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약강론/고린도전서

14.고린도전서 6:12-20 몸

불편한 진리 2015. 1. 30. 15: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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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린도전서 6:12-20 

 

우리는 성경을 볼 때에 항상 이것이냐 저것이냐 하는 결단을 내리려고 하는 마음으로 성경을 본다. 다시 말해서 무엇을 할 수 있고 무엇을 할 수 없다는 식으로 갈라서 거기에 우리의 행동을 집어넣으려고 하는 마음으로 성경을 해석하려고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죄가 되는 것은 하지 않으려고 하고 죄가 되지 않는 것을 가려서 하려고 한다. 이러한 마음을 가지게 되는 원인이 선악과를 먹은 죄에 근거하고 있다. 선악과를 먹고 선악을 분별하고자 하는 죄의 본성 때문이다. 그러기에 매사에 선과 악을 판단하고자 하는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가 선악을 분별하여 판단하고자 하는 그 판단이 제대로 되는 판단일까 하는 것이다. 내가 내리는 판단이 과연 올바른 판단이 될 수 있는가? 답은 없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죄로 말미암아 선과 악에 대한 분명한 기준을 가질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가 내리는 판단이 올바른 것이라고 말하기 어렵다. 인간은 누구나 다 자기 입장에서 자기 중심으로 판단하고 결정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자기 자신에게 유익하면 그것은 선이고 자신에게 유익하기 않으면 그것은 악으로 본다. 결국 우리는 성경을 보아도 자기 입장에서 해석하게 되고 그것이 선이라고 생각하고 추구하게 된다.

 

그러므로 성경을 이해할 때에 우리는 성경 말씀에서 이것이냐 저것이냐 라고 분별할 문제로 받아들일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말씀하고자 하시는 본질적인 뜻을 생각할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예컨대 6장 전반부에서 생각했던 것처럼 세상 법정에 송사하는 문제에 대해서도 성경은 하라, 하지 말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너희들이 성도라면 이렇게 할 것인가 저렇게 할 것인가를 생각하라는 것이 아니라 어디에 속했는가를 다시 점검해 보라고 말씀하고 있다.

그래서 11절 말씀을 하고 있는 것이다. “너희 중에 이와 같은 자들이 있더니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과 우리 하나님의 성령 안에서 씻음과 거룩함과 의롭다 하심을 얻었느니라.” 즉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성령 안에서 씻음과 거룩함, 의 안에 부름을 받은 존재라고 말씀하고 있다. 이를 통해 바울 사도는 고린도 교회 성도들이 근본적으로 세상에 속해서 세상의 지혜대로 움직이는 자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속해 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지혜를 좇아 사는 자라는 것을 선언한다.

 

이런 점에서 바울 사도는 12절에 와서 모든 것이 내게 가하나 다 유익한 것이 아니요 모든 것이 내게 가하나 내가 아무에게든지 제재를 받지 아니하리라고 말씀하고 있다. 성도에게 있어서는 모든 것이 가능하지만 가능하다고 해서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는 것이 아니다. 모든 것이 가능하고 행해질 수 있다고 하더라도 모든 것이 반드시 행해져야 할 필요는 없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그 어떤 것에도 지배를 받지 않는다고 선언하고 있다.

당시 고린도는 헬라사상이 팽배한 도시였다. 헬라적 사고의 대표적인 문제는 이원론인데 몸과 영을 분리하여 생각하는 것이다. 그들은 영의 자유를 몸에 의해서 구속당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들이 생각하는 진정한 구원이란 영이 몸에 매이지 않고 자유를 누리는 것이었다. 즉 영이 구원을 받았으면 더 이상 몸에 매여 살 필요가 없다는 생각이었다. 몸은 천하고 이 세상에서 지나가는 것에 불과한데 몸에 매여 있을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마음껏 몸의 자유를 누렸는데 그 자유가 음행이라는 데까지 나아가게 되었다. 이것을 바울의 입장에서는 죄악(음행)의 지배를 받고 있는 입장으로 본다. 그래서 바울은 모든 것이 가하나 아무에게도 제재를 받지 않는 것이 성도의 입장이라고 밝히고 있는 것이다.

 

성경에서 말씀하고 있는 것은 인간을 몸과 영혼으로 분리해서 말씀하고 있지를 않다. 성경에서 말씀하는 것은 언제나 하나다. 즉 한 인격, 한 사람, 몸이라는 전인(全人)으로 표현하고 있지 이원론으로 설명하지 않는다. 이런 점에서 바울 사도가 설명하고 있는 것은 영과 육체로 설명하고 있다. 바울 사도가 영과 육체로 설명하고 있는 것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상태를 영으로 그리스도와 상관없는 상태를 육 혹은 육체로 표현한 것이다.

