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고린도전서 7:25-40 혼인(3)
17강 /
고린도전서 7:25-40
혼인(3)
바울 사도는 이제 25-38절을 통해 처녀들에 대해서 말한다. 그는 처녀에 대해서 주님께서 직접 받은 계명과 계시는 없지만 그도 역시 성령의 지배를 받고 있고 주의 자비하심을 받은 충성된 일꾼으로서 주님의 뜻을 이야기한다. 40절에서 바울 사도는 “나도 또한 하나님의 영을 받은 줄로 생각한다”라고 고백한다. 성령을 받았다는 것이 바울에게만 주어진 특권이 아니라 모든 성도들에게 공통적으로 주어진 은혜이다. 그런데도 바울이 나도 성령을 받았다고 강조하고 있는 이유는 무엇인가?
아마도 ‘나도’라는 말은 고린도교회 교인들이 성령을 받았다고 주장하기는 하지만 실제 그들의 삶은 말씀을 좇아 사는 삶이 아니었다. 즉 성령의 지배를 받는 삶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나도 하나님의 영을 받은 줄로 안다’고 강조한 것은 바울이 삶의 모순에 빠진 고린도교회 교인들을 부끄럽게 만드려는 의도가 있는 것으로 보인다. 다시 말해서 진정 성령을 받고 그 지배를 받고 있는 자라면 성령을 따라 사는 사람들답게 살라는 것이다. 바울 자신은 삶을 통해서 성령 받은 자로서 본을 보이고자 하는 것 같다. 그는 자신의 생각이 구체적인 상황에 대해서 성령을 의지하여 판단한 것에 의지하고 있음을 시사한다.
여기서 바울 사도는 “내 생각에는 이것이 좋으니 곧 임박한 환난을 인하여 사람이 그냥 지내는 것이 좋으니라”(26절)고 말씀하고 있다. 성령의 지시와 인도하심을 따라 판단할 때 환난이 임박한 상황에서 처녀, 총각들이 결혼하게 되면 여러 고난과 어려움을 많이 당하게 될 것이 불을 보듯 뻔한 일이기 때문이다. ‘임박한 환난’이 여기서 정확하게 무엇을 말한다고 이야기하기 곤란하다. 그러나 29절에서 ‘때가 단축하여졌다’는 말씀을 통해서 볼 때에 바울 사도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종말론적 상황 하에서 복음을 좇아 살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당하는 고난의 상태에 있는 것을 총칭한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시기로 한 그때까지 우리는 종말에 살고 있다. 그러기에 그 종말의 상태에서 당하는 고난은 모든 성도에게 있다. 이런 상태에서 성도는 세상의 것들에 집착할 필요가 없다. 이 세상의 형적은 지나가기 때문이다(31절). 우는 자들이 울지 않는 자처럼 행동할 수 있고, 재물이 많은 사람은 아무 것도 없는 자처럼 행동할 수 있고, 세상 물건을 사용하는 자들은 아무 것도 쓸 것이 없는 것처럼 행동할 수 있는 것은 그들이 오는 하나님 나라의 관점에서 세상적인 모든 것들을 상대적으로 평가하기 때문이다.
성도는 돈이 많지 않아도 모든 것을 소유한 것처럼 살아갈 수 있는 것은 그가 주님 안에서 모든 것이 부요하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빌 4:11,18). 남들이 부러워하는 것을 부러워하지 않을 수 있는 것은 세상 가치들을 상대화시킬 수 있는 믿음이 주어져 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우리의 힘으로 이렇게 산다는 불가능한 것이다. 우리는 죄악의 본성을 좇아 우리의 힘으로 살려고 하기 때문에 세상을 좋아하게 되고 세상의 가치를 궁극적인 것으로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성도는 보이는 것을 따라 살지 않고 믿음을 따라 사는 사람이다. 모든 것을 하나님의 관점에서 판단할 줄 아는 사람이 믿음을 소유한 사람이다. 하박국 선지자가 말한 대로 외양간에 소가 없고 포도나무에 포도열매가 없고 무화과나무에 소출이 없을지라도 여호와 한 분만으로 만족하겠다는 신앙이어야 한다. 나무의 열매나 소출이 없다는 것은 단순히 농사가 안 되서 그런 것이 아니라 결실은 풍성할지라도 이방인들이 와서 이스라엘을 점령하고 모든 것을 다 빼앗아가기 때문에 그런 것이다. 그런 상황 속에서도 오히려 주님께서 이방인들로 하여금 소출을 빼앗아가게 하실지라도 예수 그리스도 한 분만으로 만족하고 그분만을 의지하고자 하는 자가 성도이다.
그러나 우리가 무엇을 하든지 그것이 문제가 아니라 중요한 것은 거기에 고난이라는 문제가 항상 개입되어 있다는 것이다. “육신에 고난이 있으리니”(28절)라는 말씀에서 보여주고 있듯이 결혼을 하느냐 하지 않느냐 하는 문제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것을 가지고 죄를 짓느냐 안 짓느냐 하는 문제로 생각해서는 안 된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그것은 죄 짓는 것이 아니라고 선언하고 있는 것이다.
