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요한복음 10:1-21 선한 목자
25강
선한 목자
요한복음 10:1-21
마태복음에 보면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다. “나와 함께 아니하는 자는 나를 반대하는 자요 나와 함께 모으지 아니하는 자는 헤치는 자니라”(마12:30). 중간지대, 회색지대는 없습니다. “나는 예수님을 구세주로 인정하지도 않고 부정하지도 않습니다”라고 하는 자들도 예수님을 부정하는 편에 속한다는 것입니다. 인간은 자신이 알든 모르든 어느 한 편에 속해 있습니다. 예수님 편에 속하지 않았다는 것은 마귀에게 속하였고, 마귀의 자식입니다. 결국 자기를 부정하고 주님을 인정하느냐 아니면 주님을 부정하고 자기 자신을 인정하느냐 하는 문제입니다. 우리는 누구를 인정하고 살아갑니까?
예수님을 지칭하는 말 중에 “목자”라는 말은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흔히 성화(聖畵)(?)라고 하는 그림이 있는데 이것을 배경으로 하고 있는 그림들이 많습니다. 목자가 지팡이를 가지고 한 마리의 양을 품에 안고서 푸른 풀과 쉴만한 물이 있는 곳으로 인도하고 있는 그림입니다. 어떤 사람들이 말하기를 그 목자 같은 어떤 청년을 예수님이라고 하는데 엉터리 같은 소리라고 생각됩니다. 제발 예수님을 긴머리와 턱수염이 덥수룩한 모습으로만 연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어쨌든 그 그림의 영향인지는 모르겠습니다마는 일반적으로 교인들이 예수님이 목자라고 한다면 즉각적으로 느끼는 감정은 자애로움, 인도, 보호와 안전, 편안함 등과 같은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잘 아는 시편 23편을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라고 읽거나 암송하면 한없이 포근하고, 하나님은 목자로서 그저 좋은 것이라면 뭐든지 다 제공해 줄 것 같은 그런 느낌을 가지는 것입니다. 그러나 반드시 이런 느낌만 가지고 있다면 시편 23편의 말씀을 제대로 이해했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뿐만 아니라 예수님이 자신을 “선한 목자”라고 선언하신 말씀을 바르게 이해했다고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당시의 유대인들도 예수님의 이 선언에 대하여 두 부류로 갈라집니다. 이 말씀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실족하게 되었는가 하면, 반대로 이 말씀으로 인하여 예수를 믿게된 자들도 있습니다. 많은 유대인들은 예수님께서 “나는 선한 목자라”고 하셨을 때에 예수님이 귀신들려 미쳤다고 생각했습니다. 적어도 이런 반응이 나오게 된 것은 그들이 가지고 있는 성경관으로 예수님을 판단했기 때문입니다. 자기들의 사고방식 속에 예수님을 집어넣어 보니 전혀 맞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즉 그들이 알고 있는 목자란 하나님이었습니다.
다윗이 시편 23편에서 고백하고 있듯이 여호와가 이스라엘의 목자입니다. 다윗이 하나님을 목자라고 부른 것은 자신의 왕권적인 입장에서 표현한 말입니다. 다시 말해서 자신이 이스라엘의 왕이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이 왕이신 목자라는 의미입니다. 진정한 왕이신 그분이 다윗 자신에게 왕의 직무를 주신 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에 대하여 목자의 역할을 감당하라는 것이었습니다.
이런 점에서 하나님은 에스겔 선지자를 통하여 이스라엘 지도자들을 목자로 부르시는 것입니다. 에스겔 34장은 이스라엘의 목자를 아주 신랄하게 공격하고 있습니다. 한 마디로 이스라엘의 지도자들은 전부 자기를 위한 목자였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에스겔 선지자가 복음으로 제시하고 있는 것은 이것입니다. “나 주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가 친히 내 양의 목자가 되어 그것들로 누워 있게 할지라”(겔34:15). 하나님께서 친히 목자로 이 땅에 오시겠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지도자를 목자로 칭하신 분이 하나님이신데 그분이 친히 목자로 오신다는 것은 무슨 의미입니까? 하나님이 이 땅에 목자로 오신다는 것은 기존의 이스라엘 지도자들을 더 이상 목자로 보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목자가 있는데도 불구하고 목자가 온다는 것은 기존의 목자는 목자가 아니라는 의미입니다. 즉 이스라엘의 지도자들에 대한 불신이요 정죄입니다. 그들은 목자의 역할을 제대로 해내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누군가 이 땅에서 자신을 목자라고 선언한다면 그는 둘 중의 하나입니다. 미친놈이 아니면 하나님입니다. 유대인들은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메시야관을 가지고 예수님을 미친놈으로 취급했습니다(20절). 그러나 그분은 자신을 선한 목자로 나타내셨습니다. 결국 예수님이 자신을 “선한 목자”라고 선언하신 것은 자신이 하나님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을 어떻게 선한 목자라고 말할 수 있고, 무슨 근거를 가지고 하나님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까?
