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약강론/고린도전서

12.고린도전서 5:1-13 음행의 문제

불편한 진리 2015. 1. 29. 15: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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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린도전서 5:1-13 

음행의 문제

 

4:20에서 바울 사도는 이렇게 말했었다. “하나님의 나라는 말에 있지 아니하고 오직 능력에 있음이라.” 하나님의 나라가 능력에 있다는 것은 말과 행동이 분리된 것이 아니라는 뜻이다. 세상의 지혜는 말을 잘하는 것에 있었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는 세상의 지혜와는 전혀 대조되는 것이었다. 그래서 말만 무성한 고린도교회 교인들의 삶에 대한 실제적인 문제를 이제 바울 사도는 구체적으로 언급하기 시작한다.

 

바울 사도는 1절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너희 중에 심지어 음행이 있다 함을 들으니 이런 음행은 이방인 중이라도 없는 것이라 누가 그 아비의 아내를 취하였다 하였도다.” 고린도 교회 교인들의 삶의 문제를 구체적으로 음행을 들어 책망하고 있다. 여기서 아비의 아내란 친어머니라기보다는 아버지의 젊은 첩을 지칭하는 것으로 보인다. 이런 일은 이방인들 사이에서도 부도덕으로 치부되고 있었다.

 

앞에서 이미 말하였듯이 하나님의 지혜는 십자가였다. 이런 점에서 고린도교회 교인들이 참된 성도라면 십자가만을 바라보고 하나님의 은혜로 세상을 사는 방식이어야 했다. 그러나 그들은 그러한 삶이 아니었기에 교회는 자기 마음대로 방탕의 길로 나아갔다. 그것을 사도는 교만으로 보고 있다. “그리하고도 너희가 오히려 교만하여져서 어찌하여 통한히 여기지 아니하고 그 일 행한 자를 너희 중에서 물리치지 아니하였느냐”(2).

 

고린도 교회 교인들의 교만한 삶의 대표적인 문제는 음행이었다. 음행의 문제는 바울 사도가 고린도 교인들에게서 들었던 또 다른 문제였다. 스스로 지혜 있다고 자부하던 그들이 교회 내에서 음행을 행하는 사람을 방치하고 도리어 그에게 회개를 종용하기보다는 교만한 태도를 취하였던 것이다(2,6).

 

대부분의 주석서나 강해서를 보면 이 단락에 대한 제목을 성적인 부도덕이라고 명명했다. 그러나 바울 사도는 지금 음행이라는 도덕적인 문제를 다루고자 하는 것이 아니다. 성경에는 음행의 문제를 도덕적인 문제로 다루고 있는 것이 아니다. 교회 내에 음행이 들어와 있는데 지혜롭다고 하는 너희들이 왜 그것을 말씀으로 대처하지 않았느냐고 책망하고 있는 것이다. 음행의 문제를 대하는 교회에 대하여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본문을 대할 때에 우리 교회는 음행하는 사람이 없으니까 괜찮다고 생각하거나 우리와는 관련이 없는 것으로 생각해서는 안 된다. 본문은 주님의 몸된 교회가 어떤 모습이어야 하는지를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쉬운 말로 복음만 전하면 된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복음을 안다는 것이 어쩌면 항상 소극적이 될 수 있다. 뭔가를 안하고 있으면 다 된 것으로 여긴다. 그러나 그것은 복음을 아는 자의 자세가 아니다. 아니 복음을 아는 자라면 복음을 위해 사는 적극적인 모습이 있다. 이런 점에서 교회는 거룩을 위해서 책망할 자는 책망하고 도와줄 자는 도와주는 삶을 살게 되어 있고 또한 교회는 그러한 모습이 당연히 있게 된다. 교회는 죄에 대한 인식을 분명히 하고 있어야 한다. 그리고 죄에 대해서는 날카롭게 정죄해야 하고, 용납이나 타협을 해서는 안될 문제들을 분명히 가르쳐 주어야 한다. 그리고 복음을 위해서 싸우는 자들을 위로하고 격려해 주어야 하는 곳이 교회이다. 교회가 이 일을 하지 않으면 모두가 죄에 대하여 담대함을 가지면서도 복음 안에서 사는 것으로 착각하게 만들게 된다.

 

기독교는 죄로부터 멀리하는 공동체임에도 불구하고 죄를 용납하고 용서를 빌미로 무조건 포용하는 것이 교회의 할 일이라면 그 교회는 죄에 의해 점령당하고 마는 것이다. 아니 죄에 의해 점령당한 교회라면 애초부터 죄에 대하여 노출되어 있었고 죄의 지배를 받는 인간의 모임에 불과한 것이었다. 교회가 죄에 대하여 민감하지 않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죄의 지배를 받게 되는 것이다.

 

교회는 세상으로부터 도망을 해서도 안 되지만 세상을 받아들여서도 안 된다. 세상에 속하지는 않았지만 세상에 보냄을 입은 자가 성도이다(17:14-19). 교회는 거룩을 추구하는 곳이고 생명과 진리가 제대로 드러나는 곳이어야 한다. 죄에 대한 정죄함이 없는 교회는 말로만 신령하다는 공격을 받을 수밖에 없다. 이것은 남을 공격하자는 얘기가 아니다. 인간이 죄에 대하여 분명하지 못하고 약한 모습을 보이고 있는 것을 깨우치기 위해서 기록된 말씀이다. 교회는 하나님의 말씀 그대로 뿌린 대로 거두게 되어 있다. 교만한 마음으로 오게 되면 교회는 자연히 그런 모습만 보이는 교회가 될 것이고, 십자가를 보며 정결함으로 나올 때 교회는 주님의 능력으로 세워지는 교회의 모습이 드러나는 것이다.

