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약강론/고린도전서

15.고린도전서 7:1-9 혼인(1)

불편한 진리 2015. 1. 30. 15: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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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린도전서 7:1-9 

혼인(1)

 

대부분의 사람들은 성경을 노자의 도덕경이나 공자의 논어, 모하메드의 코란, 불교의 금강경이나 반야심경 등과 같이 어떤 위대한 사람이 쓴 경전을 보는 것과 같은 식으로 이해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동서양의 온갖 고전과 경전들을 공부하여 스스로 도를 닦고 좋은 가르침들을 되새겨 자신의 인격을 수양하는 교과서로 삼고자 한다. 이런 사람들에게 성경이란 예수님의 위대한 말씀들을 기록한 책에 불과한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성경을 이해할 때에 놓치지 말아야 하는 것은 자신에게 정해지는 규칙으로 받아들여서는 곤란하다는 점이다. 특히 성경에서 명령법으로 표현된 말씀들을 우리는 우리에게 주어진 규칙이나 규범으로 생각하기 때문에 성경을 이해하는 것이 어려워진다. 이는 인간의 죄를 모르기 때문에 하게 되는 성경 해석이다.

 

예를 들면 레위기 11:45에 보면 나는 너희의 하나님이 되려고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여호와라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라는 말씀이 나오는데 이 말씀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해 거룩하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인가? 인간이 스스로 거룩해 질 수 있는가? 인간이 스스로 거룩해 질 수 있다고 말한다면 스스로 구원이 가능하다는 말과 같은 말이다. 우리 스스로의 구원이 가능한가? 만약 가능했다면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어야 할 필요성은 없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인간은 스스로 구원이 불가능하다면 거룩해 지는 것도 불가능한 것이다.

그렇다면 왜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해 거룩하라고 말씀하시는가? 그것은 이스라엘 백성을 향한 명령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이 그렇게 하시겠다는 선언이다. 애굽에서 건져내신 분이 여호와 하나님이라면 또한 거룩하게 하시는 분도 여호와 하나님이시라는 뜻으로 하신 말씀이다.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들을 반드시 거룩하게 만드시겠다는 것이다. 그것을 위해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건져내신 것이었다. 하나님이 애굽에서 이스라엘을 건져내시는 것으로 시작하셨다면 또한 반드시 거룩의 자리에까지 이르게 하실 것이다. 아니 애굽에서 건져내신 것 자체가 바로 거룩이다. 하나님에게서는 시작이 곧 완성이기 때문이다.

 

이런 관점으로 성경을 이해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늘 성경을 우리에게 주신 규칙 정도로 보고 우리는 끊임없이 그것을 실천하려고 노력하게 될 것이다. 그것은 우리가 주님을 따르려고 하는 것이 주님의 부르심에 따르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성경을 본다는 것을 주님을 따르기 위해 성경을 보는 것이 아니라 주님을 따르기 때문에 주님의 마음을 더욱 바르게 이해하고 더욱 주님만을 좇기 위해서 성경을 보게 되는 것이다.

7장에서는 혼인에 대한 문제를 다루고 있다. 그렇다고 해서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혼인에 대한 어떤 규칙을 정하고자 하는 것으로 보아서는 안 된다. 본문의 말씀은 결코 혼인에 대한 규칙을 제시하고자 하는 목적으로 주어진 것이 아니다. 7장은 1-7절에서 남편과 아내에 대하여, 8-9절에서는 독신 생활에 대한 문제와 10-16절에서는 이혼에 대한 문제를, 그리고 25-38절에서는 혼인에 대한 문제를 언급하고 있지만 바울 사도는 이 모든 것들을 통해 주님을 위해 사는 것이 어떤 것인가를 설명하고자 하는 것이다.

 

고린도전서 6:19,20에서 바울 사도는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의 것이 아니라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고 했다. 7장 이하에서 말씀하고자 하는 내용에 대한 전제로 이미 이렇게 주어져 있다는 것을 우리는 먼저 기억해야 한다. 즉 바울 사도는 혼인의 문제를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문제로 설명하고자 한다.

따라서 우리는 7장을 가지고 성도가 혼인을 하는 것이 낫다든지 독신으로 지내는 것이 낫다든지 하는 말을 할 필요가 없다는 점을 먼저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이다. 다시 말해서 어떤 것이 더 신앙적인가 하는 것을 따질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다. 즉 결혼을 하는 것이 성경적이다 혹은 결혼을 하지 않고 독신으로 살면서 복음을 전하는 것을 가지고 위대한 사람이라고 말해서는 안 된다. 어떤 모습으로 살아가든지 오직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으로 살아가야 한다.

 

이렇게 말하면 우리는 교회 다니고 있고 예배하고 있으며, 헌금하고 기도하는 생활을 하고 또한 생활 속에서 다른 사람에게 전도를 하고 있으면 그것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라고 쉽게 생각한다. 그것은 이미 유대인들에게서도 드러났는데 고르반이라고 하여 하나님께 드림이 되었다고 하면 된다는 식으로 생각하는 것과 하나도 다를 바가 없다(7:11). 종교적 행위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되는 것이 결코 아니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그렇게 지적하신 것이었다.

너희의 쓴 말에 대하여는 남자가 여자를 가까이 아니함이 좋으나”(1). 여기서 너희 쓴 말이 무엇인가? 6장에서 살펴보았던 것과 마찬가지로 헬라 사상에 반대하면서 일부 사람들은 금욕적인 것이 종교적으로 유익하다고 생각한 것 같다. 그래서 아마도 바울 사도에게 문의를 한 것 같다.