11절에 보니까 이런 대목이 나옵니다. “나는 선한 목자라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거니와.” 즉 진짜 선한 목자인지 아닌지는 양들을 위해 목숨을 버리는가 아닌가 하는 것으로 알 수 있다는 것입니다. 스가랴 선지자는 이미 하나님께서 자신의 목자를 스스로 치신다고 예언하고 있었습니다(슥13:7).
각기 제 길로 가는 양들을 위해서 희생되는 목자여야 한다고 이사야 선지자도 예언했습니다(사53:6). 자신을 희생제물로 던지지 않으면서 자신을 목자라고 선언한다면 그는 가짜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나는 선한 목자라 내가 내 양을 알고 양도 나를 아는 것이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 같으니 나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14-15절)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구약을 성취하는 목자로 오셨고, 그것을 염두에 두셨기 때문에 자신을 죽이려고 기회를 엿보고 있는 그런 상황에서도 담담하게 자신을 선한 목자로 밝히셨던 것입니다. 18절에 보면 “나는 버릴 권세도 있고 다시 얻을 권세도 있다”고 하시면서 “내가 스스로 버리노라”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이 힘이 없어서 유대인들에게 잡혀 십자가에 죽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은 스스로 자신을 십자가에 던지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왜 예수님이 그냥 목자가 아니라 “선한” 목자라고 말씀하셨는지 파악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기존의 이스라엘이 선하지 않다는 것을 내포하고 있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것은 인간 목자를 공략하시면서 오셨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것을 인정하시면서 거기에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조금 더 추가하면 훌륭한 사람이 되고 구원받을 수 있겠다고 말씀하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땅의 목자를 완전히 부정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삯군이 어떤 자들인가를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삯군은 목자도 아니요 양도 제 양이 아니라 이리가 오는 것을 보면 양을 버리고 달아나나니 이리가 양을 늑탈하고 또 헤치는니라”(12절). 이 말씀은 이스라엘의 지도자급에 있는 모든 자들은 삯군이라는 의미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을 못 알아 볼 뿐만 아니라 예수님을 따르지도 않는다는 것입니다(4-5절). 이스라엘은 주님을 아는 일에 완전히 실패하였습니다. 이 때문에 예수님이 오신 것입니다. 어느 정도 부실이었고, 무언가 인간이 스스로 구원을 이룰만한 가능성이 있었다면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실 필요가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가능성이 전혀 없었습니다. 가능성 0%였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진짜 목자가 와야만 구원이 이루어지며 하나님의 약속이 성취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선한 목자이신 예수님을 바라보지 않으면 희망이 없는 자들입니다. 예수님을 믿지 않는다면 더 이상 어떤 식으로도 구원이나 천국에 대하여 말할 수도 없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말씀을 통해 하나님이신 그분이 친히 이 땅에 오셔서 기존의 인간 목자들을 왜 삯군이라고 정죄하실 수밖에 없는가를 다시 한 번 확인해야 합니다. 뿐만 아니라 왜 주님이 친히 이 땅에 오셔서 목숨을 버리는 목자가 되셔야 되었던가를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그것은 우리가 어떤 존재였는가를 아는 것에서부터 시작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부족한 목자, 조금이지만 그래도 도움이 될 수 있었던 목자가 아니라 도무지 도움이 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도리어 방해가 되는 삯군이었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합니다. 예수님 당시의 이스라엘이 그랬고 오늘 우리가 바로 삯군이라는 사실입니다. 이런 점에서 신앙이란 자기가 누구인가를 먼저 아는 것입니다. 자기 자신의 본래 모습을 발견하는 것이 신앙입니다. 이것이 은혜요 축복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서두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인간은 결코 중간지대에 있는 자는 없습니다. 이제까지 주님을 나의 주님으로 인정하지 않았었다면 내가 주님을 헤치고 반대편에 서 있던 자임을 인정하시기 바랍니다. 또한 지금 이 순간도 나는 주님의 목자 되심을 부정할 소지가 있음을 또한 인정해야 합니다.
주님을 부정하는 모습이란 단순히 주님을 거부하는 모습이 아니라, 다른 목자의 모습으로 바꾸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잘하고 있는 인간인데 거기에 조금 더 보태면 더 잘할 수 있을 것 같아서 주님이 목자로 오셔서 우리에게 무엇인가를 더하여 주는 그런 목자의 상(像)으로 말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인간에게 편의를 제공하기 위해 오신 목자가 아닙니다. 우리의 부족한 것을 돕기 위해 오신 분이 아닙니다. 나를 위해 목숨을 버리는 목자로 오신 것입니다.
주님은 오늘도 우리에게 선한 목자로 다가 오셔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세상의 것이 쉴만한 물가가 될 수 없고, 인간의 것이 푸른 초장이 결코 될 수 없노라! 십자가에서 너를 위해 목숨을 버린 나 자신이 너에게 쉴만한 물가요 푸른 초장이니 나를 믿고 내가 너를 위해 희생하였듯이 나를 위해 희생하는 삶을 살지 않겠느냐?”<1996년 12월 8일/김영대 http://blog.daum.net/reveal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