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약강론/요한복음

15.요한복음 6:1-15 오병이어

불편한 진리 2015. 1. 21. 17:11

15

오병이어

요한복음 6:1-15


성경 말씀을 자신에게 적용한다는 것자신을 말씀에 적용한다는 것은 전혀 다른 것입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성경을 읽을 때에 내게 주시는 말씀으로 이해합니다. 내게 주시는 말씀으로 이해한다는 것은 나를 중심으로 성경을 본다는 의미입니다. 나에게 힘이 되는 말씀, 나에게 위로가 되는 말씀으로 찾고 또 그런 말씀으로만 봅니다. 그래서 우리의 신앙생활은 우리가 일을 벌려놓고 그 일에 하나님을 초빙해 오는 식입니다. 그저 도움만 되면 된다는 식입니다.

그것이 아니라 성경 말씀을 중심으로 보아야 합니다. 성경 말씀을 중심으로 본다는 말은 말씀을 통해 하나님께서 자신을 어떻게 나타내셨는가? 그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것이 무엇인가 하는 관점으로 보는 것입니다. 말씀에 나 자신을 어떻게 순종시켜 나갈 것인가? 이것이 우리가 성경을 보는 관점이어야 합니다.

오늘 본문은 오병이어”(五餠二魚)라는 제목으로 잘 알려진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갈릴리 바다 건너편으로 가시자 큰 무리가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예수님의 이적을 보았기 때문이었습니다(2). 때는 유월절이 가까웠습니다. 많은 사람들을 보시면서 예수님은 빌립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어디서 떡을 사서 이 사람들로 먹게 하겠느냐?”(5). 빌립이 대답하기를 각 사람으로 조금씩 받게 할지라도 200데나리온의 떡이 부족하리이다라고 했습니다(7). 그때 안드레가 한 아이의 도시락인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져왔습니다. 예수님께서 축사하시고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니 5,000명이 먹고 남은 조각이 12바구니에 찼다고 했습니다.

우리는 이 본문을 어린 소년의 도시락을 예수님이 축사하시니까 5,000명이 먹고 남았다. 그러니 우리도 우리의 작은 것이라도 주님께 바치면 주님께서 크게 쓰신다는 식으로 생각할 수는 없습니다. 뿐만 아니라 요즘 와서 더욱 심각하게 대두된 환경 문제 때문에 이 본문이 마치 예수님도 남은 조각을 수거하셨음으로 환경보호를 주장하고 권장하는 근거로 이용될 수 있는 본문이 아닙니다.

본문의 끝부분에 보면 그 사람들이 예수의 행하신 이 표적을 보고 말하되 이는 참으로 세상에 오실 그 선지자라 하더라 그러므로 예수께서 저희가 와서 자기를 억지로 잡아 임금 삼으려는 줄을 아시고 다시 혼자 산으로 떠나 가시니라는 말씀이 나옵니다(14-15).

신명기 18:15에 의하면 나와 같은 선지자 하나를 일으키시리라고 말씀합니다. 이러한 말씀을 근거로 유대인들은 생각하기를 메시야는 모세와 같은 선지자이고 그 선지자는 모세가 광야에서 행했던 만나의 이적을 다시 나타내시리라고 기대하였습니다. 유월절을 기하여 그쳤던 만나가(참고 수5:10-12) 다시 유월절을 기해 주어지리라 여겼기 때문에 유월절이 가까웠을 때에 행해진 오병이어의 표적으로 말미암아 사람들은 더더욱 예수님을 메시야로 생각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런 이유 때문에 사람들은 예수님을 왕으로 삼으려고 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성경이 약속하고 있는 그 메시야를 자기들의 왕으로 받아들이려고 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이 기대한 메시야는 사실 성경과 상관없는 것이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표적을 보고 그 표적에 의해서 자기들의 배를 채워주는 메시야상으로 기대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예수님을 억지로 잡아 왕으로 세우려고 했던 것입니다.

이것이 비단 유대인들이 기대한 메시야상()이 아니라 오늘 우리 모든 인간들이 기대하는 신에 대한 모습입니다. 적어도 신이라면 신을 향해 섬기는 백성들의 먹고 사는 문제만큼은 해결해 줄 수 있는 능력의 신이어야 한다는 생각입니다. 이것이 세상이 원하는 주님입니다. 세상이 원하는 주님은 주님 그 자체로 만족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필요에 의한 주님으로 만드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14장에 이 오병이어의 이적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거기에 보면 “(예수께서)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사 하늘을 우러러 축사하시고 떡을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매 제자들이 무리에게 주니”(19)라고 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가지사···축사하시고···떡을 떼어···주시매라는 표현은 예수님께서 유월절 만찬 때에 행하셨던 것과 같은 표현으로 쓰고 있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는 자신의 살을 찢으시고 피를 흘리심으로 죄인들을 위하여 당하는 십자가의 고난과 죽음을 상징하는 것이었습니다. 즉 마태복음에서 오병이어의 이적으로 예수님의 십자가 고난과 죽음을 미리 보여주고자 하시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역시 이런 주님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런데 본문에서 특이한 것은 예수님이 빌립에게 시험을 하시는 장면이 묘사되고 있습니다. 그 의도가 무엇입니까?

