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5.민수기 6:1-27 나실인
5강
민수기 6:1-27
나실인
나실인의 서원에 대하여 말씀하고 있는 장이다. 그런데 왜 여기서 하나님은 나실인에 대한 규례를 말씀하실까? “나실”이라는 말은 ‘구별된 자’라는 의미의 말이다. “자기 몸을 구별하여”라는 말이 12번이나 나오는 것을 볼 때 나실인은 구별된 자의 모습이 어떤 것인가를 보여주기 위해 기록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2절에 의하면, “이스라엘 자손에게 고하여 그들에게 이르라 남자나 여자가 특별한 서원 곧 나실인의 서원을 하고 자기 몸을 구별하여 여호와께 드리거든”이라고 말씀하고 있어서 하나님이 정해서 뽑아 세운 것이 아니라 누구나 원하면 나실인으로 살 수 있다는 것이다. 즉 이제까지 하나님의 진을 막고 있는 레위인, 제사장의 역할이 단순히 그들만의 특별한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 전체가 제사장 나라로서의 역할을 하도록 택하셨기 때문에 백성들도 나실인으로 서원하여 자신을 구별되이 하나님께 드리는 것을 직접 알도록 하시는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나실인으로서 사는 삶이 결코 자신의 인생에 도움이 되거나 즐거움이 되는 것이 아니다. 나실인은 자신이 기간을 정해서 나실인으로 구별된 삶을 살게 되는데, 그 기간을 무사히 마치고 나면 뭔가 큰 축복이 주어진다는 약속이 없다. 뿐만 아니라 나실인으로 사는 기간을 지냈다고 해서 하나님께서 특별한 능력을 베푸신다는 말씀도 없다. 나실인으로 살다가 그 기간이 끝나면 그것으로 그만이다. 다른 혜택이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그렇다고 나실인으로 사는 것이 결코 쉬운 것은 아니다. 다만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행할 뿐이다.
나실인에게는 세 가지 금지 사항이 있다. 첫째, 포도주와 독주를 멀리해야 한다. 심지어 포도즙, 건포도, 생포도도 먹지 말아야 한다(3,4절). 다시 말해서 포도 근처 얼씬도 하지 말라는 것이다.
물이 풍성하지 못한 중동 지역의 사람들에게 포도주는 없어서는 안될 음료요 식수와 같은 것이다. 가장 중요한 음식을 끊는다는 것은 세상의 좋은 것과는 거리가 멀다는 뜻이다. 세상의 좋은 것에 취한 자는 하나님의 것에 만족하지 못한다. 하나님의 것에 만족하지 못하는 자는 하나님의 것과 세상의 것을 분별하지 못하게 된다.
레위기 10:9-10에 의하면, 아론의 아들 나답과 아비후가 다른 불로 분향하려고 하다가 죽은 이후에 하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너나 네 자손들이 회막에 들어갈 때에는 포도주나 독주를 마시지 말아서 너희 사망을 면하라 이는 너희 대대로 영영한 규례라 그리하여야 너희가 거룩하고 속된 것을 분별하며 부정하고 정한 것을 분별하고” 즉 술로 인해 하하나님께 속한 것과 세상에 속한 것을 분별하지 못할까봐 포도주와 독주를 금하시는 것이다.
에베소서 5:17,18에서 바울 사도는 오직 주의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라고 하면서 술 취하지 말고 오직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고 한 말씀에 비추어 볼 때에 술 취하는 것은 술의 지배를 받는 것으로는 주의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오직 성령의 지배를 받는 것으로서만 주님의 뜻을 제대로 알고 주께 복종하게 된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언약 백성은 자신이 하나님께 속한 것임을 보여주는 자이기 때문이다.
둘째, 머리에 삭도를 대서는 안된다. 즉 머리털을 길게 자라게 해야 한다(5절). 머리털을 자르지 않고 길게 자라게 둔다는 것은 무슨 의미인가? 바울 사도가 고린도전서 11장에서 여자들이 머리에 수건을 쓰는 문제로 말하는 것을 보면, 권세가 위에 있음을 표시하는 것으로 말하고 있다(고전 11:10).
7절에 의하면 “자기 몸을 구별하여 하나님께 드리는 표가 그 머리에 있다”고 하였기 때문에 나실인이 머리털을 기른다는 것은 자신을 하나님께 드린 표시로서 자기 위에 다른 권세자가 있다는 뜻이다. 즉 하나님의 진에 속한 자로서 권세 아래 있어서 하나님의 뜻에 의해 움직여지는 자임을 표시하는 것이었다.
셋째, 시체를 가까이 하지 말아야 한다. 심지어는 부모 형제가 죽은 때에라도 그 몸을 시체에 접촉하여 더럽혀서는 안된다(7절).
시체가 부정한 것은 인간이 에덴에서 쫓겨나서 저주 아래에 있는 죽음의 상태를 보여주는 것이기 때문이다(참고 창 2:17, 5:3-5).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라 생명의 하나님이시며 산 자의 하나님이시다(마 22:32).