그래서 바울 사도가 모든 것이 내게 가하나라고 먼저 말한 것은 고린도 교회 교인들이 헬라적 사고에 빠져있는 문제를 지적하기 위해서이다. 바울 사도는 고린도 교회가 몸에 대해서 잘못 생각하고 있는 것을 지적하고 있다. 고린도 교회 교인들이 몸에 대해서 잘못 생각하고 있는 증거가 무엇인가 하면 음행을 마음대로 행한다는 것이었다. 바울이 음행을 예로 든 것은 음행이 특별히 다루어야 할 큰 죄이기 때문이 아니라 음행이 몸을 더럽히는 대표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13절에서 식물은 배를 위하고 배는 식물을 위하나 하나님이 이것 저것 다 폐하시리라 몸은 음란을 위하지 않고 오직 주를 위하며 주는 몸을 위하시느니라고 기록하고 있다. 앞에서 이야기한 것처럼 사실 우리는 두 가지 입장에서 늘 생각하고 판단하고자 한다. 즉 식물이냐 배냐 하는 입장이다. 그러나 바울 사도가 말하고 싶은 것은 몸이 누구를 위해서 있으냐 하는 것이다. 나를 위해서 있는가, 아니면 하나님을 위해서 있는가? 이 문제를 따지고 싶은 것이다. 여기서 바울 사도는 배를 위한 것도 아니고 식물을 위한 것도 아니라고 하면서 몸은 주를 위해 존재하는 것이고 또한 주님은 몸을 위하시는 분이라고 말씀한다.

그렇다면 그 몸이란 어떤 몸인가? 14절에 보면 하나님이 주를 다시 살리셨고 또한 그의 권능으로 우리를 다시 살리시리라죽은 자가 다시 살려줌을 받게 된 것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 때문이다.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다시 살려줌을 받았다는 것은 단순히 죽었다가 살았으니 이제 우리가 할 일을 마음대로 해 보자는 입장이 아니다. 바울 사도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살았다면 주님과 이미 한 몸이 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너희 몸이 그리스도의 지체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내가 그리스도의 지체를 가지고 창기의 지체를 만들겠느냐 결코 그럴 수 없느니라”(15)고 말씀하고 있다. 그리스도의 몸이 되었기 때문에 세상적인 음행을 거부하고 더욱 그리스도의 몸과 그의 지체들을 위해 사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성도는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주를 위해서 있기 때문에 먹는 것까지도 나 자신을 위해서 먹는 것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몸을 자기를 위해서 쓸 때 그 사람은 쾌락으로 나아간다. 자기의 욕심을 채우는 것으로 만족하면서 살게 된다. 하나님을 찾는 것도 자기 몸을 위해서 찾게 된다. 그러나 성도는 주를 위해서 존재한다. 왜냐하면 죽은 우리가 그리스도로 인해서 생명을 얻었기 때문이다. 성도는 믿음을 통해서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고 그리스도와 함께 부활하여 새 생명에 동참하게 되었다(6:1-11). 따라서 창기와 합하는 자는 창기와 한 몸이 된 것과 같이 예수 그리스도와 합한 자는 그리스도와 한 영이 되었다(16,17). 중요한 것은 창기와 합한 자는 한 육체가 되어 세상 속에서 더러운 죄 아래에 있지만 주님과 합한 자는 한 영이 되어 거룩한 상태가 되었다는 사실이다.

창세기 6:3에 의하면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나의 신이 영원히 사람과 함께 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그들이 육체가 됨이라고 말씀하고 있다. 이로 보건대 하나님의 영이 함께 하지 않는 모습이 육체이다. 반대로 주의 영이 함께 하는 것이 영이다. 따라서 사람이 죽었느냐 살았느냐 하는 문제가 아니라 살아 계신 영이 함께 하고 있느냐 없느냐에 의해 산 자인가 죽은 자인가가 드러나는 것이다. 즉 성령께서 함께 하는 자가 살아 있는 자이다.

 

이제 성도는 주님의 영에 의해 산 자가 되었기에 살아 있는 자(산 영)에게 바울 사도는 하나님의 말씀을 그대로 선포하고 있다. “음행을 피하라!” 왜냐하면 사람이 범하는 죄마다 몸 밖에 있는 것이지만 음행하는 자는 자기 몸에게 죄를 범하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18). 성도는 주님의 몸이 되었기에 주님의 몸에 세상을 덧붙이지 않는 자라는 것이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주님이 거하신다는 것 자체가 바로 성령의 전이 되었다는 의미로 연결시킴으로서 하나님의 집이요 하나님의 소유가 되었다는 의미를 부각시키고 있다(19). 구약의 성전이 하나님의 자기 희생을 보여주었듯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으로 말미암아 피 값으로 주고 산 주님의 몸된 교회는 세상과 합하는 쪽으로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을 드러냄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쪽으로 나아가는 것이 당연한 모습이다(2001.4.1/김영대 http://blog.daum.net/reveal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