빌립을 시험하는 것이 예수님이 몰라서 시험하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6절에 의하면 이렇게 말씀하심은 친히 어떻게 하실 것을 아시고 빌립을 시험코자 하심이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에게는 다른 뜻이 있다는 것입니다. 다른 뜻이란 빌립에게 시험을 하심으로 그 다음에 주어질 예수님의 이적이 어떤 의미를 가지고 주어지는가를 나타내고자 하시는 것입니다. 보잘것 없는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많은 사람들이 원대로 먹었다고 했습니다(11).

그와 마찬가지로 예수님께서 죄인들에게 주시는 것은 사람들이 200데나리온이 필요하겠다고 말하는 것과는 전혀 다른 차원의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보잘 것 없는 것으로 여기는 오병이어와 같이 사람들이 보잘 것 없는 것으로 여기는 예수님 자신의 살과 피를 주심으로 구원을 이루신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하찮게 여기는 십자가가 하나님의 능력이 되고 거기에 영생의 비밀을 두신 것입니다.

사람들은 물질적인 가치기준을 가지고 있습니다. 배부르게 할 정도가 아니고 적당하게 조금씩 받게 할지라도많은 돈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빌립과 마찬가지로 인간들은 물질적인 풍요와 만족을 구원으로 여기는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이 우리에게 보여주시는 것은 이 땅의 것으로 먹고 사는 문제에 대한 것이 아니라 십자가 속에 숨겨진 생명의 비밀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주님은 항상 우리에게 화려하게 보이는 신으로 나타내시지 않습니다. 오병이어와 같이 보잘 것 없는 주님으로 존재하시고 자신을 나타내시는 주님이십니다.

이사야 53장에 보면 이런 대목이 있습니다. “우리의 전한 것을 누가 믿었느뇨 여호와의 팔이 뉘게 나타났느뇨 그는 주 앞에서 자라나기를 연한 순 같고 마른 땅에서 나온 줄기 같아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우리의 보기에 흠모할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 그는 멸시를 받아서 사람에게 싫어버린 바 되었으며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라 마치 사람들에게 얼굴을 가리우고 보지 않음을 받는 자 같아서 멸시를 당하였고 우리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하였도다라고 했습니다(53:1-3).

우리가 그를 귀히 여겨서 그분이 우리에게 보답으로 구원을 주신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원한 적도 없고 관심을 가진 적은 더더욱 없었습니다. 우리는 한 번도 주님을 주님답게 대접해 본 적이 없는 사람입니다. 바울이 자신의 무식한 열심으로 스데반을 죽였듯이 하나님께 대한 인간의 무지한 충성이 주님을 십자가에 못박았던 것입니다.

우리가 열심히 봉사하고, 기도하고, 헌금하면 주님이 기뻐하실 것이라고 지레짐작하지 마십시오. 주님은 우리의 기도, 전도, 예배, 헌금, 봉사가 없어도 하나님은 자신이 행하셔야 될 일이라면 하나님 자신을 위하여 열심히 행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리고 그것으로 인하여 스스로 기뻐하시는 분이십니다. 우리의 봉사가 있어야 되고 내가 능력 받아서 주님의 일을 크게 한가락 해 내어야 주님이 주님답게 대접받으시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것은 주님을 별 볼일 없는 존재로 만드는 것에 불과합니다.

기적을 믿는 것과 그 기적을 행하신 분을 믿는 것은 분명한 차이가 있습니다. 우리는 얼마나 주님 그분에 대한 관심보다도 우리에게 베풀어질 이적에 관심가졌습니까? 그것 때문에 오늘도 주님은 우리를 피해서 산으로 가실 수밖에 없는지도 모릅니다. 우리는 항상 주님을 임금 삼아서 내 유익을 챙기려는 죄인이라는 사실을 잊지 않도록 합시다. 단언컨대 세상이 존재하는 동안은 결코 주님을 주님답게 대접할 수 없을 것입니다.

세상이 원하는 주님이란 애초부터 근원적으로 자신의 필요에 의해서만 찾게되는 주님이기 때문입니다. 나의 필요에 의해서가 아니라 주님이 살아 계시다는 것으로, 그분이 세상을 말씀으로 창조하셨다는 것으로, 그리고 그분이 십자가를 지셨고 십자가를 지신 그분이 나를 부르셨다는 것으로 만족하면서 하는 신앙생활이어야 할 것입니다. 단순히 주님의 주님 되심 앞에 자신을 복종시킬 수 있다면 그 사람은 주님이 요구하시는 신자의 모습일 것입니다<199698/김영대 http://blog.daum.net/revealer>