그러기 때문에 나실인은 시체와 접촉하지 아니함으로 생명의 하나님과 관계하고 있음을 드러내는 것이다. 나실인으로 서원한 기간 중에는 부모 형제가 죽어도 장례에 참석할 수가 없다는 것은, 결국 나실인은 세상으로부터 멀어지고 부모 혈육에게서 멀어져야 하는 고통과 어려움의 삶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을 사랑마음에서 나온 것이라면 결코 어려움이 어려움으로 고통이 고통으로 느껴지지 않을 것이다.
13절부터는 나실인으로 서원한 기간을 무사히 마쳤을 때 행할 규례가 나온다. 나실인이 서원한 기간을 마치게 되면 예물과 함께 제사를 드린다. 그리고 18절에 보면 자기의 머리털을 잘라서 제물로 드리게 된다. “자기 몸을 구별한 나실인은 회막문에서 그 머리털을 밀고 그것을 화목 제물 밑에 있는 불에 둘지며”라고 했다.
머리털은 나실인으로 살았다는 것을 직접 보여주는 유일한 증거이다. 그 머리털을 잘라서 화목 제물과 함께 드린다는 것은 구별되어졌던 자신의 증거를 희생으로 드리는 것이다. 신체의 일부를 드리는 제사는 바로 이 제사뿐이다. 결국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신이 나실인으로 서원하여 이러한 과정과 제사를 통해 제물이 인격화되어 제사장과 제사 제물이 일치가 되는 하나님의 자기 희생을 알도록 하신 것이 이 나실인 제도였다.
하나님은 이 땅에 나실인을 찾으셨다. 아니 이 땅에 이런 완전한 나실인이 없다는 것을 보여주시기 위하여 이 제도를 주셨다고 해야 정확할 것이다. 실로 진정한 나실인은 이 땅에 없었다. 그래서 나실인 되시는 분을 하늘에서 보내셨다. 그분이 예수님이시다. 예수님은 완전하신 나실인이시다. 세상에서 온전히 구별된 삶을 사셨고 또한 마지막에는 자신의 몸을 희생 제물로 드리심으로 대속을 이루셨다.
결국 오늘날 나실인은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의 모습을 드러내는 자이다. 우리 자신을 위해 살지 않고 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를 짐으로 우리에게서 말씀이 불거져 나와 다른 사람의 죄 용서가 이루어지도록 자신을 헌신시키는 모습이 바로 예수님의 모습이다.
그러면 오늘날 자기 몸을 구별하여 주님께 드린다는 말이 무슨 의미인가? 우리는 보통 자신을 여호와께 드린다는 말을 할 때에는 목사가 되거나 해외에 선교사로 나갈 것을 헌신하는 것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우리 몸을 여호와께 드린다는 것은 목사가 되는 것도 아니고, 선교사로 나가는 것도 아니고, 아들을 신학교에 보내는 것도 아니다. 세상과 구별되이 사는 것을 말한다. 다시 말해서 내 인생을 내 것으로 생각하지 않고 사는 것, 내가 하고 싶은대로 하지 않고 내 마음대로 살지 않고 철저하게 하나님의 뜻에 자신을 복종시키는 것, 이것이 바로 여호와께 자신을 구별하여 드리는 것이다.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산 제사로 드리라”(롬 12:1)는 것은 바로 세상과 구별되어 사는 것을 의미한다.
22절 이하에는 하나님께서 아론과 그 아들들로 하여금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축복을 하도록 말씀하신다. 이스라엘이 제사장 나라로서 나실인의 경험이 있게 된다면 이스라엘 모든 백성들은 제사장 나라로서의 모습이 될 것이다. 다시 말해서 나실인이기 때문에 이러한 축복을 하게 되는 것이다. “여호와는 네게 복을 주시고 너를 지키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 얼굴로 네게 비취사 은혜 베푸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 얼굴을 네게로 향하여 드사 평강 주시기를 원하노라”(24-26절).
이 축복의 핵심적인 의미는 나실인으로 살면 하나님께서 복을 주시겠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자신의 언약에 의해 이루어 나가실 것을 아론으로 하여금 선언하도록 하시는 것이다. 그것이 복이다. “그들은 이같이 내 이름으로 이스라엘 자손에게 축복할지니 내가 그들에게 복을 주리라”(27절)는 말씀은 하나님께서 나실인과 같은 이스라엘을 통해 언약을 이루어가실 것임을 선언하신 말씀이다.
그러므로 복은 목사의 축도를 통해서 오는 것이 아니라 언약의 성취자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오는 것이다. 우리 교회에서는 축도가 없는데 축도를 하지 않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목사의 축도로 복을 받고자 하는 미신적 마음이 늘 책망받고 예수님의 피에게만 우리의 관심을 돌리게 하기 위해서이다. 목사의 축도에 관심을 가지고 복을 받기 위해서 오는 자라면 돌아가도 상관없다는 뜻이다(김영대 http://blog.daum.net/reveal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