 

4,5절에 보면 주 예수의 이름으로 너희가 내 영과 함께 모여서 우리 주 예수의 능력으로 이런 자를 사단에게 내어 주었으니 이는 육신은 멸하고 영은 주 예수의 날에 구원 얻게 하려 함이라고 말씀하고 있다. 이 말씀을 우리는 대단히 난해하게 생각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여기서 이해하기 곤란한 부분은 사단에게 내어 주었다는 말과 육신은 멸하고 영은 구원을 얻게 한다는 말이다. 이 말은 교회를 지키기 위해 한 개인을 징계하고 쫓아내라는 의미가 아니다. 왜냐하면 4절에서 주 예수의 이름으로 너희가 내 영과 함께 모여서 우리 주 예수의 능력으로라고 말씀하고 있기 때문이다. 교회가 정치적인 권한을 가지고 휘두르라는 말이 아니다. 주님의 이름으로 주님의 영으로, 주 예수님의 능력이 나타나게 하라는 말씀이다.

 

그러므로 목사를 대항하고 교회에 물의를 일으켰다고 해서 한 개인을 교회가 징계하고 쫓아내는 일을 합리화시켜주는 말씀이 결코 아니다. 사단에게 내어주는 목적이 결국 구원을 목적으로 하고 있다는 말씀이다. 사단에게 내어준다는 것은 주님의 몸된 교회 밖으로 출교하는 것이다. 목적은 육신은 멸하고 영은 구원을 얻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여기서 우리가 주의해야 하는 것은 성경은 결코 육신과 영을 서로 분리해서 이원화된 것으로 말하고 있지 않다. 성경에서 육신이라는 것은 몸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죄악된 성품을 지칭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안에 있는 하나님적 성향, 거룩을 향한 성품 그것을 죄악된 성품인 육신과 대비하여 영이라는 말을 쓰는 것이다.

 

육신은 멸하고 영을 구원받게 하겠다는 것은 인간을 두 요소로 분리하여 말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에게 있는 죄악된 성품의 요소들을 극복하고 하나님의 거룩한 성품이 그 전체를 지배하는 자로 만들어 가겠다는 의미다. 다시 말해서 죄악된 성품은 죄악된 성품대로 그것을 지배하는 사탄에게 내어주고 하나님의 지배를 받는 영적인 성향으로 구원받도록 만드는 것이 교회의 할 일요 본래적 사명이라는 뜻이다. 육체, 즉 옛 성품을 십자가에 못박았고 주님에 의해 다시 살아난 영은 주님과 더불어 생명을 누리는 상태가 되도록 하는 일이 교회가 할 일이라는 말이다.

 

결국 사단에게 내어준다는 것은 단지 징계하는 의미가 아니라 그 사람의 옛 성품을 죽이고 하나님의 거룩에 의하여 지배받고 구원받는 자가 되도록 하기 위해 교회의 본질적인 복음을 드러내는 일에는 무관심하고 오히려 파당을 형성하고 세상의 지혜에 정신이 팔려 있느냐 하는 책망이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6,7절에서 너희 의 자랑하는 것이 옳지 아니하도다 적은 누룩이 온 덩어리에 퍼지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누룩 없는 자인데 새 덩어리가 되기 위하여 묵은 누룩을 내어 버리라 우리의 유월절 양 곧 그리스도께서 희생이 되셨느니라고 말씀하고 있다. 교회가 죄를 용납하는 것은 유월절 어린양 되시는 그리스도의 정신에 위배되는 것이다. 반대로 교회가 용서의 은혜를 입었다는 것은 곧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희생되신 희생 때문이다. 이 근거 위에 늘 서 있는 교회인지 물어야 한다. 주님의 십자가 피 위에 서 있는 교회만 주님의 교회이다. 그것이 곧 누룩 없는 새 덩어리이다. 그러면서 구약에서 유월절에 무교병을 먹는 유월절의 희생정신을 상기키고 있다.

 

그렇다고 세상에서 죄를 짓는 자들을 아예 멀리 하라는 것이 결코 아니다. “이 말은 이 세상의 음행하는 자들이나 탐하는 자들과 토색하는 자들이나 우상 숭배하는 자들을 도무지 사귀지 말라 하는 것이 아니니 만일 그리하려면 세상 밖으로 나가야 할 것이라”(10). 교회는 세상 속의 교회이다. 그러나 교회가 세상 속에 존재하는 이유는 죄가 무엇인가를 교회의 거룩을 통해서 보여주어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교회가 세상과 똑같은 모습을 보인다면 하나님의 거룩성을 드러내지 못하는 인간의 친목 모임에 불과하다. 교회의 거룩성은 음행하는 자들과 사귀고 그들을 용납하며 그들과 동류로 취급받는 것에서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만 존재하는 것임을 알고 주님의 십자가만 드러내는 것에서 분명해진다. 하나님의 판단하심에 순종하고 그 말씀을 좇아가는 것이 주님의 몸된 모습이기 때문이다. 우리 교회는 유월절 정신을 좇는 주님의 공동체다운 모습이 있는가?(2001.3.18/김영대 http://blog.daum.net/reveal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