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6.레위기 11:1-15:33 정결과 부정
6강
레위기 11:1-15:33
정결과 부정
10장에서 나답과 아비후가 다른 불로 분향하려고 하였다가 불로 쳐 죽임을 당하게 되었다. 그 원인은 술 취함 때문으로 인하여 거룩한 것과 속된 것에 대한 구분을 가지지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를 계기로 하나님은 거룩한 것과 속된 것, 정한 것과 부정한 것에 대하여 말씀하신다.
11장은 동물의 정한 것과 부정한 것에 대하여, 12장은 출산시의 부정함에서 정하게 되는 것, 13-14장은 문둥병의 부정함과 정함에 대하여, 15장은 성적(性的)인 부정함에 대하여 말씀하고 있다.
여기서 거룩한 것과 속된 것에 대하여 철저히 구분하도록 하신 것은 제사장 나답과 아비후의 잘못과 관련되었음을 생각해 볼 때에 거룩한 것과 속된 것에 대한 구분은 제사장이 제사를 드리는 의미와 연관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제사장 나라로서 이스라엘에게 요구하시는 것이 무엇인가 하는 점을 생각해야 할 것이다.
그런데 제사 제도에 있어서 다른 문제들이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되었다는 사실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이 문제(정한 것과 부정한 것)에 대해서만큼은 오해를 많이 가지고 있는 것 같다. 예컨대 일반적으로 사람들의 건강에 좋지 못한 것은 하나님께서 이미 율법으로 금해 놓으셨다고 믿는 것이다. 한때는 이상구 박사라는 안식교인의 영향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금하신 것이 과학적으로도 맞는 것이라고 하는 이상한 진리에 많은 교회들이 공감하며 박수를 친 적이 있었다.
우리가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성경은 결코 우리들의 건강 문제에 대하여 관심을 가지고 정한 것과 부정한 것을 나눈 것이 아니며 또한 그것을 위해 기록한 것이 아니다. 뿐만 아니라 과학적으로 증명된다고 해서 하나님의 말씀이 되고 안 되고 하는 문제가 아니라는 사실이다. 다시 한 번 되새기거니와 성경은 과학이나 우리의 건강, 윤리적이거나 도덕적인 삶의 교과서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하여 말씀하고 보여 주는 하나님의 말씀이다(요 5:39).
45절에 의하면, “나는 너희의 하나님이 되려고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여호와라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라고 말씀하셨다. 11장 이하에서 말씀하는 거룩한 것과 속된 것에 대한 모든 기준은 이 말씀의 원리 안에 있다.
하나님이 거룩하시기 때문에 애굽에서 이스라엘을 건지셔서 그들의 하나님이 되신다는 것이다. 그러기 때문에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같이 거룩해야 한다고 말씀하고 있다. 이는 하나님의 선언이다. 빛이 있으라고 말씀하셨을 때에 그대로 되었던 것처럼 “너희도 거룩할지니라”는 말씀은 하나님이 그렇게 만드신 선언이고 또한 이미 그렇게 만드셨다.
여기서 이미 하나님께서 구분하여 주신 음식으로 말미암아 이스라엘이 거룩하여지거나 거룩해지지 않는 그런 일은 벌어질 수 없다는 것이 명백하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왜 정한 것과 부정한 것으로 구분하도록 하셨는가? 이 점을 이해하기 위하여 우리는 거룩이 무엇과 관련되어 있고 속된 것이 무엇과 관련되어 있는지를 생각해야 한다.
45절에서 하나님은 자신이 거룩하기 때문에 애굽에서 이스라엘을 건져내셨다고 말씀하셨다.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건짐 받아서 어디로 가고 있는가? 가나안 땅, 곧 약속의 땅이다. 그렇다면 그들이 가고 있는 가나안 땅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거룩과 관련되어 있고, 그들이 나온 땅 애굽은 속된 것과 관련되어 있다고 보아야 한다.
결국 이스라엘이 건짐 받은 것은 애굽에서 건짐 받았지만 궁극적으로 속된 것에서 건짐을 받았다는 의미이다. 무엇으로 말미암아 속된 것에서 건짐 받았는가? 그것은 오직 어린 양의 피로 인해서이다. 이스라엘은 제사장 나라이기 때문에 자신들이 속된 것에서 건짐 받은 이유를 드러내면서 하나님의 거룩성을 보여 주어야 할 의무가 있다.
이런 이유로 이스라엘은 성막에 희생 제사를 드리는 것뿐만 아니라 생활 전반에서 하나님이 말씀하신대로 정한 것과 부정한 것을 매사에 구분하여 조심함으로 어린 양으로 말미암아 베풀어진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을 잊지 말고 계속 확인하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여기서 우리가 주의해야 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무엇 때문에 무슨 근거로 정한 것과 부정한 것을 구분하셨을까 하는 것이다. 우리는 이것을 우리 마음대로 함부로 상상해서는 안 된다. 44절에 보면 하나님께서 정한 것과 부정한 것을 구분하신 그 근거를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을 볼 수 있다. “나는 여호와 너희 하나님이라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몸을 구별하여 거룩하게 하고 땅에 기는바 기어다니는 것으로 인하여 스스로 더럽히지 말라”고 하시면서 45절 말씀이 주어지고 있다.
이런 점에서 볼 때에 정결한 것과 부정한 것에 대한 구분은 땅과 관련되어 있는 것으로 상징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 말씀에 대한 배경으로 우리는 창세기 3:14을 생각할 수 있다. “여호와 하나님이 뱀에게 이르시되 네가 이렇게 하였으니 네가 모든 육축과 들의 모든 짐승보다 더욱 저주를 받아 배로 다니고 종신토록 흙을 먹을지니라.” 배로 다니고 흙을 먹는다는 것은 바로 저주의 상태를 표현하는 말이다.
