사용된다.

여기서 우리가 주의 깊게 보아야 할 말은 3절까지에서는 성막을 장막으로 표현하고 있고, 5절에서 수레와 소가 드려진 상황으로 말할 때에는 회막이라고 표현하고 있다는 것이다. 장막이란, 하나님이 텐트를 치고 이스라엘 백성들과 함께 산다는 뜻에서 표현하고 있고, 회막이란,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 위해서 모이고 하나님의 희생에 참여한다는 뜻으로 회막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이를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레위인들이 회막을 메고 옮기는 것은 그들만의 일이 아니라 모든 이스라엘의 일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레위인이 회막 봉사를 맡았으니까 그들에게 다 맡겨버리는 것으로 신경 끊고 살라는 것이 아니다. 수레와 소를 드림으로 우리 역시 회막을 메고 가는 일에 동참되었다는 뜻이다.

레위인의 일은 레위인만이 할 수 있다. 하나님께서 그들만을 선택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이스라엘은 구경만 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그들 역시 회막의 일에 참여하는데, 그것은 레위인과 같이 그들도 동일하게 장막을 메어야 할 사람이라는 것을 아는 자들이 이스라엘이다.

오늘날 교인들은 교회의 일거리를 이런 식으로 생각하고 있다. 이를테면, 교회에서 선교헌금을 드리는 것으로 해외에서 선교사가 하는 일에 동참한다는 식이다. 자기 생색내면서 선교헌금 몇 푼 내고는 거룩한 하나님의 일에 동참하고 있다고 착각하고 있다. 실로 선교헌금이란 자신의 욕심을 가리는 또 하나의 무화과 잎에 불과한 것이다.

여기서 레위인이 하는 회막의 일에 동참된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믿는 것임을 보여준다. 십자가를 제단으로 삼으시고 스스로 제물이 되셔서 피흘리신 예수님은 각 지파대로 예물을 드린 참 신앙의 모습이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자신을 제물로 드린 제사만 온전한 제사로써 하나님의 공의가 만족된 희생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은 그 의에 동참되었다는 뜻이다. 이 사실을 로마서에서는 이렇게 말씀하고 있다.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3:22).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은 믿는 자 속에 하나님의 의가 들어와 있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의 안에 있고, 하나님의 안식 안에 있는데 교회가 어떤 일거리를 만들고 그것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다는 발상은 주님의 십자가를 무시하는 처사이다.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 나라의 일을 떠 맡아서 일거리에 관심을 쏟는 자가 아니라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신 그 정신에 동참하는 자로 살아야 한다. 그것을 믿음이라고 한다.

그러기 때문에 여기서 드려지는 각 지파별로 드려지는 예물은 모든 지파가 동일하게 드려진다는 것이다. “그 예물도 성도의 세겔대로 일백 삼십 세겔 중 은반 하나와 칠십 세겔 중 은바리 하나라 이 두 그릇에는 소제물로 기름 섞은 고운 가루를 채웠고 또 십 세겔 중 금 숟가락 하나라 이것에는 향을 채웠고 또 번제물로 수송아지 하나와 수양 하나와 일년 된 어린 수양 하나이며 속죄제물로 수염소 하나이며 화목제물로 소 둘과 수양 다섯과 수염소 다섯과 일년 된 어린 수양 다섯이라”(13-17)12지파대로 똑같은 내용을 반복해서 기록해 놓고도 84-88절에 가서 또 12지파의 예물을 모은 것이 각 지파별로 동일하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어떤 지파에서도 따로 더 추가된 것도 없고, 또한 누락된 것도 없이 동일한 것으로 드려졌다는 뜻에서 강조되고 있는 말씀이다.

이는 하나님의 언약에 대한 충성과 헌신의 표로서는 어떤 지파도 차별이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쓸데없는 경쟁심과 시기심이 예물을 드리는 일에 있어서 개입될 수 없도록 차단하시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교회들은 상급의 차등이라는 성경에 없는 개념을 도입하여 교회 내에서 경쟁심을 유발시키고 있다. 더 잘 드리는 예배, 더 많이 하고 더 잘 하는 봉사가 있고, 더 많이 드린 기도나 헌금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처럼 꾸며놓고 종교 사업을 벌이고 있는 것이 오늘날 교회의 모습이다.

목사의 신앙과 성도의 신앙이 다른 것이 아니다. 오래 믿은 자의 신앙과 새 신자의 신앙이 다른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신앙의 연륜으로 서열을 정하는 나라가 아니다. 그러기 때문에 주님의 교회는 결코 경쟁심이 유발되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동일하게 그리스도의 피로 말미암아 동일한 의를 은혜로 받아 누리게 되었으므로 주님께만 영광을 돌리는 자들이 교회이기 때문이다(http://blog.daum.net/revealer 김영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