 

이러한 교인들의 질문에 바울 사도는 음행의 연고로 남자마다 자기 아내를 두고 여자마다 자기 남편을 두라”(2)고 하면서 결혼한 사람들이 서로 의무를 다할 것을 말한다(3). 남편은 아내에 대한 의무를 다하고, 아내는 남편에 대한 의무를 다하라는 것이다. 왜 그렇게 해야 되느냐 하면 아내가 자기 몸을 주장하지 못하고 오직 그 남편이 하며 남편도 이와 같이 자기 몸을 주장하지 못하고 오직 그 아내가 하기 때문이다(4). 결혼을 했으면 나는 이제 나의 소유가 아니고 서로 상대방의 소유가 된 것으로 알고 살아가야 한다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결혼을 자신의 행복을 추구하기 위한 일환으로 생각한다. 남자는 여자를 얻어 밥하고 빨래하는 일을 덜고자 하고 여자는 남자를 통해 자신의 인생을 편하게 누리고자 하는 것이다. 이렇게 이기적인 마음으로 결혼했을 때 드러나는 것은 서로가 서로에게 사랑을 요구하게 된다는 것이다. 자신의 행복을 위해서 상대방이 나를 위해서 희생할 것을 요구한다. 즉 내가 상대방의 소유가 되는 것이 아니고 상대방이 나의 소유로 존재하기를 원하는 것이다. 그래서 오늘날 교회에서도 가정이 화목하도록 회복되어야 주님을 바르게 섬길 수 있는 것처럼 가르친다.

 

그러나 그것은 성경이 말씀하는 것과는 다르다. 이미 성도가 된 자는 주님의 말씀을 좇아 살기 때문에 가정을 잘 돌보게 된다. 왜냐하면 남편은 아내를 사랑하는 것을 통해 주님께서 신부된 교회를 어떻게 대우하시며 사랑하시는가를 배우게 되기 때문이다. 아내는 아내로서 남편에게 복종함으로 교회가 주님의 말씀에 어떻게 복종하는지를 배우게 되는 것이다. 바울 사도는 이런 점에서 성도는 결혼하는 문제까지도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목적으로 이루어져야 한다고 보는 것이다.

결혼 자체를 목적으로 삼지 말고 하나님께 영광돌리는 과정으로, 목적으로 삼아야 한다. 그것이 바로 서로의 역할과 의무를 감당하는 것이다. 즉 남편은 남편으로서 아내는 아내로서 서로의 역할과 의무를 감당하는 그것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사는 것이라는 의미이다. 남녀가 결혼하여 함께 산다는 것은 남자에게는 남편이란 역할이 주어지고, 여자에게는 아내란 역할이 주어진다. 그 역할은 하나님이 나에게 세우신 역할이다. 그 역할을 성실히 감당하고 사는 것이 하나님께 영광이 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결혼을 통해 신앙적으로 심각한 문제가 발생했다고 보는 것은 한 쪽만 보고 있는 나의 편견에 관한 문제 때문이다. 내가 그 역할을 감당하지 못하고 있는데서 발생하는 것이지 상대방이 나를 방해해서 신앙에 문제가 생겼다는 것은 자기 핑계이고, 합리화이다. 아내 때문에 혹은 남편 때문에 라는 식으로 자기 책임을 남에게 떠넘기고자 하는 죄인의 심성이다. 마치 아담이 하와 때문에 죄를 범했다고 핑계한 것과 같다.

바울 사도는 남자가 여자를 가까이 하지 않는 것이 좋다고 말하면서도 결혼을 하라고 쓰고 있다. 그 이유는 음행 때문이다. 고린도 교회에서 음행의 문제는 심각했다. 음행을 피하는 방법을 바울은 결혼을 말하고 있다. 그래서 심지어는 분방하는 것도 합의해서 하고 그 기간도 잠시동안만 가질 것을 말한다. 절제를 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이럴 때 우리는 우리의 의지력으로 그런 시험들을 얼마든지 이길 수 있다고 생각하고 또한 마음먹기에 달렸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신앙이란 의지력으로 하는 것도 아니고 마음먹기에 달린 문제도 아니다. 신앙은 하나님의 은혜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6절에서 그러나 이 말을 함은 권도요 명령은 아니라고 한다. 어떤 것을 행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에 의해 가능한 것이지 명령에 의해 되어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7절에서 각각 하나님께 받은 자기의 은사가 있으니 하나는 이러하고 하나는 저러하니라고 말한다.

 

그렇지만 만일 절제할 수 없거든 혼인하라 정욕이 불같이 타는 것보다 혼인하는 것이 나으니라”(9)고 권면하고 있다. 이러한 말씀들을 통해서 볼 때에 바울 사도는 독신이냐 결혼이냐 하는 것으로 어느 하나를 선택하라고 하는 것이 아니다. 독신으로 지내든 결혼을 하든 그것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은사대로 하면 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본문에서 중요한 것은 결혼을 하느냐 독신으로 사는냐 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사는 성도의 모습인가를 묻는 것이다.

신앙이란 하나님의 은혜이다. 하나님의 은혜에 의해 시작되었고 하나님의 은혜에 의해 유지된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정욕을 절제할 수 없는 자들이다. 스스로의 힘으로 이겨보겠다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다. 그래서 우리에게서 음행이라는 문제가 절제되고 있다면 그것은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남편 때문에 아내 때문에, 정욕을 절제할 수 있는 것이 부부이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의 잘 절제하고 있음이 드러나서는 안된다. 그 절제 된 것 속에서 늘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사는 모습이 드러나야 하는 것이 성도의 삶이라는 것이다(2001.4.8/김영대 http://blog.daum.net/reveal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