이처럼 땅과 땅의 것들은 아담의 범죄로 말미암아 저주의 상태에 있게 되었다. 그 저주의 상태에서 벗어나는 것은 무엇으로 가능한가? 노아 언약에 보면 노아가 방주에서 나왔을 때에 번제를 드렸던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노아는 정결한 짐승을 잡아 번제를 드렸다(창 8:20). 그것은 노아 자신을 포함은 부정한 모든 것이 정결한 것의 희생으로 말미암아 살 수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바로 이러한 노아 언약에서의 희생을 모세 언약에 와서는 제사 제도를 통해 그리고 정결한 것과 부정한 것의 구분을 통해 보여 주고 있는 것이다. 결국 그 희생은 유월절을 통해 보여주고 있듯이 어린 양의 피흘림이다. 그 어린 양의 피 흘림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피흘리심으로 성취하셨다. 실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 양으로서의 피흘림이었다(고후 5:21).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모든 의가 성취되었다.
그 의는 성령에 의해 믿음으로 자기 백성들에게 주어졌다. 한 치의 오차도 없이… 그러므로 이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다(고후 5:17). 그렇다면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는 처음 창조 상태의 원리 속에 들어가 있다. 때문에 오늘날 그리스도 안에서는 더 이상 음식을 가지고 무엇은 먹을 수 있고 없고 하는 식으로 따져서는 안 된다.
구약에서 정한 것과 부정한 것을 구분한 모든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보여주기 위한 그림자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먹고 마시는 것과 절기나 월삭이나 안식일을 인하여 누구든지 너희를 폄론하지 못하게 하라 이것들은 장래 일의 그림자이나 몸은 그리스도의 것이니라”(골 2:16,17).
아직도 음식의 전부는 아니라 하더라도 일부분은 사도행전 15:20을 근거로 금해야 하는 음식이 있는 것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곧 “우상의 더러운 것과 음행과 목매어 죽인 것과 피를 멀리 하라”는 말씀이다. 그래서 지금도 음식을 가려서 먹는 율법주의자들이 한국 교회 안에는 존재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에게 먹도록 주어진 것 중에서 우리가 율법으로 금해야 할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오히려 로마서 14:14에서는 음식을 속된 것으로 여기는 그 사람이 속되다고 말씀하고 있다. 그래서 예수님은 사람의 입으로 들어가는 것이 더러운 것이 아니라 입에서 나오는 것들이 마음에서 나오는 것이므로 그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셨다(마 15:17-20).
사람은 누구나 다 죄인이기 때문에 그 속에서 나오는 것 중에서 죄악된 것이 아닌 것이 무엇이 있는가? 인간은 죄의 권세아래 있는 자이기 때문에 그 속에서 무엇을 하든지 죄가 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거룩한 것과 속된 것을 구분하여 말씀하신 것은 동물이나 식물 그 자체가 더럽거나 부정하다는 뜻으로 말씀하신 것이 아니다. 죄 아래에 있는 모든 것은 하나님께 더러운 것이기 때문이다.
음식 그 자체가 하나님 앞에서 우리 자신을 거룩하게 할 수는 없다. 그러나 또한 음식이나 이 땅의 식물 자체로 우리 자신을 풍족하게 하려고 해서도 안 된다. “식물은 우리를 하나님 앞에 세우지 못하나니 우리가 먹지 아니하여도 부족함이 없고 먹어도 풍성함이 없으리라”(고전 8:8).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니라 여러 가지 다른 교훈에 끌리지 말라 마음은 은혜로써 굳게 함이 아름답고 식물로써 할 것이 아니니 식물로 말미암아 행한 자는 유익을 얻지 못 하였느니라”(히 13:8,9)
따라서 하나님께서 정한 것과 부정한 것, 거룩한 것과 속된 것으로 나누셨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받으실만한 것과 받지 않으시는 것을 스스로 구분하신 것에 불과하다. 중요한 것은 왜 어떤 것은 거룩하고 어떤 것은 왜 속된 것인가 하는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자신이 받으시는 것을 땅에 속한 저주 아래에 있는 것이 아니라고 하는 사실에 있고, 또한 하나님 자신이 그렇게 정하셨다는 것에 있기 때문에 하나님이 주신 말씀대로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어야 한다.
그렇게 함으로 그들의 일상생활의 모든 것에서 이방인과 다르다는 인식이 있어야 되었던 것이다. 여기서 이방인과 다르다는 인식은 우월감을 가지고 이방인들을 무시한다는 차원이 아니라 누구에게 속해 있는가 하는 것이 드러나야 한다는 것이다. 즉 어린 양의 희생으로 말미암아 출애굽하였기 때문에 결코 자신을 위해 사는 자가 아니라 건지신 자를 위해 살도록 새로운 생명이 주어졌다는 사실을 인식하기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로마서에서 서로 음식의 문제와 같은 율법의 문제로 다투는 것을 책망하면서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롬 14:17)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는 예수님을 주 예수로 믿고 섬기는 자이다. 그분이 이 땅에 발붙이고 사시는 것이 아니라 이 땅을 떠나가셨다. 그렇다면 그분이 계시는 그곳에 우리의 삶의 목표가 있어야 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단지 세상에 하나님의 백성들을 두신 것은 나의 생명이 아니라 내 안에 하나님의 긍휼과 은혜로 주신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드러내고 그분을 위해 살도록 하기 위함이다. 성도는 세상에서 날마다 말씀으로 천국과 지옥을 갈라놓는 자이다(http://blog.daum.net/revealer 김영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