죄를 짓느냐 안 짓느냐 하는 문제로 생각할 것이 아니라 그 속에 인간의 죄악 때문에 오는 고난이 항상 자리하고 있기 때문에 그것은 한정적이고 종말의 때라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결혼을 통해서도 우리는 주님의 십자가를 생각하지 않는다면 하든 하지않든 그것은 우리에게 유익이 되지 못하는 것이다. 단지 육체의 쾌락과 즐거움을 좇아가는 방편에 불과할 뿐인 것이다. 성도는 세상의 즐거움을 좇아 사는 자가 아니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이제 “장가간 자는 세상일을 염려하여 어찌하여야 아내를 기쁘게 할꼬 하여 마음이 나누이며 시집가지 않은 자와 처녀는 주의 일을 염려하여 몸과 영을 다 거룩하게 하려 하되 시집간 자는 세상일을 염려하여 어찌하여야 남편을 기쁘게 할꼬 하느니라”(33,34절)고 말씀하고 있다. 결혼한 자들은 상대방에 대한 의무와 사랑 때문에 그를(또는 그녀를) 기쁘게 하려다가 마음을 주님께만 집중하지 못하고 갈린 마음을 가지게 된다. 그러나 결혼하지 않은 과부들과 처녀들은 오직 주님께만 헌신하고 주님에 속한 일들만 염려하며, 자신을 드리게 된다는 것이다(32절).
마지막으로 바울 사도는 39-40절에서 “아내가 그 남편이 살 동안에 매여 있다가 남편이 죽으면 자유하여 자기 뜻대로 시집갈 것이나 주 안에서만 할 것이니라 그러나 내 뜻에는 그냥 지내는 것이 더욱 복이 있으리로다 나도 또한 하나님의 영을 받은 줄로 생각하노라”고 말씀함으로 과부들에 대하여 교훈하고 있다. 죽음 이외에는 결혼관계가 해소될 수 없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남편이 죽을 경우 과부들은 자유롭게 결혼할 수 있으나 ‘주 안에서만’ 해야 한다고 말씀하고 있다. 왜냐하면 결혼이란 결코 자기 편익과 자기 삶의 유익을 위하는 것으로만 생각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본문에서 바울 사도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결혼을 할 것인가 말 것인가 하는 것을 말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다. 부인과 혹은 남편과 사별하였는데 다시 결혼을 하는 것이 성경적인가 아니면 그대로 혼자 사는 것이 성경적인가 하는 문제를 다루고 있는 것도 아니다. 바울 사도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결코 결혼에 대한 문제가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는 바울 사도가 35절에서 이렇게 말씀하고 있는 것을 보아야 한다. “내가 이것을 말함은 너희의 유익을 위함이요 너희에게 올무를 놓으려 함이 아니니 오직 너희로 하여금 이치에 합하게 하여 분요함이 없이 주를 섬기게 하려 함이라.” 주님을 섬기게 하기 위하여 바울은 이런 말들을 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주님을 섬기는 문제이지 결혼을 어떻게 할 것인가 하는 문제가 결코 아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믿는 성도는 과연 무엇을 좇아 사는 자인가? 세상의 형적은 지나간다고 하였다(31절). 즉 세상의 것이 아무리 좋아 보여도 다 사라지고 없어질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런데 왜 세상의 것에 매여 사느냐 하는 것이다. 그것을 단순히 결혼이라는 것을 예로 들어서 설명한 것에 불과한 것이다. 그러기에 우리는 이 말씀을 가지고 결혼에 대하여 새로운 계명을 준 것으로 받아들일 수 없고 또한 결혼의 지침으로 삼아야 할 문제가 결코 아니다. 성도는 하나님의 약속을 인생의 목적으로 삼아야지 결혼이 인생의 목적이 되어서는 안되는 것이다.
결혼한 부부가 부부관계를 허락한 하나님의 의도를 잊어버리고 우리가 원하는 모습으로 살아가는 것은 성도의 모습이 아니다. 오늘날 교회 안에서의 가정사역 세미나는 우리가 원하는 화목한 가정을 이루고자 하는 점에서 말씀에 심각한 도전이 되고 있다. 그러나 성도는 어느 누구에게나 그 무엇에도 매여 살아서는 안 된다. 남편에게도, 아내에게도, 자녀에게도 매여서는 안 된다. 심지어는 화목한 가정을 이루고자 하는 욕심에도 매여서는 안 된다. 오직 하나님께 매여 사는 자가 성도의 본질적인 모습이다. 따라서 결혼도 결혼함으로 결혼하기 전보다 주님을 섬기고 주님을 위해 살아가야 하는 한 과정과 방편으로 주어지는 일이라는 사실을 먼저 생각하지 않으면 안 된다. 또한 독신으로 사는 것도 독신 자체를 신앙적인 의미로 생각해서는 안 될 것이다. 독신으로 산다고 해서 신앙이 좋다고 말할 수 없다. 단지 하나님께서 베풀어주신 은혜인줄로 여기고 감사하면서 주님을 섬기고자 하는 삶을 살아가야 하는 것이다(2001.5.6/김영대 http://blog.daum.net/reveal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